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자료

한시(漢詩) 해설

산야초 2016. 9. 11. 23:32

<한시(漢詩) 해설>     (2001.10.1~ 11.30)


이지완(李志完) 황현(黃玹) 이제현(李薺賢) 무명씨 신최(申最) 정사룡(鄭士龍)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이규보(李奎報) 박제가(朴齊家) 이행(李荇) 임억령(林億齡) 조수성(曺守誠)

조신준(曺臣俊) 김진(金搢) 백대붕(白大鵬) 서거정(徐巨正) 김창흡(金昌翕) 문덕교(文德敎)

김상헌(金尙憲) 장유(張維) 광해군(光海君) 변계량(卞季良) 정지상 이인로 혜심(慧諶)

충지(沖止) 고조기(高兆基) 정도전(鄭道傳) 장연우(張延祐) 최충(崔沖) 김부식

최유청(崔惟淸) 권필 조국빈(趙國賓) 이자현(李資玄) 장유2(張維) 이용휴(李用休)

임숙영(任叔英) 월산대군(月山大君) 김시습 김정 하응림 정렴 정도전 유방선 박은 김수정

이숭인



<시조의 향기>  (2002.5.1~ 6.29)


무명씨(청구영언)  신흠(申欽) 무명씨(청구) 윤선도 정철 무명씨(악학) 윤선도2 이명한

 정훈 김상용 무명씨4 이덕일 무명씨(가곡원류) 권섭 무명씨5  소백주 주의식 이황 성종

서경덕 효종 김진태 이러하나 저러하나 앞 내에 자네 집에 조찬한 김천택 석류 바람에 최남선

자모사 이광수 이병기 이은상 이은상의 인생 이은상2 이호우 이영도 이영도2 이호우2

이명한2 윤두서  실명씨 김수장 하순일 누우면 조그만 정철2 이명한3 정희량



 <오늘의 시>  (2002. 7. 14~              )


오규원 정현종 정희성 서정주 김명인 김종해 장석남 김영남 이태수 나희덕 황지우 김기백

채호기 서정춘 임영조 김영무 이성선 오르탕스 블루 최승호 안도현 스테판 말라르메 이수익

문인수 곽재구 마종기 노향림 이성복 이문재 최하림 반칠환 고재종 김명리 오탁번 남진우

최동호 김추연 김윤희 이정록 홍신선

 

이지완

외론 성 밖 한 마리 새

옛 절 가을 남은 종소리.

                    獨鳥孤城外 殘鍾古寺秋

                  이지완(李志完) < 송경남루(松京南樓)> 1,2구

<해설>

 군살은 없고 뼈만 남았다. 새 한 마리가 성 밖에서 울고 있다. 짝들은 어디 가고 혼자 우는가? 옛 절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댕그렁 댕그러어엉. 여운이 길게 뻗지 못한다. 송도 남루(南樓)에 올라 바라본 풍경이다. 절정의 한 시절이 스르지고, 쉬 이우는 가을 햇살처럼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변해 버렸다. 종소리도 구름에 막혀 되돌아오고, 성에는 목동들의 풀피리 소리만 남았다. 새들도 떠난 지금, 나그네 홀로 누각 기둥에 기대 지나간 역사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2001. 10. 3(수)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황현

지식인 노릇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를 생각하니

인간 세상 지식인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黃玹,  <절명시(絶命詩)> 셋째 수 3,4구

<해설>

 매천 황현(1855-1910)이 망한 나라가 부끄러워 목숨을 끊으려 더덕 술에 아편 덩이를 타서 마시기 전에 부른 노래다. 마지막 결심을 하고 흔들리는 호롱불을 보며 읽던 책을 덮었겠지.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상념인들 왜 없었으랴, 애초에 몰랐다면 무지렁이 백성으로 살아가겠으되, 갈 길이 분명한데 가지 않는다면 글자 배운 보람이 없지 않겠는가. 고개 한 번 돌리면 외면할 수도 있었을 그 부끄러움조차 지니지 않으려고 그는 아편 덩이를 삼켰다.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했다. 2001.10. 4(목)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이제현

    마하연 소묘

산중이라 해가 중천에 떠 있어도

풀잎에 이슬이 짚신 적신다.

      山中日정午 草露濕芒구 

              이제현(李霽賢)   <마하연(摩하衍)> 1,2구

<해설>

 금상산 만폭동의 마하연을 찾았다. 암자에는 사람이 없다. 깊은 산속에 햇볕이 들지 않아, 한낮인데도 간밤 이슬에 신발이 다 젖었다. 풀물 밴 대님을 풀어 바지를 말리며 인자 없는 암자 마루에 앉아 본다. 올려다 뵈는 하늘은 참 푸르고 맑다. 심심한 구름이 암자의 마당 안까지 들어와 세월과 함께 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 있는가? 이제 또 어디로 갈 것인가? 고개를 빼어 내어다 보면 올라온 길이 문득 보이지 않는다.
                                                         10.5(금)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무명씨(무명씨)

날 밝자 제 각금

뭇새들 한 가지서 잠을 자고는

날 밝자 제 각금 날아가누나.

      衆鳥同枝宿  天明各自飛

         무명씨(無名氏) <題驛亭璧上(제역정 벽상)> 1,2구

<해설>

 새들은 서로 몸 부비며 추운 밤을 났다. 날 밝자 뒤도 안 돌아보고 각자 제 갈 데고 간다. 한 세상 건너 가는 일도 이와 같구나. 나그네들이 여관방에 들어 하룻밤 자고, 새벽녘 뿔뿔이 흩어지는 것과 무에 다른가. 잠깐 깃들어 쉬다 떠나는 것이 인생이다. 슬퍼할 것 없다. 천지는 만물이 깃드는 여인숙. 세월은 백대를 지나가는 길손이다. 하지만 우리는 새가 아니니 훌쩍 떠난 가지 위에도 눈물이 남는다. 정(情)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2001.10.7(일)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신최

물에 잠긴 돌

솟은 돌은 오히려 피할 수 있지만

잠긴 돌이 참으로 두려웁다네.

    出石猶可避  暗石眞堪畏

              -신최(申最)  <기탄(岐灘)>  3,4구

 <해설>

 물위로 솟은 바위야 겁날 게 없다. 물에 잠긴 바위가 배 밑창에 구멍을 낸다. 세상의 여울도 다를 것 하나 없다. 소리장도(笑裏藏刀), 구밀복검(口蜜腹劍). 웃음 속에 칼을 숨겼고, 입은 꿀인데 뱃속엔 칼을 품었다. 방심하고 지나치다간 치명상을 입는다. 발등을 찍는 것은 늘 믿는 도끼다. 마음 상할 것 없다. 세상 일 그렇지 않은 적이 언제 한 번이나 있었던가? 겉만 보고 방심했던 내 잘못이 크다. 도처에 내 발목을 노리는 함정이다. 마음 놓지 마라.
                                         2001. 10. 8(월)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정사룡

             얻기도 전에

얻기도 전에 먼저 잃을 것을 근심하고

기쁜 일을 만나서도 슬픈 마음 일어나네.

          未得先愁失  當歡己作悲

                                      <감회(感懷)> 낙구(落句)

<해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내려 앉는다. 내게 기쁨이 되고 설렘이 되었던 것들, 돌아보면 먼지처럼 스러지고 없다. 득의의 순간은 늘 잠깐뿐이다. 기쁜 일이 생겨도 무턱대고 기뻐할 수가 없다. 조바심을 치는 내 마음은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오늘의 큰 기뿜이 내일 가눌길 없는 슬픔이 되는 경험도 숱하게 했다. 일희일비 (一喜一悲)할 것 없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신뢰를 잃은 마음은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란다. 늘 불안하다.
                                                       2001.10.9(화) 정민·한양대국문과 교수

이이

       낙엽 속

약초 캐다 어느새 길을 잃었네

천봉 가을 잎 속에서.

