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이완용 생애

산야초 2016. 8. 5. 23:15



고향의 그림자 - 남인수



고향의 그림자 - 남인수

작사 손로원 작곡 박시춘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주막 등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적에
똑딱선 프로펠러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드린다
물위에 복사꽃 그림자 같이
내 고향 꿈에 어린다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 고향
첫 사랑 버린 고향이길래
종달새 외로 히 떠있는
영도다리 난간잡고 울적에
술 취한 외항선원 담배불
연기가 내 가슴에 날린다
연분홍 비단실 꽃구름 같이
내 고향 꿈이 어린다


   李完用

  생몰년도: 1858년(철종 9)-1926년
  자; 경덕(敬德)
  호: 일당(-堂)
  활동분야: 정치

   생애와 업적
1896년 7월 2일 역사적인 독립협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독립협회의 실질적인 주도자는 서재필이었지만

 당시 그는 미국 국적을 갖고 미국 이름을 쓰는 처지라 앞에 나서지 못한 채 산파 역할만 담당했다.

처음 독립협회를 만든 목적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후손에 전하기 위해 독립문을 세우고,

 이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하기 위채 창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날 창립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이완용이었다.

보조금을 가장 많이 내놓은 것도 그와 그의 형이었다.

고종을 위협해 대한제국을 일제에 바친 매국노 이완용이 초기 독립협회를 주도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또한〈독립신문〉은 이완용에 대해 “대한의 몇 째 안 가는 재상" 이라고까지 극찬하며

  수 차례에 걸쳐 매우 우호적인 기사를 실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불과 10여 년 만에 한일합방에 앞장선 매국노가 된 것일까.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가난한 선비 이석준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완용은 매우 총명한 아이였다.

여섯 살 때 아버지에게《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몇 달 만에 마치고,

《동몽선습》을 배운 뒤 일곱 살에 《효경》,여덟 살에 《소학》을 끝내 주위에서 모두 놀랐다고 한다.

이런 그의 재능은 열 살 되던 해

  같은 집안의 먼 친척인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든든한 배경까지 갖추게 된다.

흥선대원군의 친구이자 사돈이며,여흥 민씨를 처로 얻었던 이호준은

 고종 즉위와 함께 출세 길에 올라 이후 30년 이상 정부의 요직을 맡아보며

 그 어렵던 시기에 평탄한 벼슬살이를 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능협을 배운 때문인지 이완용도 단 한 차례의 귀양이나 투옥 없이 평생을 부귀영화 속에 살았다.

총명한데다 가문의 배경까지 갖춘 이완용의 출세는 이미 예약되어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는 주위 사람들의 기억에 “매우 사려 깊은 인물”이었으며

무슨 일이든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주위에 자주 의견을 물었으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결정하고 나면 반드시 실행하고

  실행하면 반드시 실적을 보았던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이호준은 이완용의 교육에 많은 공을 들였다.

스물다섯 살 되던 해인 1882년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한 이완용은

 규장각대교• 검교• 홍문관수찬 등을 거쳐 18&5년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와 선학문을 배웠다.

이듬해 미국전권대선 박정양 밑의 참찬관(參贊官)으로 임명돼 미국으로 갔다가

 1년을 미처 못 채우고 병을 핑계로 돌아왔으나,

얼마 안 있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대리공사로 승진했다.

육영공원에서 받은 신학문과 주미공사관경력은 그를 친미파로 이끌었고,

그는 이후 친미파와 친러파가 주축이 된 정동파를 이끌며

  아관파천(俄館播遷)과 독립협회 활동을 주도하게 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결과를 주시하면서 그는 일본이 청나라를 눌렀지만,

다시 러시아와 프랑스,독일이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일본을 제압하는 것을 보았다.

그 해 일본 전권공사로 나가라는 명이 그에게 떨어졌지만,

 이완용은 생모의 상중임을 들어 사양하고 외무 협판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명성황후가 친일 김홍집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박정양 내각을 출범시킬 때

미국공사 앨런(Allen,Horace Newton)의 추천으로 30대의 나이에 학부대선으로 밸탁된다.

4개월 남짓 짧은 기간 동안 학부대신 자리에 있으면서

이완용이 우리나라 근대 교육에 매우 인상적인 발지취를 남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시실이다.

성균관을 개편하고,초등교육의 의무화를 규정했으며,

 매년 일정한 수의 유학생을 일본에 보내기로 하는 계약서를 체결했다.

그러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흥선대원군을 받드는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재빨리 미국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곳에서 그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Veber, Karl Ivanovich). 이범진 등과 협력하여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빼돌리는 일을 성공시킨다.

친미파였던 이완용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것은

 러시아와 달리 대한제국의 정치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미국의 입장 때문이었다.

아관파천에 성공한 이들은 친러 내각을 출범시키는데,

이때 이완용은 외부대신 자리에 앉으며 학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의 서리를 겸했을 뿐아니라

그의 형 이윤용은 군부대신에 경무사(警務使)까지 겸했다.

형제가 외교• 군사• 경찰권을 모두 장악한 것이다.

