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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즉흥환상곡 C Sharp Minor Op.66

산야초 2015. 8. 3. 19:42

 

 

 

 

 

 

Chopin Fantaisie - Impromptu in C sharp minor Op.66


쇼팽의 즉흥환상곡 C Sharp Minor Op.66
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1849)


즉흥곡이란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악곡을 진행하는 형태를 말한다. 쇼팽이 쓴 즉흥곡은 4곡이 있으며 <제1번, 4번>이 유명하다. 특히 제 4번 환상 즉흥곡은 1834년의 작품으로 ‘환상’이란 제목은 그가 죽은 후 붙여졌다. 그는 생전에 이 곡을 무척 아꼈으며 죽은 후에 파기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지금에 와서는 4곡의 즉흥곡 중 가장 널리 연주되고 있다. 화려한 기교, 감미로운 선율이 매혹적이다.
 
즉흥 환상곡 c단조 op.66 세도막 형식
Fantasie-Impromptu (No.4) in c-sharp minor Op.66

곡은 3부형식으로 구성되어 주부는 처음 네 마디의 서주다음에 왼손의 여섯잇단음표에 대해 바른손, 즉 고음부의 16분음표의 음상으로 조화되는 화려한 악장으로 시작됩니다. 리듬이 서로다른 바른손과 왼손의 음형이 교차하는 가운데 생기는 일종의 환각이 주부의 주상이라 하겠습니다. 이 주부는 알레그로 아지타토의 2분의2박자입니다만 중간부는 d플랫장조의 4분의4박자로 모데라토 칸타빌레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중간부는 극히 감상적이며 아름답고 애수적인 선율이 여러차례 되풀이 되어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줍니다. 이 중간부가 끝나면 다시 처음의 주부가 복귀되어 재현됩니다. 코오다는 중간부의 선율이 저음부에 회상되어 여운이 오래오래 남는 인상적인 효과를 냅니다. 1834년 Chopin이 파리에서 작곡한 매우 감미롭고 매력적인 곡이며, 생전에 그 자신이 애지중지하기로 유명했던 곡이다.

 

Chopin은 이 곡을 항상 악보 사이에 끼우고 다녔을 뿐 아니라 출판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는 에스테 부인에게 헌정하려고 착수한 곡이라 추측하고 있으며, Chopin의 사후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곡의 흐름이 매우 감미롭고 아름답다. 쇼팽이 24세 무렵에 쓴 작품으로 추측되는데 최종 원고로 여겨지는 자필 악보(데스테 부인의 악보철에 들어있던 것으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소유하고 있었음)에는 "파리에서 1835년 금요일"이라고 적혀있다. '환상'이라는 제목은 그 때 붙여진 것이다. 쇼팽이 출판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서 헤들리는, 모셸레스가 1834년에 낸 즉흥곡이 이 곡의 주제와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이 곡이 데스테 남작 부인에게 팔린 것(자필 악보에는 "데스테 부인을 위해 작곡"이라고 적혀있다) 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폰타나 판은 초고의 필사보에 바탕을 두면서 폰타나가 직접 개정을 했기 때문에 최종 원고와는 상당한 차이를 낳고 있다. 작곡은 1834년 경, 최종 원고는 1835(?)년, 데스테 부인에게 헌정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출판은 1855년. 센티멘털하다는 평도 있지만 복잡한 리듬에 신선한 요소도 들어있다.

즉흥곡 제1번 A♭장조 op.29 세도막 형식 Impromptu No.1 in A-flat major Op.29

1837년에 작곡된 이 곡은 다른 즉흥곡보다 가장 맑고 깨끗한 곡이다. '환상곡'으로도 불리우는 이 곡은 조르즈 상드와의 사랑이 시작된 때에 작곡된 것이라서 그런지, 깨끗하고 밝으며 매혹적이다.