         採藥忽迷路  千峯秋葉裏

          이이(李珥)     <산중(山中)> 1,2구

<해설>

 금빛 바람 한 번 불자 온 산이 탄다. 다 탄 잎이 낙엽으로 쌓인다. 낙목귀근 (落木歸根) 가지를 따라 뿌리로 간다. 약초 캐러 산에 왔다. 송이가 살찌는 계절. 진 잎이 무릎을 묻는 골짝. 올라온 길이 안 보인다. 난감하구나. 길을 찾는 내게 가을 산은 자꾸 길을 지운다. 사는 길 허망하다고, 욕심 다 내려 놓고 가라고 흔적을 지운다.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들고, 열정을 다 태우곤 낙엽이 된다. 가을 산 낙엽 속에서 나는 길을 잃는다. 10.10(수)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송익필

   달 보며

초승달 땐 더디 둥긂 안타깝더니

둥근 뒤엔 이리 쉽게 이지러지나.

 未圓常恨就圓遲  圓後如何易就虧

    송익필(宋翼弼)    <망울(望月)>

<해설>

 손톱달이 뜨면 언제 보름달이 되려나 싶었다. 둥두렷 달이 뜨면 내 마음도 덩달아 보름달이 되었다. 그런데 그 보름달은 어느새 그믐의 어둠을 향해 허물어지는구나. 저 달이 언제나 중천에 높이 떠 어둠길을 밝혀 주면 좀 좋을까?하지만 그믐밤의 밤길이 무서워야 보름달의 환한 빛이 고마운 줄을 알지. 날마다 만월이면 그 빛이 무슨 생색이 날까? 세상 길의 어긋남이야 안타깝지만, 늘 설레며 바라는 기다림 속에 산다. 2001.10.11(목)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이규보

   가을 풍경

지는 해에 쓰르라미 울어쌓는데

긴 하늘 지친 새 돌아가누나.

       落日寒蟬조  長天倦鳥還

        李奎報       十六日   5,6구

<해설>

 하루 해가 저문다. 쓰르라미는 온 힘을 다해 운다. 적막한 들판 위로 퍼지는 소리, 길 게 뻗은 하늘에 새가 난다.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길이다. 오늘 하루는 참 피곤하였다. 지친 날개를 쉬고 싶구나. 쓰르라미야 하루하루 가는 날이 아깝기도 하겠지. 하지만 날이 저물면 새도 날개를 접는다. 보름이 지나면 그믐이 오고, 암흑은 다시 광명을 잉태한다. 가을 날의 하루가 이리 저문다. 돌고 도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다. 날개를 접고 쉬어서 가자.
                                          2001년 10월 12일(금)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박제가

             침묵과 웃음

침묵해선 안 될 데서 입을 다물고

웃지 말아야 할 곳에서 웃음을 짓네.

        感默不默處  惑笑不笑處

           朴齊家  <有歡> 1,2구

<해설>

 침묵해야 할 곳에서 시끄럽게 떠들고,웃어야 할 자리에선 공연히 성을 낸다. 목청을 높여야 할 자리에선 짹 소리도 못 한다. 후환이 두려워서다. 자리도 못 가리고 헤픈 웃음을 짓는다. 챙길 잇속이 있는 까닭이다. 원효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고, 말할 수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다. (難忍能忍 可言不言) 아침을 위한 인내가 아니다. 굴종을 위한 침묵이 아니다. 침묵에도 등급이 있다. 웃음에도 수준이 있다.
                                                         2001.10.13(토)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이행

     서리달

저물녘 보슬비 긴 하늘 씻고

밤 들자 높은 바람 구름을 걷네.

  晩來微雨洗長天  入野高風捲暝인

              -李荇  <상월(霜月)> 1,2구

<해설>

 다 늦은 저녁에 보슬비가 긴 하늘을 말끔히 씻었다. 밤이 되자 바람은 구름을 걷어 간다. 달님이 빼끔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 살며 끼어드는 이런 저런 시름들도 이렇듯 어느 한 순간 말끔히 씻겨 가 버렸으면 좋겠다. 가을 밤 등불을 밝혀 놓고 앉은뱅이 책상에 오도카니 앉아서 문득 지붕 위로 들리는 우주가 돌아가는 소리. 물리가 순환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풍광제월(風光齊月), 해맑은 정신을 지녀 두고 싶다. 2001.10.14(일)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임억령

        동해에서

다에 뜨니 지금이 옳은 것을 알겠고

이름 쫓던 어제가 그른 줄을 깨닫네.

    浮海知今是  趨名悟昨非

       임억령(林億齡)    <죽서루(竹西樓)>

<해설>

 한 바다를 굽어보니 지난날이 부끄럽다. 진작에 그만 두었어야 했다. 자리를 뭉개고 앉아 있을 일이 아니었다. 바다는 잘 왔다고, 좀더 일찍 오지 그랬느냐고 내 어깨를 토닥인다. 저물녘 해송 사이로 바람이 차다. 속살을 헤집는다. 그래 다 가져가거라. 이름을 남기겠다는 알량한 집착, 무언가 이루겠다는 사나운 욕심,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스사로운 생각도 바람에 씻겨다 날려 가거라. 동해 바닷가에서 나는 살아온 지난 날과 결별한다.
                                                                   2001.10.15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조수성

밤을 세워 얘기하세

하루 밤에 평생 얘기 다하기 어려우니

술잔 잡고 닭울음을 또 들음이 어떠한가.

  一宵難盡平生語  把酒如何更聽鷄

     조수성(曺守誠)    次鄭可遠韻  3,4구

<해설>

 여러 해 두고 그리던 벗을 관서(關西) 땅에서 만났다. 어찌 지냈나 이사람. 맛잡은 두 손을 놓을 줄 모른다. 숙소에 들어서도 대화는 끝이 없다. 이야기가 한동안 지난날의 추억길에서 맴돌더니, 지금 살아가는 모양새로 옮겨간다. 술 항아리는 이미 바닥이 났다. 창밖이 희부윰한 것이 머잖아 동이 틀 모양이다. '피곤한데 이만 자세.' '안 될 말일세. 하고픈 말 끝없으니, 이대로 술잔 잡고 밤을 꼬박 세우세나.' 2001.10.16(화)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조신준

         가을 밤의 강물

달 져서 찬 조수도 고요하길래

돛 달자 자던 기러기 놀라 우짖네.

        月落寒潮靜  帆開宿雁呼

      -조신준(曺臣俊)    江行    1,2구

<해설>

 달이 졌다. 물결도 가라앉았다. 돛 달고 안개를 헤치며 강길을 미끄러져 간다. 물위에 뜬 채 잠자던 기러기가 침입자에 놀라 끼룩대며 날아간다. 3,4구에서는 "몽롱한 안개 자욱한 언덕, 하마 벌써 지났는가 술집 뵈잖네.朦朧烟霧岸, 己過酒家無"라 했다. 울컥 술 생각에 깊은 밤 강가 주막집으로 술 받으러 나선 길이었던 모양이다. 눈 감고도 훤하던 주막집 언덕이 오늘사 이상스레 찾을 수가 없다. 2001.10.18(목)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김진

질없는 생각

지는 볕 스러지고 큰 강물 넘실대니

천고의 흥망이 한 피리에 빗겼구나.

