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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만 / 리코더소나타

산야초 2019. 6. 24. 21:46


Recorder Sonata in F minor, TWV41:F1

텔레만 / 리코더소나타

Georg Philip Telemann 1681~1767

Frans Brüggen, Recorder

 

Frans Brüggen, Recorder
Gustav LeonHardt, Harpsichord / Anner Bylsma, Cello

 

전악장 이어듣기


1.Adagio-Allegro-Adagio-Allegro / 2.Larghetto / 3.Vivace
Lorenzo Cavasanti, Recorder
Caroline Boersma, Cello
Cergio Ciomei, harpsichord

 

 
1악장 (Triste)


 
2악장 (Allegro)


 
3악장 (Andante)


 
4악장 (Vivace)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

독일의 작곡가. 마그데부르크 출생. 후기 바로크시대의 작곡가로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률을 배우고 후에 음악으로 전향하여 교회 오르가니스트, 궁정 악장(樂長) 등을 거쳐 1711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교회 악장 및 시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그 후 1721년에는 함부르크로 옮겨 5개의 교회 악장 및 시 음악감독으로 활약하다가 죽었다. 그는 같은 세대인 J.S.바흐, G.F.헨델과도 친하여 바흐의 차남 에마누엘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였고, 그런 연유로 에마누엘은 함부르크에서 텔레만의 후임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다작의 작곡가로, 오페라 ·교회음악 ·관현악모음곡 ·협주곡 ·실내악 등 온갖 장르에 걸쳐서 방대한 수의 작품을 남겼다. 독일을 위시하여 이탈리아 ·프랑스 ·폴란드 등 각국의 음악에 정통하였고, 그것들을 교묘히 받아들여 국제적인 양식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의 작풍은 아름다운 선율과 생기가 넘치는 리듬을 특징으로 하며 바로크음악을 넘어 고전파로 향한 경향이 강하다. 생전에 바흐나 헨델을 능가하는 평가를 받았으나, 사후에는 급속히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근래 그 진가가 재인식되면서 텔레만 부활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대표작으로 오페라 《핌피노네》, 각종 기악곡을 모은 《타펠무지크》 등이 있다.

 

텔레만은 1681 3월 14일 막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의 목사였다. 그는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그 곳의 교회음악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 독학으로 악기와 음악을 공부했다.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작품은 오페라 『시기문두스』(Sigismundus, 약 1693년경)였다. 하지만 이 유년 작품은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다. 1694년에는 젤러펠트(Zellerfeld)로 학교를 옮겨 지리, 라틴어, 음악을 배웠다. 이 때에 그는 교회음악과 시립 음악가들을 위한 작품을 몇 곡 썼다.

1697년에는 힐데스하임으로 옮겨 안드레아 학교를 다녔는데, 여기에서도 그의 작곡활동은 계속 되었다. 그의 작품은 학교 학생들을 위한 음악이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 기악과 이태리 오페라를 접했다.

1701년 고향 막데부르크에 돌아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텔레만은 당시의 많은 음악가들처럼 법학 공부를 위해 1701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의 법학 공부는 음악활동 때문에 곧 중단된다. 그는 대학에서 음악반(Collegium musicum)을 지도하면서 오페라를 지휘하기도 하고 가수로 오페라에 참여하기도 했다. 1704년 그는 노이에 교회(Neue Kirche)의 오르가니스트 겸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는 거기에서 토마스 교회를 위한 칸타타들을 작곡하기도 했다(이 교회에는 바하가 1723년부터 음악감독으로 부임한다). 그는 라이프치히 시와 바이쎈펠스 시를 위한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1701년 할레에 들렀을 때에 헨델을 만났고, 상호 방문하며 작곡 공부를 같이 하기도 했다. 헨델과의 교우는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705년 소라우(Sorau)의 백작 에르드만 폰 프림니츠(Erdmann von Primnitz)의 악장으로 임명되었다. 프랑스 식 음악을 선호하던 이 곳에서 그는 주로 프랑스식 모음곡을 작곡했다. 1708년 텔레만은 아니제낙 시의 악장이 되었고, 뒤이어 요한 빌헬름 공작의 악장이 된다. 그는 여기에서 공작을 위한 여러 가지 행사음악과 교회음악을 작곡했다.