즉흥곡 제2번 F장조 op.36 Impromptu No.2 in F-sharp major Op.36

1839년의 작품으로 Chopin의 4개의 즉흥곡 중에서 가장 시적인 곡인데, 왼손만에 의한 꿈결 같은 악구로 시작되는 녹턴 풍 곡이다.

즉흥곡 제3번 G♭장조 op.51 세도막 형식 Impromptu No.3 in G-flat major Op.51

1842년에 작곡.. 첼로에 의해 멜로디가 노래한다. 코다의 화음적인 진행이 이 곡의 종결부를 긴장시킨다.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 3. 1 - 1849. 10. 17

쇼팽은 폴란드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회적인 불안을 피해 북쪽 나라 폴란드로 이주했는데, 처음에는 연초 공장에서 회계 일을 하던 그는 공장이 폐쇄된 후 스카르벡 백작의 집에 프랑스어 가정 교사로 머물렀다. 그리고 옛 귀족 출신 가정부 유스티나와 결혼, 1남 3녀를 얻었다. 둘째가 쇼팽이었다. 4세 때 피아노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12세 때 바르샤바 음악 학교 교장인 엘스너에게 정식으로 작곡 교육을 받았다. 엘스너는 쇼팽의 독창성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인물이 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15세 때 그는 처녀작 ≪론도 작품 1≫을 출판했고, 18세 때 베를린을 방문해 유럽 음악계를 견문했다. 다음해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 빈으로 가서 독주회를 열었다. 이때 슈만으로부터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여기 천재가 나타났습니다."라는 극찬을 받음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쇼팽의 마음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바르샤바 음악원 성악과 여학생인 콘스탄치아 글라드코?O봬ジ?남몰래 사모하면서도 도저히 사랑 고백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차라리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리라 마음먹고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살아있는 동안 두 번 다시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파리에 정착, 음악가로서 지휘를 굳혀 갔다. 26세 때 리스트의 소개로 쇼팽은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진취적인 여류 소설가 조르쥬 상드를 만났다. 그때 이미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쇼팽은 남장을 하고 엽연초를 피우는 6세 연상의 상드의 극진한 병간호를 받으며 작곡에 전념했다. 이들은 마요르카 섬에서 사랑의 공동 생활을 즐겼는데, 이곳에서 쇼팽의 병세는 악화되었지만 주옥같은 명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하지만 화려한 사교 생활을 좋아하는 상드와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기는 쇼팽이 언제까지나 이러한 생활을 견딜 수는 없었나 보다. 그들의 공동 생활은 1846년 그의 나이 36세 때 끝이 났다.



그후 그는 생계를 위해 한때 그의 문하생이었던 스털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에 갔다가 기후가 몹시 나쁜 그곳에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병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결국 3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그의 유해는 피에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고, 그의 유언에 따라 심장은 모국 폴란드의 바르샤바 성십자 교회에 안치되었다. 쇼팽은 일생을 거의 피아노곡 작곡에 전념했다. 그러나 예외로 만든 6개의 관현악곡, 3개의 소나타 역시 빛을 발하고 있고, 즉흥곡, 녹턴, 마주르카, 왈츠, 폴로네이즈 등은 쇼팽이 개척한 피아노곡 형식이었다. 새로움이 가득한 그의 곡들을 후대의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정교함과 치밀한 악상을 독창적으로 사용한 쇼팽은 선배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자의 세계를 열고 음악의 세계에 군림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영원한 낭만파 피아니스트 조르쥬 상드의 무덤. 쇼팽에게 있어 가장 밝은 태양이었던 상드도 1876년 열정의 불꽃을 모두 다 사르고 여기에 묻힌다. 프랑스 중부 노앙 지방에 눈부시던 태양도 그녀의 주검 위에서는 슬며시 그 빛을 감추고 만다. 쇼팽은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작곡가입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낭만파 피아니스트이며 또 주로 피아노만을 위해 작곡했기 때문이죠. 더욱 이 매력적인 일은 쇼팽의 선율이 언제나 쉽게 이어지면서도 매우 풍부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연주자들한테는 그의 피아노 곡이 아주 사랑받는 곡입니다. 마치 바이얼 인이나 첼로같은 악기를 다루거나 또는 노래를 부르듯이 연주할 수 있습니다. 쇼팽은 피아노를 위해서 많은 곡을 썼습니다. 그러나 연주를 하는 데에는 많은 기교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24개의 연습곡은 각각 기술적 난점이 있죠. 물론 모두 아름답지만요. 결국 훌륭한 연주자라면 기교의 어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그 외에도 쇼팽의 녹턴이라든가 또 세계적으로 이름난 왈츠곡들을 남긴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모두가 연주하기에는 어려운 작품들입니다.