   斜陽검盡大江平  千古興亡一笛橫

                  김진(金搢)  百濟懷古   

<해설>

 석양빛이 스러지자, 강물은 큰 소리를 내며 운다. 천년 전 일을 울어 무삼하리. 백마강 위에서 부소산 옛 궁터를 바라본다. 목동의 풀피리 소리만 구슬프게 들린다. 한 때의 부귀와 권세를 믿고 제 멋대로 나대는 자들아! 저 피리 소리를 들어라. 세상 만사 지나고 나면 다 부질없다. 덧없는 세상에서 덧없는 일을 놓고 덧없는 인간들이 덧없이 싸우다 덧없이 스러지는 것이 덧없는 우리네의 한 생애가 아닐 것인가. 2001.10.19(금)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백대붕

      그을비 그리움

벗 그리워 혼자서 잠 못 이루니

창 밖에선 괴이한 새가 우누나.

    懷여不能寐  隔窓啼怪禽

         -百大鵬   秋日

<해설>

 가을 밤 촛불 하나 타고 있다. 물설고 낯선 타관의 하룻밤이 또 그렇게 지난다. 반딧불이는 풀더미 속을 날아다니고, 성근 비는 먼 숲을 적신다. 촛불을 보고 있자니 보고픈 얼굴이 떠오른다. 속으로 타는 촛불처럼 내 속이 바짝바짝 탄다. 창 밖에는 가을 비 속에 청성스리 새가 운다. 저나 나나 타는 가슴을 삭일 길이 없었던 게로구나. 호로로 호로로 하며 우는 탄식 소리에 내 잠은 그만 십 리나 달아나 버린다. 01.10.20(금)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서거정

          가을볕

띠집은 대숲 길에 연이어 있고

가을볕은 곱고도 따사롭구나.

       茅齋連竹逕  秋日艶晴暉

        -徐巨正  秋風  1,2구

<해설>

 가을 볕에 과일엔 마지막 단맛이 스민다. 대숲 사이로 보이는 초가집 한 채. 뒷짐 진 채로 숲길을 서성이는 주인의 모습도 보인다. 스스스 대 바람 소리에 숲이 떨리면 가을 햇살도 잘게 부서지며 햇무리를 짓는다. 눈이 부시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었다. 복닥대던 현실을 털고 물러난 것은, 이 순간이 새삼 울렁이도록 고맙다. 늦 과일의 단맛을 찾아 잉잉대는 꿀벌. 물가에는 까북까북 조으는 오리. 온몸이 가뿐하고 정신도 새틋하다.
                                                           2001.10.22(월)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김창흡

      마음 공부

자취를 살펴보면 물외(物外)의 몸이언만

마음에 비춰보니 보통 사람 부끄럽다.

           觀迹超然物外身  求諸方寸愧平人

   김창흡 (金昌翕)      葛驛雜詠   중 3,4구

<해설>

 설악 깊은 골에 오두막 집을 짓고 산다. 여러 날 사람 구경 못 할 때도 있다. 남들은 물외에 사는 날 부럽다고 하겠지. 욕심 사나운 생각도 없는 줄 알겠지. 내 거울에 비춰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아직도 멀었다. 누가 나를 알아주기라도 하면 금세 속내를 다 보여 줄 것만 같다. 몸을 어디에 두던 거울처럼 투명하게 마음자리를 닦고 또 닦겠다. 나 자신과 정면으로 승부하겠다. 2001.10.23(화)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문덕교

    약이 되는 말씀

정말로 약이 되는 말 한 마디 있으니

일 덜고 마음 맑혀 고요 속에 사는 것.

       最有一言眞藥石 淸心省事靜中居

  - 문덕교(文德敎)  絶句 3,4구

<해설>

 해 묵은 병을 고칠까 싶어 양생서를 뒤적인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닿는 말. '마음을 맑게 하고 일에서 벗어나라. 생활 속에 침묵을 깃들여라.' 정말 약이 되는 말씀이다. 마음속 가득한 욕심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 심화가 솟는다. 번다한 잡사에 꺼둘리다 심신은 지쳐 녹초가 된다. 남 욕하고 짜증 내다 마음의 평정은 흐트러져 버렸다. 이제부터 나는 말을 줄이겠다. 일을 줄이겠다. 마음을 비우겠다. 그 자리에 솔바람 소리와 물 소리를 들이겠다.
                  2001.10.24(수)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김상헌

        길가의 무덤

길가에 외로운 무덤이 하나

자손들 지금은 어디에 있나

   路榜一孤塚  子孫今何處

    -김상헌(金尙憲)   路榜塚  1,2구

<해설>

 길가의 무덤, 봉분은 허물어져 잡초에 덮였다. 무덤 앞에 돌 사람을 세울 땐 집안의 영화가 한없을 줄 알았겠지. 자손들은 그새 영락하여 제 조상의 묘마저 돌볼 여력이 없고, 길가던 나그네가 공연히 민망한 탄식을 흘린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살아서의 부귀가 죽은 뒤엔 아무 소용이 없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삶이다. 황량한 무덤 앞에 서서 나는 덧없는 욕망의 뒤끝을 본다. 10.25(목)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장유

         굳센 적

강한 자 어찌 늘상 강하겠는가

때로는 굳센 적과 맞닥뜨리지.

     强者豈常强  有時遇勁敵

          장유(張維)  放言  5,6구

<해설>

 나대지 마라. 뛰는 놈 위 나는 놈 있다. 늘 기는 놈만 상대하다 보니 교만이 쌓인다. 그러다 임자를 만나 정신이 바싹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큰 놈이 작은 놈을 먹어 치우고 센 놈이 약한 놈 위에 군림한다. 주먹은 주먹을 낳고, 힘은 더 큰 힘을 부른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 그칠 날 없다. 차라리 마음을 텅 비워, 해치려는 마음, 되갚겠다는 생각을 지워 버림이 어떨까?허공을 이길 수 있는가? 허공을 꺾을 수 있는가? 2001.10.26(금)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광해군

     가을 빛

푸른 바다 성난 소리 저물녘에 밀려오고

푸른 산 근심겨워 맑은 가을 싸늘하다.

    滄海怒聲來薄暮  碧山愁色冷淸秋

<해설>

 섬나라에 비가 몰려 온다. 해무(海霧) 자욱한 바닷가 누다락에 올라 저무는 바다를 본다. 공연한 자의식 때문이었을까? 바다는 분노의 소리를 내며 나 있는 쪽으로 몰려든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지만 가을 산도 온통 근심의 빛을 띠었다. 서울서의 일들은 온통 봄 꿈을 꾼 것만 같다. 나는 이제 땅거미가 밀려 드는 섬 나라 해변에서 차고 시린 가을을 맞고 있다. 얼마 안 있어 혹독한 겨울이 와 대지는 흰 눈의 망각 속에 잠겨 들 것이다. 아! 슬프다.
                             2001.10.29(월)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변계량

    외론 등불

초생달 숲에 들어 그림자

밤 밝히는 외론 등불.

 纖月入林影  孤燈終夜明

   변계량(卞季良)  次子崗夜座韻 3,4구

<해설>

 눈썹달이 숲에 걸려 좀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겨우 빠져 나온 달빛이 마당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만든다. 분 닫아 건 텅 빈 방엔 앉은뱅이 책상 하나, 그 위엔 경서 한 권, 달빛이 희미하기에 가물대는 외론 등불이 가을 밤을 대신 밝힌다. 이따금 한 번씩 책장 넘어가는 소리, 그때마다 등불은 한 번씩 일렁이고, 곧추 앉은 주인은 한 마디 말이 없다. 달이 중천에 떠올랐다가 다시 서편으로 넘어가도록, 방안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2001.10.30(화)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정지상

             낙엽 한 잎

뜰 앞 한 잎 지니

침상 밑 벌레는 슬퍼.

