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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생두부 한 점… 구수한 단맛이 녹아들었다

산야초 2018. 6. 3. 21:56

[friday] 따뜻한 생두부 한 점… 구수한 단맛이 녹아들었다

조선일보
  •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     
    입력 2018.06.01 03:00

    [인생식탁] [정동현 음식 에세이] 아현동 '황금콩밭'

    서울 아현동 '황금콩밭'은 콩을 불리고 갈고 거르고 끓인 재료를 쓴다. 그 재료의 이름은 두부다. 두부는 가장 자주 먹지만 저평가된 재료다. 많은 면에서 두부는 모차렐라 치즈와 비슷하다. 온갖 음식에 다 들어간다. 샐러드에도, 파스타에도, 피자에도 널리 널리 들어가는 모차렐라 치즈의 신세는 두부도 마찬가지다. 부침, 조림, 국, 찌개 등 만만한 것이 두부다. 그 이유는 두 식재료의 맛에 자기주장이 약하기 때문이다. 마트 진열대에 널린 모차렐라 치즈와 두부는 거의 무미(無味)하다. 맛 대신 이에 걸리는 식감으로 먹는다고 봐야 한다. 그만큼 향도 맛도 없다. '황금콩밭'은 그런 면에서 독보적이었다.

    황금콩밭의 대표 메뉴인 따뜻하게 데운 ‘생두부’. 예리하게 잘린 모서리 각에서 재료를 다루는 요리사의 엄격한 손길이 엿보인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재개발로 들어선 초대형 아파트 단지 초입, 야트막한 언덕에 노란 간판을 단 이 집에 들어서니 익숙한 식당 풍경이 펼쳐졌다. 근래 좌식에서 입식으로 바꾼 홀, 가장 구석에 들어서 있는 좁은 주방, 그 사이를 총총히 걸어 다니는 중년 여자들과 그녀들을 '이모' 혹은 '저기요'라고 부르는 손님들까지 똑같았다. 옆 동네 마포처럼 술집이 많지도 않고, 광화문처럼 직장인들이 점심을 해결하는 밥집이 늘어서지도 않은 아현동의 평범한 동네 식당이라고 오해하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두부와 두부의 부산물로 채운 메뉴는 자못 진지했다. 점심 시간에 가볍게 먹기 좋은 '두부짜글이'(7000원)와 '청국장'(8000원)은 깔린 반찬만으로도 제값을 했다.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야들야들하면서도 심이 살아 있는 '미디엄'에 가까웠던 시금치나물과 달큰하게 조린 멸치볶음은 기본기가 탄탄한 미드필더처럼 맛의 중심이 꽉 잡혀 있었다. 두부를 으깨어 고추장으로 간을 한 '두부짜글이'는 대중적인 매콤한 맛을 지녔다. 그러나 그 매운맛은 고추기름이 주가 되며 오로지 자극을 위해 존재하기보다 두부의 단맛과 감칠맛과 대조되며 전체적인 맛의 크기를 넓혀주는 역할을 맡았다. 크게 썰어 넣은 파는 두부가 놓치기 쉬운 가볍고 향긋한 풍미를 저변에 깔아 놓았다. 흔한 찌개처럼 고기나 해산물이 주연이 아니었다. 대신 오로지 두부로만 목소리를 내는 이 음식을 먹는 이가 제일 많았고 또 그럴 만했다. 1만원을 넘지 않는 가격에 적당히 혀를 치고 배를 채우는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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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두부를 으깨어 고추장으로 간을 한 ‘두부짜글이’와 생두부 등으로 차린 한 상. 2.서울 아현동 황금콩밭 외관.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청국장은 이 집이 콩에서 파생된 모든 것에 자신이 있다는 트로피 같은 상징이었다. 청국장에서 나기 쉬운 쓴맛이 잘 잡혀 있고 특유의 향과 맛이 강하지 않았다. 모든 음식의 개성이 강할 필요는 없다. 손님의 입맛에 수렴할 수 있도록 그 맛을 조절하는 것도 식당의 필수적인 덕목이다. 아랫목의 쿰쿰한 향이 밴 청국장을 숟가락으로 퍼 먹을 때마다 이 집의 두부가 어떤 맛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이 집의 진면목은 역시 두부였다. 따뜻하게 데운 '생두부'(1만원)는 이 집 메뉴의 중심이자 얼굴이었다. 두건을 한 종업원이 자부심이 어린 웃는 얼굴에 종종걸음으로 가지고 온 생두부는 새하얀 상아(象牙) 빛이었다. 예리하게 잘린 두부 모서리 각에서 재료를 다루는 요리사의 엄격한 손길이 엿보였다. 눈 다음은 코였다. 그 위로 얼굴을 옮기기도 전에 할머니의 품처럼 구수한 향이 다가왔다. 먼저 간을 하지 않고 숟가락질을 했다. 이로 두부를 씹었다. 매끄러운 푸딩을 먹는 것처럼 두부는 입속에서 화려하게 파쇄되었다. 서양의 디저트처럼 고급스러운 질감이었다. 그리고 녹아든 두부가 혀에 올라탔다. 설탕처럼 순수한 탄수화물이 가진 예리한 단맛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유처럼 그 품이 훨씬 너르고 오래 여운이 남는 단백질의 단맛이었다. 간을 하면 하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맛에 강약과 고저(高低)가 생겼다.

    생두부를 살짝 기름에 지진 '두부전'(1만2000원)은 뽀얀 얼굴에 살짝 화장을 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톤이 강하지 않지만 확실히 다른 맛을 냈다. 스피커 볼륨을 높인 것처럼 고소함이 증폭되고 단맛은 살짝 가려졌다. 맑은 날에는 생두부, 비가 온다면 두부전을 고르리라. 하지만 어느 것 하나를 고른다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맛의 결이 전혀 달랐다. 같은 재료에 간단한 조리를 함으로써 생겨난 맛의 차이가 컸다. 그러나 더 놀라웠던 것은 내가 두부의 맛과 향을 느끼고 구별한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이탈리아 본토에서 물소 젖으로 만든 모차렐라 치즈의 맛처럼, 이곳 두부는 누군가 시작부터 끝까지 땀을 흘리고 눈을 부릅뜨고 근육을 움직여 노동을 한 맛이었다.

    매일 오전 11시가 되면, 이 집에서는 자급률 25%대인 국산 콩으로 만든 두부가 나온다. 갓 만든 재료로 음식을 만들고 손님 에게 낸다는 평범한 방식이었다. 흰 셔츠처럼 가장 무난하지만 가장 멋스럽고 순수한 맛이었다. 여름으로 가는 길목, 비가 또 창밖을 두드린다. 나직하게 신음이 새어 나온다. 아, 두부부침!

    황금콩밭: 두부짜글이 7000원, 청국장 8000원, 두부젓국 2만원, 생두부 1만원, 두부전 1만2000원, 모둠보쌈 5만2000원. 서울 아현동, (02)313-2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