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한 빵집 중 하나로 얼마 전 한국에 분점을 연 ‘타르틴 베이커리’에서 가장 잘 나가는 빵이 시큼털털한 사워도 빵이다. 유명하다니 맛 한번 보시라고 회사에 사 들고 갔다가 50대 남자 부장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다. “그거 오늘 사 온 빵 맞지? 쉰 것 같이 시큼하던데.”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답해줬다. “원래 그런 맛으로 먹는 빵이에요.”
커피 가루에 크림과 설탕까지 듬뿍 넣어 마시는 부장에게 ‘아직 커피 맛을 잘 모르시는군요. 커피는 역시 케냐AA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죠’라고 대답해준 것처럼 말이다. ‘아직 빵 맛을 잘 모르는군요’라는 뉘앙스를 슬쩍 담아 돌려준 답이었다.
우리 주변에도 빵순이, 빵덕후, 빵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많아졌고 자신만의 빵 맛을 자랑하는 빵집도 늘어났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빵은 대개 첨가물 없이 담백한 빵이거나 갖가지 기교를 부려 새로운 미각 경험을 하게 하는 빵이다.
이 중 유독 주목받지 못하던 빵이 바로 식빵이다. 웬만큼 유명한 빵집을 가 봐도 식빵이 맛있다고 자랑하는 집은 잘 없었다. 요즘 생겨나는 빵집 중에는 자신 있는 빵 몇 가지만 만들어 간결하게 차려내는 경우도 많은데 식빵은 그 라인업에서 종종 빠지곤 했다. 오래돼 단팥빵이나 채소빵 맛있다고 유명한 빵집에서 식빵은 한편에 자리 잡은 ‘기본 빵’일 따름이었다.
주인공에게 자리 다 내주고 필요할 때 필요한 자리에 존재하는 조연 같은 빵. 아침에 토스트 해 먹을, 샌드위치에 갖가지 재료를 끼워 넣으려고 식빵을 찾는 사람은 많지만 ‘식빵 어떻게 만들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식빵은 ‘빵’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한 몸에 담은 빵이다. 가장 기본적이지만 조연에 머물렀던 빵. 그러나 추억의 맛과 냄새와 느낌이 살아 있는 빵. 그 빵의 기억을 되살려 자타가 공인하는 빵순이 기자 입장에서 내 맘대로 식빵 맛집을 꼽아본다.
김진환 제과점
20년 넘게 식빵 하나만… 나를 빵순이로 만든 집
20년 넘게 식빵 하나만 만들고 있는 이 작은 제과점의 식빵 맛은 진짜배기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우유식빵, 제일 기본 식빵 하나만 고르면 된다. 되도록 갓 구운 식빵이 나오는 이른 시간(영업시간은 오전 8시부터)에 가는 것이 좋다. 따끈따끈해서 기분까지 좋아지는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저절로 빵을 담은 비닐로 손이 쑥 들어가게 될 텐데, 괜찮다. 한 조각만 뜯어 먹어보자. 금세 식빵 반 통은 해치울 수 있다. 쫀득쫀득한데 고소하다. 잼을 발라 먹을 필요도 없다. 우유나 커피를 곁들이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빵 맛을 즐기다 보면 ‘식빵이 이렇게 맛있는 빵이었나’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사실은 만들기 나름으로 빵 맛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김진환제과점에서 처음 느꼈던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토마토소스로 만든 스파게티만 먹다가 이탈리아인 셰프가 직접 만든 토마토소스로 조리한 파스타를 먹을 때의 충격이랄까. ‘빵순이’를 자처하게 된 건 푸른 간판(지금은 분홍색 간판으로 바뀌었다)의 김진환제과점의 식빵을 먹고 나서부터의 일이다.
티나의 식빵
30대 파티시에가 반죽부터 포장까지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골목 안에서 조용히 빵을 만들고 있는 티나의 식빵을 찾았을 때 김진환제과점에서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2013년 가을 무렵 ‘빵순이가 즐겨 찾는 서울 빵집’이라는 트렌디한 기사를 쓰려고 빵집을 찾아 헤맬 때의 일이었다. 겨우 30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 파티시에가 반죽부터 포장까지 혼자서 다 하던 작은 빵집에서 맛본 식빵은, 김진환제과점만큼은 아니더라도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기본 우유식빵 외에도 밤식빵, 블루베리잼식빵, 초콜릿식빵 같은 다양한 맛의 식빵이 많은데 사실 이것들이 더 인기다. 요즘 식빵 전문점의 식빵에는 필링(소 재료)이 과하게 들어가 있어 먹다 보면 식빵을 먹는 것인지 필링을 먹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때도 많은데 티나의 식빵은 맛있는 밤‘식빵’, 맛있는 초콜릿‘식빵’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밀도
줄이 길어도 먹고야 말겠어
요즘 가장 맛있는 식빵을 꼽으라면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시작한 밀도를 꼽는 사람이 많다. 줄 서서 기다리다가 너무 오래 기다려 결국 먹기를 포기하곤 했던 밀도는 최근 옥수동, 가로수길, 잠실 등지에도 분점을 내어 조금 더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담백식빵이나 대표 메뉴인 큐브식빵도 맛있지만 생크림으로 반죽한 리치식빵을 먹으면 ‘쫄깃하고 고소한 식빵이란 이런 거다’라고 외치고 싶을 만큼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손으로 살살 잡아 뜯으면 제대로 뜯기지도 않는 쫄깃한 식빵 반죽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을 더한다. 요즘 유행하는 작은 크기의 큐브식빵도 놓칠 수 없다. 팥앙금이나 크림이 가득 들어간 큐브식빵에는 필링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에 한 끼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먹을 법하다. 카레나 시나몬 맛의 큐브식빵은 독특한 향과 맛으로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취향에 맞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맛있는 빵이 될 것이다.
교토마블
64겹 페이스트리가 결대로
조금 독특한 식빵이라면 64겹 페이스트리 반죽으로 결대로 찢어지는 교토마블을 꼽을 수 있다. 교토마블은 이름에서 보듯이 일본에서 시작한 식빵이다. 겹겹이 쌓인 반죽은 식빵이라기보다 크루아상에 가깝다. 식감 역시 크루아상을 먹는 듯 바삭하고 버터리하지만 담백한 맛도 느껴진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플레인식빵은 오븐에 따끈하게 데워 먹으면 더 맛있다.
교토마블의 식빵 중에는 삼색식빵이나 녹차팥식빵도 유명한데 쌉쌀한 녹차 맛과 고소한 빵 맛, 달콤한 팥 맛이 어우러진 녹차팥식빵만을 찾는 마니아도 많다. 빵이 따뜻할 때 결을 따라 찢어 먹어도 맛있지만 단면을 잘라 살짝 토스트해서 먹으면 버터의 고소한 맛이 배가 되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교토마블 식빵을 사러 이촌동까지 가야 했지만 이젠 곳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백화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모바일로도 주문할 수 있다. 요즘은 많은 식빵 전문점이 이처럼 체인점이나 스마트폰 주문을 통해 유통망을 넓히고 있는데 교토마블이 그 시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