庭前一葉落  床下百蟲悲

     -정지상  送人    1,2구

<해설>

 툭, 오동잎 하나 떨어진다. 이것을 신호로 가을이 시작된다. 제까짓 게 뭘 안다고, 가을 벌레들도 말문이 터진다. '찌익-짝, 찌익-짝' 베짱이는 겨울 옷을 길쌈하고, '귀뚤귀뚤' 귀뚜라미는 침대 밑을 파고 든다. 가뜩이나 슬픈 가을에 그대는 왜 떠나나. 빈 방 혼자서 긴 밤을 어이 나리. 자다 놀란 꿈은 이어지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면 마당엔 차곡차곡 낙엽 쌓이는 소리, 찌익-짝, 찌익-짝 귀뚤귀뚤, 바람에 몰려 갔다 몰려 오는 발자국 소리.
             2001.10.31(수)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이인로

        양켠 언덕

한 띠의 푸른 물결 양켠 언덕 가을인데

바람 불자 보슬비 가는 배에 흩뿌리네.

   一帶滄波兩岸秋   風吹細雨灑歸舟

     -이인로      소상야우 (瀟湘夜雨)   1,2구

<해설>

 푸른 물결이 띠를 이루며 밀려든다. 물결이 지나는 양켠 언덕은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단풍으로 물든다. 이 얼마나 근사한 연상이냐? 고기잡이 배는 이렇게 가을을 몰고 돌아온다. 바람도 뒤에서 슬쩍 등을 떠민다. 보슬비가 뱃전에 흩뿌린다. 하루 해도 어느덧 저물었다. 일을 마치고 묵묵히 고깃배를 물가에 맨다. 대숲에선 잎마다 가을을 알리는 소리를 낸다. 강물 위엔 어느새 안개가 쳐들어와 풍경을 차례로 지운다. 11.1(목)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혜심

       솔바울 주워

솔 아래서 솔바울 주워

차끓이니 더 향기롭다.

    松下摘松子  煎茶茶愈香

   -혜심(慧諶)   妙高臺上作  3,4구

<해설>

 묘고대(妙高臺) 위에서 골짝을 굽어본다. 산마루엔 구름이 걸려 못 넘어가고, 시냇물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달려만 간다. 일부러 느릿느릿 걸어 솔방울을 줍는다. 차 화로에 불을 붙인다. 송진 내음을 내며 솔방울이 튄다. 시냇물이야 바쁘든지 말든지, 서둘 일이 없다. 보글보글 찻물이 끓고, 한 김을 식혀 찻잎을 내린다. 작은 찻잔에 따라, 눈으로 한 번 마시고, 코로 한 번 마시고, 비로소 입으로 머금어 내린다. 식도를 타고 향기론 샘물이 흐른다.
                                2001.11.2(금)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새로 씻긴 가을 빛

갑자기 부슬부슬 가랑비 지나더니

새로 씻긴 가을 빛이 임천에 드네.

   忽有蕭蕭微雨過   洗新秋色入林泉

          충지(沖止)   福城途中   7,8구

    <해설>

 전남 보성 땅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찾아가는 길이다. 가을 날 운수행각에 든 스님의 바람이 가볍다. 강물을 끼고 구불구불 이어져, 가도가도 끝없는 300리 길이다. 가을 바람에 미친 흥을 달랠 길 없더니, 생각잖은 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비에 씻긴 숲에는 가을 빛이 성큼 짙어졌다. 가랑비가 가랑가랑 물감을 뿌렸던가? 붉고 노란 빛깔들을 칠해 놓고 갔구나. 2001.11.3(토)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고조기

       서리 숲 새 소리

서리 숲 새벽 새 소리

나그네 잠은 바람에 놀래.

  鳥語霜林曉  風驚客榻眠

    -고조기(高兆基)   宿金壤縣   1,2구

<해설>

 문풍지에 우는 새벽 바람이 맵다. 고단한 초저녁 잠이 이 소리에 놀라 깬다. 새벽 달이 처량한데, 먼동이 튼다고 새들이 지저귄다. 갈 길이 머니 어서 떠날 채비를 하라는 게로구나. 이불을 한편으로 밀고 앉는다. 나는 누구냐? 어디로 가는가? 허망한 물음은 낙엽으로 뒹군다. 안개 자욱한 새벽 길, 스산한 바람은 속살을 헤집는데, 또 한 가을이 길 위에서 이렇게 지난다. 희미한 달빛, 꾸다 만 고향 꿈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11.5(월)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정도전

                    그림 속

시냇가에 말 세우고 갈 길 묻는데

이 내 몸 그림 속에 든 줄 몰랐네.

      立馬溪邊問歸路   不知身在畵圖中

   -정도전(鄭道傳)  訪金居士野居   3,4구

<해설>

 소리 없이 진 잎으로 땅이 다 붉다. 빈손으로 돌아간 가을 숲은 횅하다. 친구를 찾아 보고 오는 길, 길은 다리께서 두 갈래로 갈린다. 낙엽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 물어보자고 다리 위에 말을 세우고 섰다. 길 저편 끝으로 눈길을 주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파랗고 산은 빨갛다. 땅 위 낙엽이 바람에 뒹군다.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한 폭 그림 속에 내가 서 있다. 가을이다. 2001.11.6(화)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장연우

        한송정 달밤

달 흰 한송정 밤

물결 잔 경포의 가을

    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장연우(張延祐)   寒松亭   1,2구

 <해설>

 한송정에 달이 떴다. 경포 호수에 가을빛이 물씬하다. 미풍에 파르르 떠는 잔잔한 물결. 함께 그리던 옛님은 어디 갔나. 갈매기만 그때처럼 끼룩끼룩 날고 있다. 그때 떠난 후 내 마음엔 물결 잘 날이 없었다. 달 떠 오면 자꾸만 사무치는 그리움에, 오는 밤도 잠 못 이루고 호숫가를 서성인다. 달은 바다에도 뜨고, 호수 위에도 뜨고, 그대의 눈동자에도 뜨고, 마주 든 술잔에도 떠올랐거니.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깊어 갔거니. 11.8(목)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최충

       불청객

뜰 가득 달빛은 연기 없는 촛불인데

자리 드는 산빛은 청하지 않은 손님.

   滿庭月色無煙燭   入座山光不速賓

            최충(崔沖)    絶句     1,2구

<해설>

 달빛이 곱다. 밤 깊어도 촛불 밝힐 일이 없다. 한 잔 술을 마시려 하니, 주섬주섬 끼어드는 손님들이 있다. 달빛 보며 같이 한 잔 하자는 수작이다. 앞산이 내 앞에 마주 자리를 잡더니, 옆산도 어느새 슬그머니 끼어든다. 솔바람은 제가 무슨 거문고라도 되는 줄 아는지 한 곡조 맑은 가락을 곁들인다. 달님을 촛불로 밝혀 증인으로 앉혀 놓고, 날 둘러싼 청산과 어깨동무를 하고, 솔바람 가락에 맞춰 개운하게 잘 놀았다. 11.9(금)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김부식

        가을 산 가을 강

산 모습 가을 들어 더욱 더 좋고

강 빛은 밤인데도 외려 밝아라.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김부식   題松都甘露寺次韻

<해설>

 낙엽 밟고 가을 산에 올랐다. 생각이 시원하다. 잎 다 내린 가을 산. 마음이 조촐해진다. 손에 쥔 것 다 놓고 하늘 향해 두 팔 올린 나무들. 가을 산은 목하 예배 중이다. 밤 강물은 이상한 밝음으로 빛난다. 어둠 속에 신비한 빛을 흘리며 몸을 푸는 강물. 이 밤 송도 감로사에서 나는 나와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덕지덕지 붙은 사나운 욕심 다 버리고, 잎 진 나무처럼 서고싶다. 밤 강물로 흐르고 싶다. 2001.11.10(토)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최유청

         백년간

인생 백년간

덧없기 바람 앞 촛불.

