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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3번 E플랫장조 Op.55 ‘영웅’

산야초 2018. 9. 8. 23:58

Beethoven, Symphony No.3 Op.55 'Eroica'

베토벤 교향곡 3번 E플랫장조 Op.55 ‘영웅’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ker

Philharmonie, Berlin

1977.01

 

Herbert von Karajan/BPh - Beethoven, Symphony No.3 in E flat major Op.5

 

의심할 여지없이, ‘교향곡 3번’은 베토벤의 음악적 생애를 대표하는 걸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겁니다. 베토벤은 32살이었던 1802년,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한적한 마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상황이 아주 나빴습니다. 몇 년 전부터 골칫거리였던 귓병이 날로 악화돼 아예 ‘치유 불능’ 판정을 받았던 것이지요. 당시의 베토벤은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난치병과 창작의 고통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면서 차라리 죽음을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가 이때 써집니다. 두 동생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편지 형식의 유서였습니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다. 죽음이 나를 끝없는 고뇌에서 해방시켜 줄 테니.”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다행히 베토벤은 죽지 않았습니다. 유서는 동생들한테 전달되지 않은 채 책상 속에 잠들어 있다가 베토벤 사후에 발견되지요. 그리고 베토벤은 죽음 대신, 이른바 ‘걸작의 숲’으로 성큼 들어섭니다. 그 문을 활짝 여는 곡이 바로 교향곡 3번 ‘에로이카’라고 할 수 있지요. 베토벤 이전의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커다란 규모, 격렬하게 부딪히는 긴장과 이완이 듣는 이를 가슴 벅차게 만드는 곡입니다. 연주시간 약 50분에 달하는 이 장대한 교향곡은 마치 ‘음악이 가야 할 길이 바뀌었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베토벤은 귀족의 비위를 맞춰주던 산뜻한 선율과 형식을 가차 없이 파괴했고, 그리하여 음악은 그 자체로 묵직한 존재감을 얻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베토벤을 ‘위대한 음악가’로 칭송하는 이유가 바로 그 지점이지요.

바야흐로 ‘낭만’의 시대가 ‘에로이카’로부터 열립니다. 물론 당시의 청중에게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아마 청중에게는 이 낯선 음악이 ‘괴물’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이 곡은 생전의 베토벤이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합창’과 더불어 가장 큰 자부심을 가졌던 교향곡입니다.

이 곡에 ‘에로이카’(영웅)라는 부제가 붙게 된 연유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부연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대한 기대와 흠모가 베토벤뿐 아니라 당시의 예술가들에게는 매우 일반적 태도였다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특히 괴테의 나폴레옹 숭배는 유명하지요. 당시는 프랑스 혁명의 후반기였습니다. 포병장교 출신으로 왕정 쿠데타에 성공한 나폴레옹이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유럽 지식인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생각하면서 이 곡을 작곡했다는 것은 검증된 정설입니다. 오스트리아 빈에 보관돼 있는 악보 표지에 ‘보나파르트’라는 글자를 북북 지워버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영웅 교향곡’ 악보 표지에 ‘보나파르트’라는 글자를 북북 지워버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베토벤의 ‘영웅 상(像)’은 또 있었습니다.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고 끝없는 형벌을 겪어야 하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야말로 베토벤의 원형적 영웅 상이었습니다. 베토벤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새로운 도덕과 질서’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공화주의자로서의 이상과 일치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베토벤은 ‘에로이카’를 쓰기 전이었던 1800년,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이라는 발레음악을 작곡하는데, 바로 이 음악에 그 유명한 ‘영웅 모티브’를 등장시킵니다. 가장 마지막 곡인 ‘제16곡’에서 모습을 드러내지요. 베토벤은 이 모티브를 교향곡 3번에도 그대로 가져옵니다.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마지막 4악장에서 포르테시모의 강렬한 서주가 터져 나온 직후, 저음의 현악기들이 피치카토 주법으로 연주하는 첫 번째 주제가 바로 그 ‘영웅 모티브’입니다.

Paavo Jarvi/DKB - Beethoven, Symphony No.3 in E flat major Op.55

Paavo Jarvi, conductor

Deutsche Kammerphilharmonie Bremen

2005.08.27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교향곡 3번 ‘에로이카’는 그렇게, 인류를 위해 고난을 뚫고 전진하는 ‘남성적 영웅 상’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1악장 첫머리에서 터져 나오는 두 개의 화음부터 아주 단호한 느낌을 전해주지요. 이어서 저음의 현악기들이 잔잔하면서도 엄숙한 선율을 첫 번째 주제로 제시하고, 클라리넷이 두 번째 주제를 부드럽게 연주하다가 바이올린이 이어받습니다. 현악기들이 짧은 음형을 부서지는 잔물결처럼 묘사하다가 다시 그것들이 커다란 흐름으로 합쳐지는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집니다. 그렇게 분산과 통합을 반복하면서 매우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악장입니다. 인간을 위해 불을 훔치는 프로메테우스.

2악장: 아다지오 아사이

느린 템포의 2악장은 그 유명한 장송 행진곡이지요. 마치 관을 메고 행진하는 듯한 걸음걸이를 현악기들이 느릿하게 연주하면서 시작합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휘자 쿠세비츠키가 바로 이 두 번째 악장을 조곡(弔曲)으로 연주했지요.

3악장: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3악장은 빠른 템포의 스케르초 악장. 현악기들이 짧은 음표를 약간 수다스러운 느낌으로 연주하다가, 다른 악기들이 가세하면서 점점 더 크고 무거워지는 진행을 선보입니다. 특히 악장의 중간쯤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호른의 선율, ‘빰~ 빠밤’ 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 바랍니다.

4악장: 알레그로 몰토

4악장을 들을 때는 앞서 얘기했던 ‘영웅의 모티브’를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잔잔함과 강렬함을 반복하면서 다이내믹한 종결부로 치달려 가는 ‘베토벤의 힘’이 느껴지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