“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수학 복습과제를 알려드리겠다. 459페지(쪽) 35번, 913페지 55번, 135페지 86번…”
북한 평양방송, 지난달 15일 새벽 "459페지 35번..." 이상한 방송 "한국도 지난 2월부터 난수방송 재개"...신세대 취향 노래로 시작
지난달 15일 새벽 12시45분부터 57분까지 북한의 대남매체인 평양방송에서 이같은 방송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한국의 관계당국에서 바로 촉각을 곤두세웠습다. 평양방송에서 난수방송이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중단된 뒤 16년 만에 시작됐기 때문이다. 관계당국은 이번 난수방송이 남파 간첩에게 대남 지령을 보내는 방송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남북간 물밑에서 벌어지는 첩보전이 더 치열해졌다는 의미겠죠.
난수방송(亂數放送ㆍNumbers Station)은 쉽게 말하면 암호방송입니다. 숫자ㆍ문자ㆍ단어로 조합한 암호를 특정 상대에게 송신하는 방송이죠. 주로 다섯자리 숫자가 사용됩니다. 난수의 원래 뜻은 무작위로 만들어진 숫자입니다. 난수방송의 ‘난수’가 난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들여 만든 암호입니다.
난수방송은 단파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30㎒의 단파(短波ㆍShortwave)는 지구를 계란껍질처럼 여러 겹 둘러싼 전리층에 반사됩니다. 그래서 ‘지상→전리층→지상→전리층…’ 식으로 지구 반대편에서도 날아갈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2년부터 ‘미국의 소리(VOA)’ 한국어 방송에서 ‘일제는 패망할 것이고, 한국은 독립한다’는 내용을 알렸고, 이 단파방송을 숨어들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습니다.
국경을 훌쩍 넘을 수 있는 특성 때문에 단파는 1차 세계대전부터 첩보전용으로 활용됐습니다. 그래서 1970~80년대엔 단파라디오를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국내 생산 단파라디오는 모두 수출용이며, ‘한밤중 단파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간첩으로 신고하라’는 포스터까지 나온 시절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난수방송은 방송 시작 전 이미 약속한 음악이나 노래를 틉니다. ‘곧 지령을 내리겠다’는 신호입니다. 지난달 15일 북한의 난수방송에 앞서 북한의 혁명가요인 ‘기쁨의 노래 안고 함께 가리라’가 나왔습니다. 이 노래는 북한이 6ㆍ25 당시 공작원들의 활동을 소재로 70년대에 만든 연작 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의 주제가입니다. 가끔씩 일기예보로 가장한 난수방송도 나온다고 합니다.
이번 난수방송을 관계당국이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후문입니다. 난수방송은 단파라디오로 누구나 들을 수 있습니다. 난수방송의 암호가 철저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죠. 난수는 일정한 패턴이 없습니다. 이를 풀려면 난수표나 난수책을 이용해야만 합니다.
난수표는 숫자와 단어의 쌍으로 이뤄진 표입니다. 예를 들면 ‘00123’은 ‘중앙일보’를, ‘31964’는 ‘이슈인사이드’라고 적힌 난수표가 있습니다. 난수방송에서 00123과 31964를 들었다면, 그 뜻은 ‘중앙일보 이슈인사이드’라는 겁니다. 난수표가 없다면 해독이 힘듭니다. 매번 난수표를 갈면 수퍼컴퓨터라도 깨기가 어렵습니다. 난수표 교체가 쉽지 않기 때문에 보통 간첩은 정기적으로 난수표를 바꿉니다.
1995년 충남 부여에서 총격전 끝에 체포된 남파간첩 김동식 사건의 경우 관계당국은 묘지에 설치된 드보크(무인함)에서 난수표를 찾아냈다. [중앙포토]
난수표 역할을 하는 난수 독용 책자인 난수책도 있습니다. 이번 난수방송의 경우 “459페지(쪽) 35번, 913페지 55번, 135페지 86번”은 난수책 459페이지의 35번째 단어, 913페이지의 55번째 단어, 135페이지의 86번째 단어를 각각 뜻할 수 있습니다. 대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난수책으로 쓰입니다.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때 난수책이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의 대북 연계 혐의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됐습니다. 그가 북한과의 통신에서 사용한 난수책은 미국 작가 조앤 그린버그의 소설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였습니다. 정신분열증을 앓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김 위원은 이 책을 그냥 서점에서 샀다고 한다.