또한 트리오 소나타와 라이프치히 시를 위한 오페라도 작곡했다. 아이제낙 시는 자신의 음악을 성장시켰고,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성숙한 계기를 가졌다고 그 스스로 말한바 있다.

1712년 텔레만은 프랑크푸르트(마인) 시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그는 두 교회의 악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시의 주도적 인사들의 모임인 프라우엔슈타인(Frauenstein) 협회의 총무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있을 때에 수많은 교회음악 작품들과 오케스트라 음악, 실내악을 썼다.

1713년 프라우엔슈타인 협회의 음악팀을 이끌며 수많은 음악회를 열었다. 이 음악회들은 공개적이거나 반공개적인 것들이었다. 1714년 그는 바하의 요청에 의해 그의 아들인 칼 필립 에마누엘의 대부가 되었다. 1715년에는 그의 인쇄된 첫 작품집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여섯 소나타(Six sonates a Violon seul)가 나왔고 그 후로 40여 작품들이 인쇄되어 나왔다.

1716년 18세기 초반의 독일 수난곡 중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오라토리오 『세상 죄를 위해 고통 당한 예수』가 작곡되었다. 그밖에도 이 시기에 오라토리오 『신자들이여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라』(Auf Christenheit, begeh ein Freudenfest)와 세레나타 『독일이여 평화 속에 자라고 번영하라』(Teutschland gruent und blueht im Friede)가 작곡되었다.

1717년 텔레만은 아이제낙의 악장이 된다. 1718년 그는 자신의 첫 자서전을 집필했다. 하지만 이 글은 1731년 마테존의 『계속저음 학습서』(Große Generalbaßschule)에 비로소 발표되었다.

1721년 텔레만은 함부르크의 요한 학교와 5개의 주요 교회의 음악감독이자 교회음악가로 임명된다. 그는 이 교회들을 위해 정규적으로 칸타타를 써야했고, 해마다 한 편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해야 했다. 그는 1740년까지 여기에서 많은 음악회를 개최하였고, 악보출판업자로서 -자신의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악보까지도 출판했다. 그는 교회를 위한 칸타타와 수난곡들을 작곡하였고, 동시에 함부르크의 오페라 극장을 위한 오페라도 작곡했다.

또한 학교에서 필요한 음악들도 작곡하였다. 그는 왕성한 사회활동을 통해 당시 독일과 유럽 사회에서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많은 편지들은 매우 활발한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을 오늘날까지 전해준다. 1737년 프랑스 친구들의 초청으로 8개월간의 빠리 여행을 했는데, 이 때에 그의 국제적 명성이 시작되었다.

1755년부터는 텔레만의 중요한 후기 작품들이 쓰여졌다: 『예수의 죽음』(Der Tod Jesu 1755), 『천둥 찬가』(Die Donner-Ode 1756), 『하루의 여러 때』(Die Tageszeiten), 『예수의 부활과 승천』(Die Auferstehung und Himmelfahrt Jesu 1760), 『심판의 때』(Der Tag des Gerichts 1765), 텔레만은 1767년 6월 25일 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

텔레만은 음악역사상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들은 아직도 다 정리가 못된 상태이다. 그는 40세 이후부터 대단한 -전 유럽적- 명성을 누린 작곡가이기도 했다. 당시의 통념으로는 그가 바하보다 월등하게 훌륭한 음악가였다. 당시의 많은 독일인들은 음악가라고 하면 텔레만을 떠올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음악은 학자풍의 바하의 음악과는 다르게 전문적 음악가를 위해 작품을 쓸 때에도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 비교적 손쉬운 작품들이 많았다.

그는 청중들에게 금방 접근할 수 있는 음악을 원했다. 이러한 원칙은 수많은 그의 음악 장르와 기법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음악은 교회음악이든지 오케스트라 음악이든지 간에 일반적 청중을 의식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면 때문에 혹자들은 그를 고전주의 음악의 선구자로 보려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 그는 쉽게 잊혀졌다. 칸타타만 1000곡 이상을 쓴 그는 거의 "작곡공장"이라 칭할 만한 작품 양을 남겼으나, 후에까지 연주되는 작품은 많지 않은 편이다. 최근에 텔레만 연구가 다시 활기를 얻으면서 일군의 작품들이 새롭게 세상에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바하의 그림자에 가려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료출처: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