 

한 마디로 연주자의 한 사람으로서 쇼팽을 말하자면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사랑하고 선호하면서도 연주하기에는 가장 어려운 음악가 중에 한 사람입니다. 임종, "불쌍한 나의 어머니!" 스카르 도를레아. 안뜰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두 개의 건물이 바로 노앙을 떠나 파리로 온 쇼팽과 상드가 별거 아닌 별거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 쇼팽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 졌고, 새벽녘에 시작한 기침은 반나절 이상이나 계속됐다가 그칠 정도로 악화되는 바람에 상드는 그의 병간호로 심신이 몹시 지친 상태였다. 그래도 두 건물에서 마주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뜰에서는 가끔씩 쇼팽의 즉흥 연주회가 열리곤 했다. 발자크, 하이네같은 문인들이 이 연주회의 초대 손님으로 자리를 빛냈다. 상드와의 사랑도 마침내 파국을 맞이한다.

 

상드의 딸을 둘러싸고 생긴 미묘한 감정대립으로 끝내 아픈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다. 상드 곁을 떠난 뒤 사랑에의 목마름과 심각한 폐결핵으로 햇빛을 그리워한 쇼팽은 이곳 프라스 방동으로 거처를 옮긴지 다섯 달만에 햇살 잘드는 2층 방에서 서른아홉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 임종의 마지막 순간에 쇼팽이 불러본 이름은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 "였을 뿐이다 . 마들레느 성당. 쇼팽의 장래식이 거행된 곳이다. 성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아래로 멀리 보이는 길 저 끝까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의 행렬로 가득 메워져 있다. 자신의 <장송행진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프레드릭 쇼팽은 영원한 안식 속에 잠들었다. 그의 죽음은 음악을 이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크나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고이 잠드소서. 눈물처럼 순수했던 영혼이여! 우리는 지금 그대를 위해 울지만 그대는 우리를 위해 위안의 선율을 남기고 떠났는가? 그대의 슬픈 생각이 끝난 뒤에 고귀한 예술은 더욱 그 빛을 발한다."



판타지 (fantasy)

보통은 환상곡이란 표현보다 판타지라는 표현을 쓰다보니 백과사전에도 나오는 것이 쉽게 접근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자유로이 작곡한 작품 . 보통 환상곡으로 번역 된다. 이는 시대 ·작곡가 ·곡풍(曲風) 등에 따라 종류가 많으나 일반적으로는 다음의 5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즉흥적 성격을 띤 곡:모차르트의 피아노용 환상곡(D단조), 베토벤의 피아노용 환상곡(작품번호 77) 등.
② 자유형식의 소나타: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월광》, 슈만의 《환상곡》(작품번호 17) 등.
③ 몽환적(夢幻的) ·몽상적 분위기를 띤 낭만파시대의 소곡:브람스의 《환상곡집》(작품번호 116) 등.
④ 오페라의 아리아 등을 계속해서 연주하도록 한 곡으로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처리되어 있는 것:리스트의 《돈 조반니 환상곡》 등.
⑤ 16∼17세기의 기악곡 명칭:엄격한 대위법을 따랐으며 후세의 자유로운 환상적 요소는 포함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