친미• 친러파들로 구성된 새로운 정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된 미국 공사 앨런은

 경인철도 부설권,운산금광 채굴권 등을 자신의 친구 등 열강들에게 넘겼는데,

 세상 물정 몰랐던 조선 왕실과 관리들은 거의 공짜로 빼앗기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듯하다.

앨런의 이러한 활동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물론 외부대신자리에 있던 이완용이었다.

이완용은 미국의 투자가 늘어나면 조선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며 장담했다지만,

 미국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일본과 함께 축배를 들었을 뿐이다.

한편,그 해 독립협회가 출범했고,

이완용은 1년 6개월 정도 주도적으로 독립협회를 이끌며 활동하다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 책임에 제명되었다.

이 무렵 고종이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가 친러파 대신 친일파가 고개를 들자

 그는 몇 년 동안 전라북도 관찰사로 내려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살폈다.

그리고 일본이 러일전쟁마저 승리로 이끈 1904년 오랜 숙고를 끝내고 다시 조정에 나온다.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이미 자주성에 큰 상처를 입은 나라의 학부대신으로 다시 등장한 그는

 친일 매국의 길로 성큼성큼 들어서고 있었다.

러일전쟁 뒤 미국과 영국의 지지를 이미 얻은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보내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기 위한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모든 대신들이 절대 반대 하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었지만,

이완용은

“이번 새로운 조약은 서로 변동할 수 있도록 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논의를 흐렸고,

결국 이토 히로부미가 궁궐로 들어와 대신들의 의견을 물을 때

‘가(可)’라고 대답한 을사 5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실제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완용은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해온 뒤 총리대신이 되어 매국내각을 이끌었다.

이토의 수족이 된 이완용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을 위협하여 퇴위시키는 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군대 해산 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이들을 진입돼야 한다며 조선인끼리의 싸움을 조장했다.

또한 순종이 즉위한 뒤 정미 7조약의 체결에 편3해,정미7적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던 1909년 이재명 의사의 칼을 맞지만,질긴 생명은 끊어지지 않았고,

 그의 매국행적은 일본의 국권강탈을 주도적으로 이끌기에 이른다.

1910년 총리대신으로 내각회의를 소집해 합병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를 소집해

 합병 안을 가결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이 되어

 통감 데라우치의 관사로 찾아가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한일합병을 이룬 공로로 훈1등 백작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퇴직금 1,458원,총독부의 은사공채 15만원을 받았다.

그 뒤에도 그는 중추원 고문이 되고 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주장했으며.

3 •1운동을 비난하는 경고문과 담화문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해 1920년 후작으로 승급되었다.

조선귀족원 부회장,농림주식회사 고문,총독부 산업조사위원,조선미술전람회 심사원,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등을 맡으며 끝까지 일제에 기생하다 1926년 양력 1윌

 서울 옥인동 자기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겨울철만 되면 해수병이 도져 고생했는데,이재명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이었다 한다.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선인봉 아래 ,전라북도 관찰사로 있을 당시 골라둔 명당터에 묻혔다.

친미파에서 친러파,그리고 친일파로 변신하며 일신의 영달을 추구한 그의 삶에 대한 변명은

 비서였던 조카 김명수에게 남긴 말에서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 당시 미국과의 교류가 점점 요긴하였기 때문에

그런 때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히여 공부하고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개혁 뒤 을미년에 이르러 아관파천 사건으로 인해서 친러파라 일컬어졌다.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남을 알릴 즈음에 친러파에서 전환하여 현재의 친일파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무릇 천도에는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것을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에도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을 또 변역이라 한다.

천도인사에 때에 따라 변역이 없다면 이것은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될 바가 없을 것이다.


  평 가
이완용의 죽음뒤 총독 사이토는

“이완용 후작은 동양일류의 정치가에 비하여 하등의 손색이 없고

  그 영풍은 흠모할 바가 많았는데 이제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국가에 일대 손실이다”라며 애석해 했고,

그의 장례는 고종 국장 이후로 최대의 인파를 동원한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당시 총독부 관지〈매일신보〉는 화려한 장례 행렬을 두고

“생전 영예가 사후에 잇는 대장의”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일반백성들에게 그의 이름은‘매국노’와 같은 의미였고.

서울의 공중변소에 ‘이• 박 요리점’이라는 낙서가 심심치 않게 씌어질 만큼

그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은 컸다.

공중변소가 이완용과 박제순의 요리점이라는 말은 이들이 똥을 먹는 개와 같다는 조롱이었다.

유명한 지사가 골라주었다던 명당에 위치한 그의 묘지는

 광복 후 곧잘 초등학생들의 소풍장소가 되었는데,

 아이들이 묘에 올라 "요놈 매국노는 뒈저라"라고 떠들어대는 통에

미국에 숨어 살던 손자들이 무덤을 파서 세체를 화장하고 무덤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아관파천
1896년 2월11일 고종과 왕세자가 궁궐을 벗어나

 지금의 서울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간 사건을 말한다

이를 계기로 1894년 길오개혁 이후 계속된 친일개화파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되고 난 뒤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이용해 친미• 친러 세력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파천직후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친미 친러파 인물들0] 대거 기용되어 내각을 구성했다.

