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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만년 역사... 인류 20만년 마셔도 마르지 않는 지구의 눈

산야초 2017. 9. 4. 23:50

[friday] 광활한 대지·에메랄드 물결 품은 '지구의 눈'

  • 이병철·시인  

    입력 : 2017.09.01 04:00

    대자연, 바이칼의 절경

    地氣가 센 땅, 알혼섬
    샤머니즘의 발원지… 우리 민속신앙 비슷한
    서낭당·장승 등 많아

    끝없는 아름다움, 바이칼
    3000만년 얼고 녹아 인류 20년 동안 마셔도
    마르지 않는 바이칼호

    매력적인 도시, 이르쿠츠크
    문화·예술 꽃피운 데카브리스트의 유배지
    화물열차 실려온 고려인 정착해 살아간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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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스러운 바다’ ‘세계의 민물 창고’ ‘시베리아의 푸른 눈’ 같은 별명답게 바이칼 호수가 다채로운 물 색깔을 뿜어내며 출렁이고 있다. 흙길 위에 완고히 서 있는 교통 표지판도 유목민처럼 마구 오가는 바람을 막진 못할 것이다. / 이병철
    나는 먼지처럼 작아지고 나를 둘러싼 세계는 끝없이 광활해지는 곳, 바이칼(Baikal). 그 이름의 위압감 탓에 멀게 느껴지지만 막상 서울에서 네 시간이면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닿을 수 있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 포장도로와 흙길, 물길을 차례로 달려 알혼섬에 발을 딛는 순간, 삶은 바이칼 여행 이전과 이후로 나뉘며, 세상엔 바이칼에 가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부류밖에 없게 된다.

    후지르 마을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숙소 '니키타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러시아산 '발티카' 캔맥주를 마시며 호수로 향하는 산책로를 걸었다. 곧 눈앞에 나타난 장관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대자연에 압도된 것이다. 인류가 20년 동안 마셔도 그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3000만년을 얼고 녹은 바다 같은 호수를 보며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나를 어떻게 주체할 수 없어 언덕을 달려가다 넘어졌다. 안 아팠다. 아찔한 벼랑을 뛰놀다 내게로 와 얼굴을 핥아대는 개들마저 반가웠다. 무릎 꿇고 엎드려 바이칼 호수 물을 마셨다. 온몸의 혈관이 깨끗해졌다.

    알혼섬 일대는 샤머니즘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어딜 가든 서낭당, 솟대, 장승 등 우리 민속신앙과 비슷한 상징물을 볼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지기(地氣)가 센 땅이라 한다. 아아, 바이칼! 5월에도 얼음이 다 녹지 않는 '천지의 어머니' 위로 신성한 불칸(Bulkhan) 바위가 알혼섬의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보기에는 그냥 바위산이지만, 실은 전체가 철광석으로 이루어져 우주를 끌어당기는 강력한 자석. 두 명의 부리야트족(族)이 손 모아 기도하며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나도 바위에 올랐다. 왠지 '광야에서'를 꼭 불러야 할 것 같아서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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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이칼 호수를 한 모금 마신다. 온몸의 혈관이 깨끗해지는 맛. 2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후지르마을 아이들. 3 이곳의 ‘솟대’인 세르게. 사람들은 이곳에 와 소원을 빌며 리본을 묶는다. 4 이르쿠츠크 맛집 ‘안트레코트’에서 맛본 샤슬릭. / 이병철
    다음날, '우아직'이라고 불리는 구소련 군용 승합차를 타고 알혼섬 북부 투어에 나섰다. 사자바위와 악어바위를 볼 수 있는 누르간스크, 소비에트 시절 강제수용소가 있던 페시얀카 부두, 끝도 없는 자작나무 원시림 타이가,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과 유사한 전설을 품은 사간후순의 삼형제바위 등을 차례로 지나 다시 후지르 마을로 돌아오는 데 8시간이 걸렸다. 투어 비용은 1100루블, 우리 돈 2만원 정도다. 어떤 말로도 다 형용할 수 없는 바이칼의 아름다운 얼굴을 온종일 마주 볼 수 있었다.

    바이칼의 절경을 감상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알혼섬 트레킹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승합차 투어를 이용하는 것이다. 알혼섬 후지르 마을에 숙소를 정하고 나흘 이상 느긋하게 머물 것을 추천한다. 알혼섬에 가지 않더라도 환(環)바이칼 열차를 타면 이르쿠츠크를 출발해 슬류지안카, 앙가솔카, 포르트바이칼, 라스트비얀카를 거치며 바이칼 호수를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다. 중간중간 열차에서 내려 관광도 가능하다.