  人生百世間  忽忽如風燭

    -최유청(崔惟淸)   雜興 제2수, 1,2구

<해설>

 사람 살다 가는 한 세상이 바람 앞 촛불과 다를 바 없다. 어디서 불어 올지 모를 바람에 혹시나 꺼질세라 전전긍긍 살아왔다. 죽기 전에는 만족함이 없을 부귀를 더 가지려 노심초사 마음을 졸여 왔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처럼. 세상 길은 엎어지고 자빠짐이 많고, 그렇다고 훌훌 털고 저 신선의 꿈을 꿀 방법도 없다. 큰 잔에 한 잔 술을 가득 따라 놓고서 천장을 우르러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보리라. 2001.11.12(수) 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권필

           낙엽이

닭 울어 앞길 묻는데

누른 잎 날 향해 날려 오네.

  鷄鳴問前路   黃葉向人飛

         권필    途中   3,4구

<해설>

 온 종일 걸어와 산 속 여관에 지친 몸을 뉘었다. 먼동이 트기 전에 어서 길을 재촉해야지. 닭 울음 소리와 함께 길을 떠난다. 나그네 꾸다 만 꿈이 제 발자국 소리에 놀라 저만치 달아난다. 서리 새벽, 길 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하나? 길을 묻는 내게 낙엽이 자꾸만 입을 막는다. 길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고. 길 찾아 헤매는 것이 인생이 아니냐고. 물어 뭣하겠느냐고. 2001. 11.13(화)  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조국빈

       무정한 세월

건곤은 뜻이 있어 남자를 냈건만은

세월은 무정하여 장부를 늙게 했네.

     乾坤有意生男子    歲月無情老丈夫

   -조국빈(趙國賓)   鄕居自歎   3,4구

<해설>

 조물주가 날 세상에 낼 때는 필시 무슨 뜻이 있었겠지. 지금껏 그 뜻을 헤아리려 애쓰며 살아왔다. 하늘 뜻은 여태 깨닫지도 못했는데 얼굴엔 주름살만 남았다. 되돌아보면 먹고 살려고 아옹다옹한 기억밖에 없다. 타관 땅 전전하다 늙막에 고향을 찾았다. 조물주는 무슨 생각으로 이 몸을 이 세상에 냈던고. 낙망한 나머지 불쑥 던진 물음이다. 무정한 세월 앞에 마음 다친 중 늙은이 하나가 앉아 있다. 아! 부끄럽다. 11.14(수) 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이자현

    거문고 연주

한 곡조 연주함은 무방하지만

알아들을 사람이 너무 적구나.

     不妨彈一曲  祗是少知音

-이자현(李資玄) 樂道吟  3,4구

<해설>

 투명한 아침. 흥을 주체치 못하고 거문고를 당긴다. 둥기둥 가락에 내 마음을 얹는다. 깊은 산 속이라 들어 줄 사람이 없다. 나는 그것이 때로 좀 서운하다. 거문고 소리는 내 마음이다. 세상을 향해 깨달음의 한 자락을 슬며시 펼쳐 보지만 아무도 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산빛 닮은 그 소리가 내 마음을 푸르게 해 주니, 남이 알아 주고 몰라 주고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울리는 가락에 온 숲이 춤춘다. 2001.11.15(목) 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장유2

     갈림길

뜬 구름 일정한 자태가 없고

곧은 길엔 갈래 길이 많기도 하다.

    부운무정태   直道幾多妓

     -장유(張維)   將赴錦州次白洲韻   5,6구

<해설>

 구름은 제멋대로 떠간다. 간사한 사람 마음 같다. 곧게 뻗은 길도 외길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곳곳에 갈림길이요, 여기저기 샛길이다. 오늘 내 무심한 발거음이 인생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한 발짝인들 어이 경솔히 하랴. 세상사 뜬 구름 같은데, 나는 또 갈림길에 서서 또 하나의 새 길을 걸어간다. 여보게, 친구! 뜬 구름보다 뜬금없이 자네 생각을 했네.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순 없지만, 다시 만날 그때까지 몸 성히 계시게. 11.16(금) 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이용휴

     콩 심은 데 콩 나고

갈대 뿌리에서 갈대 싹이 나오고

복숭꽃에는 복숭아가 달린다.

    荻根生荻芽   桃花結桃子

    이용휴(李用休)   <만필>  1,2구

<해설>

 갈대 뿌리에서 대나무 싹이 나오는 법이 없다. 복사꽃 진 자리에 매실이 열리는 법이 있던가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다. 언제나 그렇고 여원히 그렇다. 이런 것을 천리(天理)라 한다. 천리를 거스러면 재앙이 온다.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했다. 가야 할 길을 놔 두고, 가서 안 될 길을 골라 가니 제 몸을 망치고, 제 집안을 망치고, 제 나라를 망친다. 11.17(토) 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임숙영

       이 술 가져다가

동해물 기울여 봄 술 담가서

티끌 세상 억조창생 취케 하련다.

   欲傾東海添春酒  醉盡애中億萬人

-임숙영(任叔英)   登飛盧峰   3,4구

<해설>

 비로봉에 올라보니, 푸른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 물로 술을 담가, 명리에 취하고 탐욕에 전 억조창생의 찌든 마음을 깨끗이 씻어냈으면 싶다.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이 술 가져다가 사해에 고루 나눠 억조창생을 다 취케 만든 후에 그제야 고쳐 만나 또 한 잔 하잣고야"라 한 흥취를 그대로 누려 본 것이다. 이 술에 취하면 이전의 어리 취한 생각들은 간 데 없고, 맑고 시원한 정신, 쇄락한 마음이 샘솟으리라. 그런 술은 어디에 있나?
                   2001.11.19(월) 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월산대군

         벗에게

여관, 가물대는 등불, 새벽

외론 성, 부슬비, 가을

   旅館殘燈曉   孤城細雨秋

       -월산대군(月山大君)   寄君實   1,2구

<해설>

 명사만 토막토막 이어 놓았다. 벗에게 부친 시다. 여관 방 등불이 가물거린다. '잔등(殘燈)'은 밤을 새워 밝힌 등불이다. 새벽이 되도록 그는 왜 잠을 못 이루고, 객지의 가을 밤을 꼬박 새웠을까? 낯설고 물선 땅,인적도 흔치 않은 외로운 성, 이 방의 불마저 꺼지면 세상이 다 어둠으로 지워질 것만 같아서였겠지. 창밖엔 부슬부슬 가을을 앓는 비가 내린다. 여보게, 친구! 잘 지내시는가. 밤새 자네가 그리도 보고 싶었네. 11.20(화) 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김시습

    붉게 물든 마을

아득히 먼지 구름 아득한 성

아스라히 붉은 잎 물든 마을.

