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러시아의 전투기가 독도 인근 방공식별구역(KADIZ)에 무단 진입한데 이어 양국 정부 측에서 “한국 영공이 아니다”라는 반응을 내놓자 사회 일각에선 100년 전 열강에게 침탈당하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함께 경각심도 높아지고 있다.
독도는 한반도 운명의 시계추였다.
1905년 5월 러일전쟁에 투입된 러시아 발틱함대가 독도 인근 해상에서 일본 해군에 완패했다. 발틱함대 대부분이 격침됐고, 이중 돈스코이호는 자침(自沈)을 선택했다. 앞마당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싸우는 동안 조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발틱함대가 전멸한 다음 달인 1905년 6월 일본은 독도를 관보(官報)에 ‘다케시마’(竹島)라고 명시해 공포함으로써 일본 영토임을 공식 선언했다. 이어 그해 11월엔 을사조약을 맺어 조선을 사실상 보호국으로 삼았다.
독도는 한반도 운명의 시계추였다.
1905년 5월 러일전쟁에 투입된 러시아 발틱함대가 독도 인근 해상에서 일본 해군에 완패했다. 발틱함대 대부분이 격침됐고, 이중 돈스코이호는 자침(自沈)을 선택했다. 앞마당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싸우는 동안 조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발틱함대가 전멸한 다음 달인 1905년 6월 일본은 독도를 관보(官報)에 ‘다케시마’(竹島)라고 명시해 공포함으로써 일본 영토임을 공식 선언했다. 이어 그해 11월엔 을사조약을 맺어 조선을 사실상 보호국으로 삼았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유독 독도에 대한 영유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독도를 둘러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갈등이 이어졌다.
논란의 단초가 된 것은 태평양전쟁 후 미국과 일본이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일본의 전후 영토가 사실상 획정됐다. 그런데 1차~5차 초안에서는 독도를 한국 영토로 포함했지만 6차 초안에서는 일본 영토로 들어갔다. 논란이 일자 최종안에서는 아예 독도가 사라졌다. 여기에 1951년 8월 문제의 ‘러스크 문서’ 사건이 벌어졌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직전 이승만 정부가 미국 측에 독도에 대한 한국 영유권을 확실히 넣어달라는 요청에 대해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지역 보좌관 딘 러스크는 “1905년 이전에 독도가 한국 땅이었다는 근거가 없으니 조약에도 넣어주기 어렵다”고 답장을 보냈다.
일본 측은 이를 근거로 독도 영유권을 계속 주장했고, 결국 19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하고 독도를 한국 수역으로 선언했다. 이때 이승만 정부가 획정한 해역은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이라고 불린다. 당시 국제법상 영해의 기준은 3해리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독도를 넣기 위해 20배인 60해리를 영해로 포함했다. 일본 정부가 반발하며 이승만 라인을 넘어오자 해군을 동원해 300여척의 일본 선박을 나포하는가 하면 약 4000명의 일본인을 구금조치 시키는 강공으로 맞섰다. 이때부터 일본 정부는 독도를 강제로 점거하려는 강경책은 접었다.
독도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에서다.
영유권을 놓고 팽팽하게 맞서던 양국은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일기본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봉합을 선택했다. 특히 4개의 부속조항에 추가된 ‘현재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통해 한국의 실효 지배가 사실상 인정됐다. 한·일 양국 관계도 이후 약 30여년간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됐다.
독도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한참 흔들리던 1998년 1월이다. 일본 정부는 한·일 어업협정 파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1994년 유엔(UN)이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12해리에서 200해리까지 확대하면서 한·일 양국은 1996년 어업협정 개정 협상을 시작했지만, EEZ 경계 획정 문제와 독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공방을 벌이던 참이었다. 결국 1998년 9월 김대중 정부가 일본과 신(新)한일 어업협정을 체결하며 독도 인근은 공동수역으로 결정됐지만, 양국 어민들이 모두 반발하는 등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독도를 둘러싼 갈등은 2000년 들어 본격화되고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지난 2005년 시마네현 의회는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는 조례안을 제정해 한국 측을 자극했다. 당시 일본에서 한류스타로 전성기를 누리던 배용준씨는 3월 영화 ‘외출’ 기자회견에서 독도와 관련한 기습질문을 받기도 했다. 배씨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걱정하고 있고 관심을 갖고 있지만, 나중에 기회를 만들어 말씀드리겠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이어 2012년 8월 10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섬을 방문해 일본 정부가 항의하며 양국 관계는 급랭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2014년 1월 중ㆍ고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개정 및 4월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 검정결과 발표를 통해 ‘독도는 역사적ㆍ국제법적으로 일본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점거 중’이라는 내용을 포함했다.
23일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인근 방공식별구역에 무단 진입하자 일본 정부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명의로 “다케시마(일본 측이 부르는 독도 명칭)의 영유권에 관한 일본의 입장에 비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극히 유감이다”라고 발표한 이유다. 이에 우리 국방부는 24일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독도는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라고 반박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23일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인근 방공식별구역에 무단 진입하자 일본 정부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명의로 “다케시마(일본 측이 부르는 독도 명칭)의 영유권에 관한 일본의 입장에 비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극히 유감이다”라고 발표한 이유다. 이에 우리 국방부는 24일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독도는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라고 반박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