아관파천은 기혼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의 세력다툼의 결과였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갔다.


   삼국간섭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의 사이에 강화조약을 조인 비준했다

그런데 조약내용을 본 러시아 프랑스 독일 심국은

 4월 23일 이 조약에서 일본에 할양하도록 되어 있는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도록

  일본 정부에 강력히 권고했다

당시 삼국 열강을 상대로 싸울 만한 힘이 없었던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했다.

        作成者 黃圭源


이완용.jpg


이완용이 임종시에 자식들에게 한 말.

  

 

이완용은 죽으면서 자녀들을 불러놓고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하였다.

내 생애는 오욕으로 끝난다. 그러나 남들은 영광을 치지도외

(置之度外)하고 오욕의 생애만을 클로즈업 시킬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인생은 동기보다 남긴 발자취가 중요하니까.

 

그는 착잡한 심경으로 흐느끼는 자녀들에게 또 말했다.

친 청이나 친로 파에겐 무관심의 아량들을 베풀면서

친일파에겐 그토록 가혹한지 모르겠다 

아마 결과적으로 나라가 망해서 그렇겠지.

나도 자주독립만을 절대치로 믿는 사람이다.

단지 그 차선이 친일이었을 따름이다 

왜 합방조약을 전후해서 이 나라의 독립주의자들이

나를 타살하지 못했는지 못내 아쉽게 여긴다.

이재명 그 얼빠진 녀석은 왜 나를 헛 찔렀어!

내가 왜 농군의 자식으로 태어나질 못했는지 한스럽구나! 

  

 

이완용안간힘을 쓰면서 마지막 말을 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본도 언젠가는 망할 날이 올 것이다

이 나라가 언젠가는 흥할 날도 있을 게다. 

그때 이완용늘 본보기로 비판이 된다면 나의 존재의의가 거기 있다.

이완용역시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아들 이항구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너나 네 아들이나 아들의 아들이 또 그 아들이,

이완용의 후예임을 창피하게 여겨 기를 못펴고 살겠지 

그들에겐 아무런 죄도 없는걸.

내 선친 (이호준)척족 김씨네에게서 대원군한테 정권을 넘겨주는

역할을 했고, 나는 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 교량의 구실을 했다.

이 무슨 숙명의 소치냐?  

이상은 그가 임종시에 한말이라고 한다.

  

 

실지로 이렇게 말을 하였는지 어느 작가의 상상력으로 지어낸

말인지 알 수는 없다.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이렇게 이야기 하였소

라고 하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공감이 간다.

 

생전에 주변에서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고 내 아이들이 나로 인해서

고통스러울 것 이다는 것도 모른다면 그것은 짐승이다.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나름대로 많은 상황을 접하고

그에 따라 여러 방법으로 대처하면서 산다.

 

그 결과가 때로는 많은 이들에게 칭찬받고

때로는 원성의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 그리고 주변의 열강들의 힘겨루기

그리고 국제정세를 보면 그는 그전에 러시아에게도 미국에게도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며 나라 위해 애쓴 흔적도 있다.

 

그런 것으로 볼 때 내 얕은 식견으로 무어라 하기는 버겁지만

조심스럽게 이야기 한다면 차라리 이럴 바엔 그래도

일본이 하는 생각을 그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젊은이들, 순간 포착이 일생을 좌우 한다는 말처럼

그의 식견으로 볼 때 이 나라가 일본과 오래도록 함께 한다면

내 영광이고 우리나라 영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수 있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영겁의 경지에서 볼 때는 우리인생이 한 찰라 이겠지만

사람 일생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날로 따지면 무척 긴 기간이고 세월이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이지 공과 과가 있다.

그러나 이완용의 과는 지금 우리들이 볼 때 그 과가 너무나 크다.

 

그의 후손들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의 말과 같이 뭇 세인들이 이완용의

후손이라는 것 말고는 큰 잘못이 없는데도 살아가기가 어렵겠다.

 

이완용이 없었더라면 일본식민 시대가 없었고

우리대한제국은 건강하게 유지되었을까?

 

나 혼자 해보는 생각,

또 다른 이완용이 있었지 않을까? 세상 살아가는 것 쉽지 않다.

 

*이완용1905년 학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체결을 지지하고

이토오히로부미의 지원으로 내각대신으로 된다.

 

1909이재명의사에게 칼을 맞지만 살아서 1910년 한일 합병조약

체결시 송병준과 경쟁적으로 지도적인 역할을 하고

 

조선 통감부는 조선 총독부가 되고 그는 총독부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일본의 앞잡이로 맹열한 할약을 하다가 1926년에 죽었다.

  

 

그의 묘는 전북 익산시 낭산면 터좋은 산골에 썼는데

그의 증손이 유골을 화장해서 장암천에 뿌렸다고 하기도 하나

인터넷에 보니 그의 묘라고 많이 훼손된 묘가 보이기도 한다.

 

위의 글은 그때 상황을 그린 유주현씨의

조선총독부를 참고 하여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