渺渺黃雲城    依依紅葉村

   -김시습  寒鴉栖復驚

<해설>

 저 멀리 성은 누른 먼지구름에 잠겨 있다. 바라다 뵈는 마을은 붉게 물든 잎으로 불이 붙었다. 부슬부슬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갈까마귀 떼는 심란함을 견디지 못해 집 근처를 낮게 돌며 까왁까왁 까왁신다. 붉게 물든 단풍 잎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그대가 그립다. 까왁 까왁 까왁 비 맞고 짖어대는 네 울음 소리에 내 애가 다 녹는다. 이 비가 그치면 날이 추워지겠지. 2001.11.21(수) 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김정

   찬 연기

빈 숲 밥 짓는 연기 찬데

초가집 사립문은 닫혀 있다.

    空林烟火冷   白屋菴荊門

    - 김정(金淨)    感興   3,4구

<해설>

 쓸쓸한 들판 너머로 해가 진다. 갈까마귀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무 위에 모여 앉았다. 저렇게들 앉아서 또 추운 밤을 나겠지. 산자락 초가집에선 밥짓는 연기가 피어난다. 구뚝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낮게 깔려 흩어진다. 스산하다. 둘러봐도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가시나무로 엮은 사립문은 꽉 닫혔다. 오늘은 어디서 묵어 가나. 걸음이 자꾸 망설여진다. 저만치서 땅거미가 온다. 어둠이 온다. 시리디 시린 풍경이다. 11.22(목) 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하응림

    가을 날의 이별

경황 없는 서편 교외의 이별

가을 바람 술 한 잔.

    草草西郊別   秋風酒一杯

       -하응림 (河應臨)     送人  1,2구

<해설>

 서쪽 교외에서 그대를 보낸다. 가을 바람은 어서 가자 옷 소매를 잡아챈다. 아니 될 말일세. 내 술 한 잔 더 받고 가시게. 불쾌해진 얼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대는 떠났다. 나는 그대의 뒷모습이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다가,산모롱이를 돌아서서 영영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장승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다. 혼자 동아오는 길, 서산에 지는 해가 내 뒤로 긴 그림자를 만든다. 벗에게로 달려가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2001.11.24(토)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정렴

     외로운 안개

외로운 안개 옛 나루에 가로 걸리고

찬 해는 먼 산에 진다.

    孤烟橫古渡   寒日下遙山

   -정렴   舟過楮子島向奉恩寺    1,2구

 <해설>

 배타고 저자도를 지나 봉은사를 향해 가며 본 풍경이다. 강 건너 나루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한 떼의 안개가 배 앞을 막아 선다. 어디다 배를 대나. 난감하다. 배 젓는 소리 삐걱대고, 배는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고개를 둘러보니 먼 산 너머로 해가 떨어진다. 안개가 감춘 나루를 찾느라 뱃길은 자꾸만 더뎌지는데, 봉은사는 배에서 내려서도 한참 길이다. 외롭고 쓸쓸한 것이 인생길이다. 가을의 생각은 차다.  2001.11.23(금)정 민·한양대국문과교수

정도전2

         고요한 마음

집 가난해 병 고치기 쉽지 않아도

고요한 맘 근심 잊기 충분하도다.

    家貧妨養疾   心靜足忘憂

         -정도전(定道傳)   山中  3,4구

<해설>

 소나무에도 가을빛이 깃들었다. 모처럼 고향에 돌아와 손에서 책을 놓고 한가롭게 지낸다. 몸에 병이 있어도 약 살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지만, 내 마음에 고요가 있으니 근심을 잊고 지낸다. 대숲 사이로 작은 길을 내고, 산을 바라보자고 작은 정자를 얽었다. 얼마 만에 맛보는 해방감이냐. 산을  마주 보며 앉아 있는데, 이웃 절의 스님이 글을 묻겠다고 나를 찾아 왔다. 심심해서 하루 종일 이런저런 이야기로 붙들어 두었다.11.26(월)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유방선

     가슴속의 책

평생의 묵은 버릇 스러져 간 데 없고

가슴속엔 만 권 책이 있을 뿐일세.

   多生結習消磨盡    只有胸中萬卷書

       유방선(柳方善)     卽事   3,4구

<해설>

 찾아오는 사람 없고, 나갈 일도 없다. 골목길엔 잡초가 무성하다. 세간 없는 빈 방엔 주인 혼자 앉아 있고, 마당엔 나무 한 그루, 가지 끝엔 조각 구름 하나가 걸려 있다. 손에 쥐었던 것 다 놓고 나니 허전하고 또 후련하다. 20년 가까운 차가운 유배 생활은 가슴속에 가시처럼 얽혀 있던 욕심과 번뇌마저 다 가져가 버렸다. 빈 껍데기 같은 몸뚱이로 잡초 속에 혼자 산다. 베풀어 쓸 곳 없어도, 가슴속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만 권의 책이 있다.
                                                           2001.11.27(화)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박은

     술이 있다 해도

술이 있다 한들 뉘와 함께 마실까

비바람이 추위를 재촉할까 근심하네.

    縱有盃尊誰共對    己愁風雨欲催寒

        박은 (朴誾)     在和擇之   3,4구

<해설>

 잎은 어느새 다 져 버렸다. 낙엽은 문앞까지 밀려와 답쌓인다. 들창을 여니 산빛이 헬쑥하다. 어제 분 비바람이 남은 잎을 마저 떨구고,겨울이 눈앞에 왔음을 알려준다. 나갈 일 없어 굳게 닫힌 문 안에서 나는 혼자다. 설령 술동이에 묵은 술이 있다 해도, 함께 마실 그 한 사람이 없다. 가난이야 선비의 숙명이 아닐 것인가. 징징거리지 않겠다. 가슴속에 서린 근심을 한 주먹에 움켜서 내 던져 버리리라. 2001.11.28(수)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김수증

    새지 않는 밤

일 없이 무료하여 억지로 잠 청하다

옷 입고 되앉으니 하루 밤이 일 년 같네.

     無事無요强就眠     披衣還坐夜如年

  김수증(金壽增)    雜泳

 <해설>

 산 속에 혼자 산다. 삼동을 침묵 속에 지나왔다. 밤에도 정신은 닦아놓은 유리알 같다. 잠을 자야지. 이불 속에서도 생각은 꼬리를 물고, 얼음장 밑 개울물 소리까지 다 들린다. 다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정좌를 하고 책상 앞에 사려 앉는다. 겨울 밤은 밝아 올 기미가 전혀 없다. 우주가 나를 덮어 씌우듯 짓눌러 온다. 잠자던 정신이 화들짝 깨어나고,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 온다. 행간이 훤히 다 보인다. 2001.11. 29(목)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이숭인

          첫눈

새는 산 속의 나무를 잃고

중은 돌 위의 샘을 찾는다.

      鳥失山中木    僧尋石上泉

   李崇仁(이숭인)   신설 (新雪) 3,4구

<해설>

 날이 꾸물꾸물하더니 소담스레 눈이 내렸다. 길 가다 만난 첫 눈에 나그네의 발길만 공연히 바쁘다. 가만 보니 바쁜 것은 나그네만이 아니다. 갑작스레 펑펑 내린 눈이 산 속 새의 둥지를 덮고, 바위 틈의 샘물도 지워 버렸다. 내 집이 어딜까. 샘물이 어딜 갔나. 먼 숲에서 흰 연기가 올라간다. 반갑다. 흰눈에 덮인 순결한 대지. 그 위에 첫발 자국을 찍으며 간다. 묵은 증오와 미련을 다 지우며,소망처럼 내리는 첫눈을 본다. 11.30(금)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무명씨(청구영언)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 말을 것이

남의 내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서 말이 많으니 말 말음이 좋아라.