민혁당 사건에서 난수책으로 나온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 91년 출판된 원본은 절판돼 사진은 2014년판 『나는 너에게 장미정원을 약속하지 않았다』.
난수방송은 해외사례도 많습니다. 냉전 시대 시작한 뒤 2008년 중단된 ‘링컨셔 포처(Lincolnshire Poacher)’는 영국이 동구권에 잠복한 자국 스파이에게 지령을 내리는 난수방송으로 추정됩니다. 대만에서 중국 본토로 송신하는 난수방송도 있습니다. 98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시에서 미국계 쿠바인 5명을 간첩죄로 체포했습니다. 쿠바군 장교 출신인 이들은 쿠바에서 보내는 난수방송 ‘아텐시온(Atención)’을 통해 지령을 받았습니다.
인터넷에선 지난달 15일 이전에도 남북간 난수방송이 계속됐다는 주장을 볼 수 있습니다. 난수방송 청취 전문 인터넷 카페 ‘라디오 마니아’ 등에 따르면 지난 2월 14일 오후 11시 30분 단파 주파수인 5290㎑를 통해 대북 난수방송인 ‘V24’가 재개됐습니다. 당시 남쪽에서 북한으로 백아연의 ‘이럴거면 그러지 말지’를 튼 뒤 북쪽에서 여성이 8분간 난수방송을 했습니다.
▶관련 기사 대북 난수표 방송 심리전 재개한듯 이후에도 ‘V24 난수방송를 들었다’는 글은 인터넷 단파 청취 커뮤니티에 계속 올라왔습니다. 난수방송 시작에 앞서 나온 노래는 ‘오늘부터 우리는’(여자친구), ‘매일 그대와’(소진) 등 최신 가요들이었습니다. 그래서 ‘V24의 방송국이 DJ를 신세대로 바꿨기 때문’이라는 농담도 있습니다.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KARL) 관계자는 유튜브에 올려진 난수방송 녹음을 들은 뒤 “단파방송을 원거리에서 들을 때 나타나는 페이딩(fadingㆍ소리가 보통보다 멀리 또는 가깝게 들리는 상태) 현상이 있다. 실제 단파방송을 녹음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페이딩 현상은 단파 전달과정에서 왜곡되거나 잡음이 들어가면서 벌어집니다.
V24는 영국의 난수방송 청취 전문 커뮤니티 ‘에니그마(Enigma) 2000’이 부여한 코드입니다. V는 영어(E)와 러시아어 등 슬라브 계통 언어(S) 이외 언어의 난수방송을 가리킵니다. V24는 2008년 처음 등장했고 지난해 6월 방송이 중단했다 다시 나왔습니다. 당시 북한의 4차 핵실험(2월 7일) 이후 한국이 북한을 상대로 한 심리전 차원에서 난수방송을 재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북한이 운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난수방송인 ‘V28’은 지난해 8월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평양방송을 통해 나오는 난수방송은 ‘V15’입니다. AM을 통해 방송될 때는 ‘A3’라고 부릅니다.
V28은 ‘앵무새 방송’ 또는 ‘낙두산 방송’이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태양, (숫자), 태풍, 일 공 공, 공 공 하나, 앵무새”라는 구문으로 방송이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여성이 방송을 하지만, 가끔 남성의 목소리가 등장해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락두산 락두산 락두산”이라는 구문을 송출하기도 합니다. 락두산은 북한의 함경북도 청진시의 해방산 봉우리 이름이라고 합니다. 해방산은 6ㆍ25 전쟁 인민군 전사자와 남파 간첩의 묘지가 조성됐다고 합니다.
북한은 2000년대 이후 남파 간첩과의 교신을 할 때 난수방송 대신 최첨단 암호화 방식인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를 훨씬 더 자주 사용했습니다. 스테가노그래피는 비밀정보를 동영상ㆍ사진ㆍ음악 파일 안에 암호로 숨겨 놓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북한이 왜 과거방식인 난수방송을 재개했을까요. 정부 당국자는 “5년 혹은 10년 이상 장기 은둔해온 공작원을 일컫는 ‘슬리핑 에이전트(sleeping agent)’를 깨우려는 지령일 수도 있다”고 추정합니다. 또다른 설명으로 스테가노그래피가 한국의 관계당국에 의해 여러번 적발돼 보안성이 뛰어난 난수방송으로 되돌아 왔다는 겁니다.
진짜 이유는 뭘까요. V24와 V28도 난수방송이 맞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통일이 된 뒤에서나 풀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