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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 교향곡 제3번 '영웅'

산야초 2018. 8. 14. 23:27

 

 

Beethoven's Symphony No.3 in Eb major 'Eroica' op.55

베토벤 / 교향곡 제3번 '영웅'

Sergiu Celibidache, cond.

Munchner Philharmoniker

 


 

 Beethoven's Symphony No.3 in Eb major 'Eroica' op.55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베토벤의 일면을 이 교향곡 제3번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에 뒤이어 나폴레옹은 의회군(軍)을 지휘하여 여기에 가담하였습니다.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의 정신에 불타 있던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흥미있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1782년 2월부터 4월까지 그 때 비인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의 대사와 대사관의 비서역이며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루돌프 크로이쩌로부터 프랑스에 자유와 질서를 가져 온 나폴레옹의 업적에 대해 자세하게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공화국>을 숙독한 바 있던 베토벤은 이 시대의 영웅의 작태를 그의 작품으로 찬미하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33세 때인 1803년 여름, 이 작품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시켰습니다. 스코어의 표지에는 Bonaparte라고 썼으며 밑에 Ludwig van Beethoven이라고 썼습니다. 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내려 할 무렵, 나롤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보도가 비인에 퍼졌습니다. 이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사본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합니다. 나폴레옹도 이를테면 속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권리를 유린하고서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서 그 이래로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17년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는 보도를 듣고 비로소<나는 결말에 적절한 음악을 써 두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 작품에 있는 장송행진곡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후에 이 작품을 “심포니아 에로이카(영웅 교향곡) 혹은 “한 위인의 추억을 위해”라고 써서 로브코비치공에게 바쳐졌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지금까지 그의 선배들의 영향인, 모방기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시기였습니다. 그의 감정을 나타내는 강한 개성의 힘과 양식의 균형을 가지고 휼륭하게 왕성시켰습니다. 이 작품은 1805년 4월 7일 안 데아 비인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전곡 이어듣기

1 mov. Allegro con brio
2 mov. Adagio assai
3 mov. Scherzo-Allegro vivace
4 mov. Allegro molto

 

악장별 듣기

제1악장 : Allegro con brio Eb장조 3/4박자. 소나타 형식.

대담하고 힘찬 연주가 물결처럼 밀려가는 분위기의 곡 입니다다. 종횡 무진한 테마의 처리와 다채로운 음악상이 놀랍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제2악장 : Adagio assai C단조 2/4박자. 장송 행진곡. 

위대한 용사를 추모하는 장중한 악장입니다. 엄숙하게 묘지로 향하는 영구차, 수레의 삐걱이는 애처로운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며 아프게 만듭니다.

 

제3악장 : Scherzo, Allegro vivace Eb장조 3/4 박자.

지금까지의 '교향곡의 제3악장은 미뉴에트 를 써야 한다'는 공식에서 벗어나 스케르쪼를 넣어 독자적인 특성을 나타냈습니다. 유머와 익살이 섞여 힘에 차 있으면서도 영웅의 허탈한 모습을 그대로 담은 부분입니다.

 

제4악장 : Finale, Allegro molto Eb장조

승리의 개가를 연상시키면서 화려한 진행으로 계속되는 마지막 4악장은  발레 음악의 테마를 사용했으면서도 힘차게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에 의해 장중하게 마무리되는 피날레는 그때까지는 없었던 베토벤만의 독창적인 창안입니다.

 

 Beethoven, Ludwig van (1770-1827 G.)

악성 베토벤은 고전 음악의 최대의 완성자인 동시에 그 완전한 형식적인 예술에 보다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내용을 담은 위대한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백절불굴의 투지로서 모든 난관을 극복한 승리자였으며 철학자이며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애를 실천한 인도주의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은 고전의 형식미에서 벗어나 낭만주의 음악에 문을 연 교량적인 역할을 한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음악가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를 제2의 모짜르트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는 모짜르트처럼 신동은 아니였으나 음악적인 천분을 마침내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7세 때에 그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비인으로 갔습니다. 그의 본격적인 음악 교육은 이 때부터.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1792년 22세 때에 그가 비인에 나타났을 때는 작곡가라기보다는 먼저 피아니스트로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역경과 고난이 겹쳐 들었습니다. 생활은 곤란했고 사랑은 실패했으며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귓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1814년 이래 그는 완전한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고통 속에서도 비할 바 없는 위대한 예술이 나타났습니다.
1815년 이후의 작품은 그의 모든 창작 중의. 일대 전환인데 웅대한 구상과 자유로운 형식, 진지한 표현 등은 거성이 아니고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작품은 낭만적인 영향도 받았지만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고 냉정했으며 안정된 형식미를 갖추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체험을 합리적인 형식을 통해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보통 3기로 나누는데,
제1기((1786-1803) 초기의 작품으로서 하이든과 모짜르트의 영향을 받은 때입니다. 교향곡 제1,2번이 이 시기의 작품입니다.
제2기(1804-1816)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독창적인 시기입니다. 교향곡 제3번에서 제8번까지의 작품입니다.
제3기(1817-1827) 초인간적인 최고의 예술인데 영감의 창작기입니다. 청각을 거의 잃어버린 이후의 감각을 초월한 시대의 작품을 보였습니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9번 등이 있는데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음악사상 최고에 속합니다. 베에토벤이야말로 많은 유산을 우리 인류에게 남겼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