<해설>

 '말'이란 글자가 아홉 번 나온다. 말이 말을 낳고, 말 때문에 탈도 많다. 작은 말을 부풀리고, 없는 말을 보탠다. 앞뒤를 잘라 왜곡하고, 말을 해 놓고도 그런 적 없다고 한다. 남이 내 말을 하니, 나도 가만히 앉아 당할 수만은 없다. 말의 칼날 앞에 죽고 죽이는 핏자국이 흥건하다. 말의 값이 참 가벼워진 세상에 살고 있다. 오늘 신나서 까발린 폭로가 내일 내 발등을 찍는 도끼날이 된다. 말 때문에 말이 많으니 말을 말아야겠다. 천금 같은 침묵, 태산 같은 무게가 새삼 그립구나. 2002.5.1(수)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민

신흠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할사

일러 다 못 일러 부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린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해설>

 노래는 왜 부르나? 가슴속에 담쌓인 시름을 풀고자 함이다. 말로는 풀리지 않던 시름도 노래로 부르면 눈 녹듯 사라진다. 노래해 풀릴 시름이라면 나도 불러 보리라. '일러 다 못 일러'에 미묘한 가락이 있다. '푸돗던가'는 '풀었던가'의 뜻이다. 시언지(詩言志) 가영언 (歌永言)이라 했다. 시는 제 품은 뜻을 말로 편 것이요, 노래는 그 말을 가락에 얹어 길게 늘인 것이다. 말이 노래로 되니 그 생명도 길어졌다. 문학의 효용과 노래의 보람을 이토록 간명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2002.5.2(목)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무명씨(청구)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라도 지척이요

마음이 천리오면 지척도 천리로다

우리는 각재천리(各在千里)오나 지척인가 하노라.

<해설>

 마음이 늘 곁에 있다면 천리만리의 거리가 문제될 것이 없다. 일단 마음이 떠나면 바로 곁에 있어도 천리 멀리 떨어진 것이나 한 가지다. 항상 곁에 있어도 남 같은 사람이 있고, 늘 떨어져 있어도 곁에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너는 나에게 어떤 사람인가. 나는 너에게 지척인가 천리인가? 우리는 각자 천리 만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 두 마음의 사이에는 조금의 틈도 없으니, 우리는 결국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와 나는 지척이다. 우리는 하나다. 2002.5.3(금)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윤선도 (1597~1671)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 하나 외다 하나

내 몸의 해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밖의 여나믄 일이야 분별할 줄 있으랴.    -고산유고(孤山遺稿)

<해설>

 나는 내 할 일만 하겠다. 남의 일에 감 놔라 떡 놔라 하지 않겠다. 공연히 기웃거리지 않겠다. 슬플 때도 즐거울 때도 내 갈 길만 가겠다. 잘한다고 칭찬해도 우쭐 대지 않겠다. 잘못이라 야단해도 흔들리지 않겠다. 잔머리 굴리고 주판 알 튕기지 않겠다. 내 할 일, 내 갈 길이 바쁘니, 남의 일로 발목을 붙들리지 않겠다.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 흠이나 보고 흉이나 잡는 것은 하지 않겠다. 공연한 시비에 말려 마음 부산할 일은 짓지 않겠다. 나는 내 할 일만 하겠다. 2002.5.4(토)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철(鄭澈 1536~1593)

나무도 병이 드니 정자라도 쉴 이 없다

호화히 섰을 때는 올 이 갈 이 다 쉬더니

잎 지고 가지 꺾인 후는 새도 아니 앉는다           - (송강가사)

<해설>

 마을 어귀마다 정자 나무 한 그루가 있다. 한여름 더운 땀을 예서 식히고들 간다. 그늘 아래 평상에선 온갖 마을 소식이 떠다니고, 혼곤한 낮잠에 시간이 멈춘다. 그 나무에 병이 들었다. 잎이 우수수 지더니, 가지도 여기저기 꺾이었다. 오가던 길손들이 비를 그어가고, 햇빛을 피해 가던 그늘이 사라지자, 사람은커녕 새조차 오지 않는다. 아! 야박하다. 후끈히 달았다 싸늘히 식는 염량세태(炎凉世態)야 시도록 겪어 왔다. 호화롭던 그 시절, 잘 나가던 그 한때는 어디로 갔나. 문 앞에 줄을 서던 그 인간들은 어디로 갔나.
                                                    2002.5.6(월)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무명씨(악학)

사랑 모여 불이 되어 가슴에 피어나고

간장(肝腸) 썩어 물이 되어 두 눈으로 솟아난다

일신(一身)이 수화상침(水火相侵)하니 살동말동 하여라.    - 무명씨 (악학습령-樂學拾零)

<해설>

 사랑의 열병으로 가슴이 활활 탄다. 애간장이 다 녹아 눈물되어 흐른다. 위에서는 홍수가 나고 속에서는 큰불이 났다. 수화상침이란 물과 불이 차례로 공격해댄다는 말이다. 그 공격에 아예 초주검이 되었다. 물 막으랴 불 끄랴 도무지 정신이 없다. 사랑으로 붙은 불은 끌 수가 없다. 애간장이 녹아 흐르는 눈물은 막을 길이 없다. 벗어나고 싶지 않다. 환자 스스로 치유되기를 원치 않기에 사랑으로 앓는 병은 불치병이다. 5.7(화)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윤선도2

뫼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나니.   -윤선도(1597~1671) 고산유고(孤山遺稿)

<해설>

 산길은 길고 물길은 멀다. 어버이를 그리는 자식의 마음도 이렇듯 길고 멀다. 옛말에서 '하다'는 많다는 뜻이다. 가눌 길 없는 그리움을 '많고 많고 하고 하고'에 넘치도록 담았다. 외기러기는 무리에서 이탈한 기러기이다. 어버이 잃은 자식이다. 끼룩끼룩 기러기는 무엇을 울며 가는가? 어버이의 살뜰한 정을 그리는 나는 혼자 우는 기러기다. 그토록 안온하던 대오에서 이탈하여  차고 시린 인생 길을 끼룩끼룩 울며 혼자서 간다. 산길은 길고 물길은 멀다. 가야 할 길 끝이 없는데, 갈 곳 몰라 울며 서 있다. 5.8(수)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이명한(李明漢)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 마소

초원(草原) 장제(長堤)에 해 다 져 저물었네

객창(客窓)에 잔등(殘燈) 돋우고 새와 보면 알리라.

                         이명한(1595~1645), < 악학습령>

<해설>

 여보게. 떠나려나. 가긴 어딜 가는가. 내 술 한 잔 더 받게. 자네 그리 가면 보고파 어쩔거나. 들판은 아득하고, 긴 방죽 너머로 저녁 해가 지네 그려. 하루만 더 묵어 나와 함께 지내세나. 옷소매를 붙들고 떠나는 벗을 만류한다. 낯선 객창 가물대는 등불 아래, 심지를 돋워 가며 그리움에 꼬박 밤을 새워 보면 그때 내 맘 알 걸세. 기름이 다 탄 후에는 심지마저 바짝바짝 타 들어가지. 그 불은 제 몸을 다 태운 뒤에야 비로소 꺼진다네. 이 사람! 자 다시 한 잔 더 받게. 잔 씻어 새 잔 받게. 2002. 5.9(목)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훈(鄭勳)

뒷뫼에 뭉킨 구름 앞 들에 퍼지거다

바람 불지 비 올지 눈이 올지 서리 올지

우리는 하늘 뜻 모르니 아무랄 줄 모르리다.