    북부 투어를 마치고, 알혼섬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맞이했다. 파이크, 오물, 레녹, 타이맨 등 바이칼 물고기들을 잡으려 루어 낚싯대를 챙겨왔지만 얼음이 녹지 않아 낚시를 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누그러졌다. 우리 돼지갈비찜과 나물무침 비슷한 반찬에다 밥 두 그릇을 비우고, 오물 구운 것도 두 마리 먹었기 때문이다. 알혼섬에 내 노래와 입맞춤, 영혼 몇 다발을 두고 가는 게 몹시 기뻤다. 불칸 바위에게는 메아리를, 바이칼에게는 키스를 돌려받으러 올 것이라 다짐했다.

    날이 밝자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돌아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한여름 같은 땡볕이 오후를 달구고 있었다. 바이칼 호수로 가는 기착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는 매력적인 도시다. 혁명을 꿈꾸다 유배당한 데카브리스트들이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곳이며, 화물열차에 실려와 시베리아 벌판에 버려진 고려인들이 악착같이 살아남아 정착한 땅이기도 하다.

    알혼섬 관광 등 바이칼 호수 여행 후 꼭 이틀 정도 여유를 두고 이르쿠츠크를 둘러볼 것을 권한다. 러시아정교의 영향이 짙은 도시인 만큼 카잔 성당, 즈나멘스키 수도원 등 역사·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이 많다. 키로바 광장, 앙가라 강변, 중앙시장, 데카브리스트 박물관, 목조건물 거리 등에 가볼 만하다. 레닌 거리 부근 130지구는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고급 레스토랑, 대형 쇼핑몰이 위치한 '핫 플레이스', 이르쿠츠크의 젊은 남녀와 거리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다. 전통 음식인 샤슬릭(꼬치구이)과 보르시(야채수프)를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공장과 중고차 시장, 부탄가스와 초코파이를 쌓아둔 고려인 상점이 뜨문뜨문 위치한 외곽 지대에 다 허물어져 가는 목조주택들이 있다. 판자촌이다. 빈티지한 분위기가 좋아 사진을 찍는데, 사람 없는 폐가처럼 보이는 나뭇더미에서 아기를 업은 고려인 여자가 나와 빨래를 널었다. 나는 몹시 미안했고,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 여인을 보며 나도 합장한 손을 흔들어 기도했다. 서울의 내 생활도 고려인 여인처럼 신산하겠지만, 영혼에 담은 바이칼 호수가 나를 메마르지 않게 해주리라는 걸 믿기로 했다.

    언제나 삶은 비좁고 문제는 커보인다. 한 평짜리 생활에 갇혀 어디로 눈을 돌려도 '나'밖에 안 보인다. 불안의 명세서가 매일 배달되는 일상 속에서 숨을 쉴수록 답답하다. 들숨에 차고 맑은 하늘을 목구멍으로 넘겨 가슴 시원하고 싶을 때, 지루하고 협소한 생활을 전복할 혁명이 필요할 때, 나는 데카브리스트들의 도시 이르쿠츠크를 거쳐 '지구의 눈' 바이칼에 갈 것이다.

    [friday] 광활한 대지·에메랄드 물결 품은 '지구의 눈'
    대한항공에서 4월부터 10월까지 주 2회(월·금) 인천~이르쿠츠크 직항을 운항한다. 이르쿠츠크에서 알혼섬으로 가려면 시외버스터미널을 이용하거나 중앙시장 입구의 사설 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다. 둘 다 소요 시간은 비슷하지만 승차 환경은 사설 버스가 낫다. 중간에 주유소에서 한 번 쉬므로 버스 탑승 전 미리 화장실을 다녀오고, 가벼운 먹을거리와 물을 사두어야 한다.

    알혼섬 숙박 시 많은 여행객이 선호하는 '니키타 하우스'에 체크인하는 편이 좋다. 북부 투어와 이르쿠츠크행 버스를 예약할 수 있고, 유료지만 저렴한 금액에 와이파이를 쓸 수 있다.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에서 예약이 가능하다.

    이르쿠츠크 130지구에 있는 '라솔닉(Rassolnik)'은 샤슬릭과 보르시 등 러시아 전통음식은 물론 양·염소·사슴 등 다양한 육류 요리와 생선 요리, 와인을 맛볼 수 있다. 근처의 '안트레코트'는 캐주얼한 감각의 카페레스토랑이다. 샤슬릭, 수제버거와 함께 러시아 맥주를 곁들이면 좋다. 노상에서 파는 러시아 전통 여름 음료 '크바스'를 마시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한편 웬만한 마트들의 매대 절반이 술이라서 러시아산 보드카와 아르메니안 코냑 등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으니 간단한 러시아어 인사말 정도는 익혀두는 게 좋다. 220V를 사용하므로 별도의 어댑터가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