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으로 던져진 고독한 천재의 이야기: 스콧 힉스의 '샤인' | |
꿈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는 불행하다. 꿈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아들도 불행하다. 왜?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하지만 아들은 그 꿈을 대신 이루어줄 능력이 없거나 그와는 전혀 다른 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세대의 아버지와 아들들이 바로 그랬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기어코 아들을 성공시키고자 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 속에는 바로 그가 살아왔던 시대의 좌절과 고통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이렇게 우리 아버지들은 아들을 통해 그 한을 보상받고 싶어 했지만 과연 몇 퍼센트의 아버지들이 이런 소망을 이루었을까. 과연 몇 퍼센트의 아들들이 이런 아버지의 꿈과 행복하게 조우했을까. 서로 다른 꿈을 안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슬프다.
불운의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샤인>은 이렇게 불행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는 이것이 정신장애를 딛고 일어선 한 피아니스트의 인간승리를 그린 영화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후 몇 번 영화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과 세상 사이의 관계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부자지간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가 얼마나 철저하게 그들이 처한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지를 보았다.
영화 <샤인>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헬프갓은 호주로 건너온 폴란드계 유태인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우슈비츠에서 부모와 형제자매를 모두 잃는 불행을 겪었으며, 이렇게 아픈 기억이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과 가족에 대한 강박증적인 집착을 갖게 한다. 물론 그 집착만큼이나 아버지는 교육에도 헌신적이었다. 아들이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아들의 음악교육에 지극정성을 쏟는다.
사실 데이비드의 아버지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바이올린을 너무 좋아했는데, 음악을 싫어했던 아버지가 그것을 박살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살난 바이올린과 함께 그의 꿈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해서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희망대로 데이비드는 어려서부터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장래가 촉망되는 피아니스트로 주목을 받는다. 심지어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아이작 스턴으로부터 미국유학을 권유받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기뻐해야할 아버지가 이상하게도 그의 미국행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선다. 그 후 영국 왕립음악학교로부터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아들의 성공을 원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가족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을 만한 거리 안에서의 성공이었다. 멀리 바다 건너 아들을 보내는 것은 그에게는 곧 사랑하는 가족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것과 똑같이 두려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애원한다. 제발 아버지와 가족들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데이비드는 기어이 영국행을 택한다. 이렇게 해서 집을 떠나는 아들의 등 뒤에 아버지는 비수와 같은 한 마디를 꽂는다.
“지금 가면 다시는 집에 돌아올 생각 하지 말아라.”
영국 왕립음악학교의 세실 팍스 교수는 데이비드에게서 진정한 천재성을 발견한다. 뇌일혈로 왼손을 쓰지 못하게 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이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어느 날 데이비드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치겠다고 하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엄청난 곡을 칠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사실 이 곡은 데이비드가 어릴 때부터 언젠가는 정복해야 할 거대한 산맥처럼 동경해 왔던 곡이다. 그런데 세실 팍스 교수가 이렇게 말하자 데이비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저는 충분히 미쳤어요.”
피아니스트에게 난공불락의 고지로 여겨지고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그야말로 엄청난 에너지와 테크닉을 요구하는 곡이다. 말이 협주곡이지 사실 이 곡은 피아니스트에게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엄청난 테크닉과 카리스마를 요구하는 곡으로 알려져 있다. 연주하는 데에 석탄 100톤을 삽으로 퍼 나르는 것과 같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얘기한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아마 이 곡을 연습하면서 데이비드의 신경줄에 손상이 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과 함께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그 엄청난 에너지에 너무나 가슴이 벅차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듣는 사람이 이 정도니 직접 연주하는 사람은 어떨까. 이 곡을 연주하면서 데이비드는 어쩌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청춘의 힘과 정열을 모두 소진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1악장의 낭만적인 주제 선율이 후반부의 카덴차에 이르러 거대한 폭풍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3악장의 도입부에서부터 그의 신경줄이 날카롭게 날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의 나약한 정신으로는 도저히 그 과도한 열정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손가락이 미친 듯이 건반 위를 날아다니고 있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곧 이어 완벽한 정적이 찾아온다. 들리는 것은 온전한 세상과 마지막으로 소통하고 있는 그의 심장소리 뿐. 이 짧은 정적은 곧 단말마적인 비명을 지르며 폭발할 3악장의 피날레를 예고하고 있다. 곧 비극적 종말이 펼쳐질 예정이니 관객 여러분은 부디 박수칠 준비를 하시길.
드디어 연주가 끝나고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 버린 데이비드는 그 자리에 쓰러져 이 세상과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만다.
이 장면을 보면서 언젠가 책에서 읽은 집시 노파의 말이 생각났다. 온 몸과 마음의 열정을 다 바쳐 노래를 부르고 나면 입 안에 피가 고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아! 나는 이 기분을 알 것 같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감동이 너무 엄청나서 내 가슴이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해버린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거의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감동도 너무 지나치면 고통이 되는 법이다.
정신분열증으로 무대에서 쓰러진 데이비드는 그 후 세상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진 채 거의 12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의 삶을 바꾸어놓을 사람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상대는 그보다 15살이나 나이가 많은 길리언이라는 점성술사였다. 영화에서 데이비드가 운명의 짝인 길리언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Nulla in mundo pax sincera>가 나온다.
이 음악을 배경으로 데이비드는 트램폴린 위에서 벌거벗은 몸에 외투 하나만 달랑 걸친 채 허공을 뛰어오르고 있다. 벌써 한 시간 째 그러고 있는 중이다. 세속의 가식을 모두 벗어던지고 공중을 향해 무한한 자유의 몸짓을 하고 있는 데이비드.
이 세상에 고통 없는 진정한 평화는 없어라. 자비로운 예수, 당신 안에 있는 참되고 순수한 평화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순수한 사랑의 빛이 비칠 때 내 영혼이 비로소 위안을 얻게 된다네
영화에서 이 노래를 부른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는 옛 음악을 주로 부르는 고음악 전문가수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고음악을 부르는 가수들은 목소리에 과도하게 감정을 싣지 않는다. 낭만시대 오페라를 부르는 것처럼 바이브레이션을 사용하거나 드라마틱하고 과장된 창법을 구사하지 않는다. 인간이 갖고 있는 순수한 목소리, 자연스러운 목소리, 천사의 음성처럼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데이비드가 허공을 오를 때마다 무한한 자유와 평화의 기운이 허공을 향해 퍼진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이 세상에 대가없이 저절로 얻어지는 평화는 없다. 저절로 얻어지는 자유도 없다. 데이비드의 삶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자유는 오랜 세월 동안의 외로움과 고통이 가져다 준 선물인 것이다. 그는 이제 그 깊은 어두움을 뚫고 다시 세상에 나와 사람들과 막 손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허공 위에서 세속의 가식과 때를 모두 벗어던진 채 완벽한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바로 이 장면에서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가 발산하는 효과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그 후 데이비드는 길리언과 결혼한다. 그리고 결혼 후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지금도 데이비드 헬프갓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사람들에게 영화의 감동을 재현하고 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아마 데이비드 헬프갓의 인생 드라마도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본 후 데이비드 아버지의 뒷모습이 영 마음에 걸려 떠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 세대의 아버지들처럼 무거운 어깨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끝내 아들이 재기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바로 어제 7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데이비드 헬프갓의 연주를 직접 들었다. 이번 연주회에서 그는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와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등 귀에 익은 곡들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다소 낯설었다. 예상을 뒤엎는 특이한 템포와 박자, 강약법 때문에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 때도 많았다. 어쩌면 이 때문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바로 이것이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인 것을. 데이비드 헬프갓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이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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