                   정훈(1563~1640) < 수남방옹유고(水南放翁遺稿)

<해설>

 뒷산에 먹구름이 자욱하더니 앞들로 몰려와 넓게 퍼진다. 저 구름은 바람을 몰고 오는 구름이냐, 비를 뿌릴 구름이냐, 눈을 몰고 오려나 서리를 치려나, 풍운 조화의 깊은 속을 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다. 그저 가만히 앉아 하늘의 처분을 기다릴 밖에. 오늘의 득의가 내일은 재앙의 빌미가 된다. 단비가 고맙다고 무서리를 원망할까? 방긋 웃는 웃음 속에 비수를 숨기었다. 일희일비하지말자 다짐하고 또 해 봐도, 세상길 변덕스럽기가 봄날씨와 같구나.
         2002.5.10(금)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김상용

사랑이 거짓말이 님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와 뵈단 말이 기 더욱 거짓말이

날같이 잠 아니오면 어느 꿈에 뵈리오.   -  김상용(金尙容)1961~1637) <악학습령>

<해설>

 사랑한다고, 나를 사랑한다고 임은 솜곤소곤 속삭인다.간 밤 꿈에 나를 보았노라 내게 말한다. 말짱한 거짓말이다. 나는 저를 그려 말똥말똥 한 숨도 잘 수 없었데, 한 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데, 그저 애간장이 바짝바짝 녹는데, 한가롭게 무슨 꿈타령이란 말인가? '거짓말이'를 세 번 반복했다. 그대 향한 마음 앞에서 나는 도무지 속수무책이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온 신경이 한 곳으로만 쏠려 잠을 잘 수가 없다. 밥을 먹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책이 없다. 2002.5.11(토)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무명씨4

옥에는 티나 있지 말곳하면 다 서방인가

내 안 뒤혀 남 못 뵈고 천지간에 이런 답답함이 또 있는가

열 놈이 백 말을 하여도 님이 짐작하시소.      <악학습령>

<해설>

 자기가 내 서방이라고 헛말을 하고 다닌다. 옥이라면 티나 남지. 사실이 아니라도 속을 홀랑 뒤집어 남에게 보여 줄 수도 없다. 억울하다 말을 하면 의심만 더하는 눈치다. 세상 천지에 이렇게 억울할 데가 또 있는가? 아니라고 말할수록 소문은 더 커지고, 가만히 있자 하니 속에서 열불이 난다. 열 사람이 백 가지 말을 하더라도, 그저 임이 나를 믿고 바르게 헤아려 주시기만 바랄 뿐이다. 공연한 헛소문에 마음 다치고 졸이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구나.
  2002.5.13(월)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이덕일

힘써 하는 싸움 나라 위한 싸움인가

옷밥에 묻혀 있어 할 일 없어 싸우놋다

아마도 그치지 아니 하니 다시 어이하리.

        -이덕일 (李德一, 1561~1622) <칠실유고(漆室遺稿)

 <해설>

 하루 종일 싸우다가 자고 나서 또 싸운다. 죽기 살기로 하는 저 싸움은 나라를 위한 싸움인가? 그도 아니면 좋은 옷 맛난 밥에 등 따습고 배부르니, 그저 심심풀이로 하는 싸움인가? 시커먼 속이 다 뵈는데, 우국충정(憂國衷情) 말을 하고, 두 손으로 눈 가리고 본 사람 없지  한다. 저 싸움 그치지 않아 나라가 결단나게 생겨도, 싸움을 위한 그 싸움은 끝날 때가 없구나. 400년 전의 그 싸움이 지금까지 끝이 안 나, 400년 전의 그 탄식을 지금에 내가 한다.
   2002년 5월 14일 (화)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무명씨(가곡원류)

눈물이 진주라면 흐르지 않게 싸 두었다가

십 년 후 오신 님을 구슬 성(城)에 앉히련만

흔적이 이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해설>

 그대가 떠난 뒤로 흐르는 것은 눈물뿐이다. 보고파서 한 방울, 그리워서 한 방울,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구슬이라면, 임 떠난 10년 세월에 구슬 성도 쌓겠네. 하지만 눈물은 구슬이 아니니, 흐르지 않게 싸 둘 수도 없으니, 10년 후 임이 오신대도 구슬 성으로는 모셔 갈 수가 없다. 그 막막한 기다림의 시간과 그 깜깜한 절망의 탄식들을 그때 어이 전하리. 임이 와 내 수척한 몰골을 보고, 보기 싫다 돌아서면 또 어이할 거나. "내 기다림은 끝났다. 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 이 대추 굽이를 넘어간 뒤 인젠 내게는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2002.5.15(수)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권섭

하하 히히 한들 내 웃음이 정 웃음가

하 어척 없어서 느끼다가 그리 되네

벗님네 웃지들 말구려 아귀 찢어지리라.     -권섭(權燮, 1671~1759) <옥소고(玉所稿)

<해설>

 여보게들! 내 비록 하하 히히 웃고는 있지만 공연히 실없어 웃는 것이지, 좋은 일이 있어서 웃는 것은 아닐세.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이런 저런 생각 끝에 헛웃음만 짓게 되네. 내가 이리 웃는다고 덩달아들 웃지는 말게나. 즐거워 통쾌히 웃을 수만 있다면 웃다가 입이 찢어진들 대수겠는가?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으론 울고 싶네. 꼴같지 않은 인간들, 겉과 속이 다른 속물들이 저마다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양이 하도 같잖아서 하하 하고 웃다가 히히 하고 웃는다네. 2002.5.16(목)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무명씨5

벽상(壁上)의 칼이 울고 흉중(胸中)의 피가 뛴다

살오른 두 팔뚝이 밤낮에 들먹인다

시절아 너 돌아오거든 왔소 말을 하여라       무명씨   <가곡원류>

<해설>

 벽 위에 걸어둔 칼이 저 혼자 징글징글 우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 듣고 앉았자니 가슴속 붉은 피가 덩달아 울컥울컥 뛴다. 부르걷은 두 팔뚝도 제풀에 들먹들먹한다. 징글징글,울컥울컥,들먹들먹하지만 막상 이 펄펄 끓는 피를 쓸 곳이 없구나.시절아! 네가 돌아왔거든, 뚜벅뚜벅 걸어와 '나 왔소'하고 내게 일러주려므나. 사나이 벅찬 포부를 나라 위해 마음껏 펼쳐보고 싶구나. 쓸모 없이 녹슬어가는 칼이 안타까웠겠지.통쾌하고 시원스럽다. 읽는 이를 격동시킨다.   2002년 5월 17일(금)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소백주

상공(相公)을 뵈온 후에 사사(事事)를 믿자오매

졸직(졸직)한 마음에 병(병)들까 염려러니

이리마 저리차 하시니 백년동포(百年同胞)하오리다.  소백주(小柏舟), < 청구영언>

<해설>

 소백주는 광해군 때 평양 기생이다. 평양 감사 박엽(朴燁)이 손님과 장기를 두다 수가 막혔다. 공연히 멋적어 시조나 한 수 부르라 한다. 듣고 보니, 상(象), 사(士), 졸(卒), 병(兵), 마(馬), 차(車), 포(包) 장기판의 말이란 말이 다 있다. "상으로 공격하니 사 둘을 믿고 계시온대, 졸이 버티고 있어도 병이 들어오면 어찌하나 염려됩니다. 마로 이리 공격해 와도 차로 저리 막으시면 뒤에는 포가 함께 버티고 있지요." 가만 있자.그녀는 지금 은근슬쩍 훈수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찍하고 맹랑하다. 5.18(토)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