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

연남동의 작은 스페인

산야초 2021. 2. 15. 20:38

조종범 엘비스텍 오너셰프

연남동의 작은 스페인

글·사진 : 서경리 기자

 

맛 취향을 나누는 일은 기쁨이다. 특히 단골집을 소개할 땐 더욱 그렇다. 맛과 향, 공간의 기억을 나누는 거라 조심스러우면서도 상대의 반응이 기대되니 설렌다. 서울 연남동 골목에 숨은 작은 스페인 요리점, 엘비스텍이 그런 곳이다. 2년 가까이 이곳은 나에게 아지트 같은 숨은 고수의 맛집이었다. 하지만 숨은 고수가 대대적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SBS 〈생활의 달인〉에 출연하더니 연말에 ‘2020 대한민국 10대 맛의 달인’에 선정된 것.


더 이상 ‘나만 아는 맛집’은 아니지만, ‘나의 맛지도’가 검증받은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엘비스텍은 서울 연남동 좁은 골목 안에 있다. 커다란 부엌과 키 높은 테이블 8개, 초록색 벽, 자그마한 창문 앞엔 오색 전구가 공간을 빛내며 반짝거린다. 마치 스페인 마을의 어느 작은 골목 상점에 들어온 듯 아늑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우리 왔어요” 인사하니, 주인장 조종범 셰프가 반달눈을 하며 주방 너머로 눈인사를 건넨다.

 엘비스텍은 식사 때마다 손님들로 가득 찬다. 조 셰프와 잠시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도 손님들이 두어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그는 젖은 손을 닦으며 “〈생활의 달인〉에 ‘감바스 달인’으로 소개된 덕에 예전보다 손님이 더 늘었다”며 반색했다.

그와의 대화는 ‘감바스 알 아히요’를 사이에 두고 이어졌다. 새우와 마늘, 올리브오일을 주재료로 만든 스페인의 전채 요리다. 엘비스텍표 감바스는 결이 다르다. 다진 마늘과 새우 머리를 잘게 빻아 올리브오일을 넣고 지글지글 끓여 내는데, 바게트를 쓱 찍어 먹으면 마늘 향 너머 진한 바다의 맛이 난다. 매콤짭짤한 맛이 와인에 곁들여 먹기 딱 좋다.

“감바스를 처음 만들어 냈을 땐 새우가 기름에 둥둥 떠다닌다며, 사람들이 생소해했어요. 지금은 다르죠. 너나없이 감바스를 주메뉴로 내세워요. 이렇게 해서는 차별화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저만의 감바스를 연구했어요.”

엘비스텍표 감바스를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먼저 오일에 다진 마늘을 재워두고 새우 껍데기를 신선할 때 벗겨낸다. 머리는 따로 튀겨 갈아놓는다. 여기까지가 재료 준비 과정인데, 이것만 해도 며칠이 걸린다. 그다음은 본격 조리 과정.

“오일에 재워둔 마늘을 새우 머리와 같이 볶아요. 그래야 마늘에서도 새우 향이 고소하게 남거든요. 거기에 이탈리아 고추를 넣어 비린 맛은 잡고 매콤한 맛을 살리죠. 새우는 보리새우, 적새우, 흰다리새우 세 종류를 써요. 각각 맛이 다른데, 보리새우는 감칠맛이 나고, 적새우는 향이 좋아요. 또 흰다리새우는 살이 오동통하니 씹히는 맛이 있죠. 보리새우는 통으로 갈아놓고, 머리가 크고 살이 적은 적새우는 향을 내는 데 써요. 미리 재료를 준비해두고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조리해서 내갑니다.”

그는 매일 새벽 해 뜨기 전 농수산물시장에 가서 식자재를 구입해 온다. 그래야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다녀와서는 재료 밑작업에 골몰한다. 11시 반, 손님이 들어서기 전까지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한다.

“주문 후 손님 테이블로 나가기까지의 조리 시간은 짧지만, 준비 과정이 길어요. 스페인 음식은 숙성하고 간을 들이는 과정이 있어서 시간이 많이 걸리죠. 미리미리 준비해둬야 합니다. 남들과 똑같이 해서는 유지가 안 돼요.”

그는 “힘들지만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라 이골이 났다”며 “그래도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고 허허 웃었다.

 
식사 전 술에 곁들여 간단히 먹는 타파스. 감바스 알 아히요(왼쪽)와 관자새우구이.

스페인-이탈리아-다시 스페인 요리로 돌아오기까지

대학에서 조리학을 전공한 조종범 셰프는 레스토랑에 취업해 밑바닥부터 일을 배웠다. 지금에야 인기 셰프들이 유명세를 타며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대우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주방 구석에 쭈그려 앉아 식자재 밑작업을 하면서 ‘도망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버티고 버티다 보니 한 해 한 해가 지났고, 벌써 이 길에서 25년이 훌쩍 넘었다.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건 30대 후반, 요리를 배우기 위해 떠났던 스페인 여행에서다.

“요리에 지친 시점이 왔어요. 고단하고 피곤했죠. 여행 겸해서 스페인으로 떠났다가 지인의 소개로 현지 식당에서 1년간 일하며 요리를 배웠어요. 스페인도, 그곳 음식도 낯설었어요. 감바스도 처음 먹어봤고요. 이탈리아 음식은 치즈나 우유 등 유제품을 많이 쓰는 데 반해 스페인은 마늘, 소금, 후추로 요리하죠. 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려요.”

조 셰프가 스페인 요리 레스토랑을 차린 건 훨씬 뒤다. 피자와 파스타를 주축으로 한 이탈리아 요리가 인기인 한국에서 생소한 스페인 요리가 자리 잡을 곳은 없어 보였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청담동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10년 동안 경력을 쌓았다.

 
01_ 이베리코 하몽을 살짝 얼렸다 꺼내 쫀득한 식감을 살린 하몽 샐러드.
02_ 해산물로 맛을 낸 스페인 발렌시아식 파에야.

압구정동 고급 레스토랑의 실패

자신감이 붙을 즈음 압구정동에 스페인 요리를 겸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열었다. 막연히 잘할 자신이 있었다. 오너셰프로서 첫출발이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도 갖췄다. 자신만만하게 시작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사람들은 맛있다고 하면서도 비싼 가격 때문에 다시 찾지는 않았다. 맛에는 자신 있었지만, 경영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1년 만에 가게를 접고 또다시 레스토랑 소속 셰프로 적을 옮겼다.

두 번째 가게를 연 건 2018년 11월. 압구정동에서 경험한 아픔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만반의 준비를 했다. 당시 가게 자리를 알아보면서 강남과 신사동, 홍대 일대를 모두 뒤지다 눈에 들어온 곳이 연남동이었다. 압구정동에서처럼 으리으리하지는 않지만 열 평 남짓 자그마한 공간이 가정집 같아 아늑하고 맘에 쏙 들었다.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 스페인에서 배웠던 감각을 되살렸다. 엘비스텍의 시작이다.


시골 뒷동네 같은 정겨움

엘비스텍은 맛도 맛이지만 공간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밖으로 난 녹색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온 벽면이 녹색으로 둘러싸여 스페인 어딘가 자그마한 가게에 들어온 기분이다. 또 높은 의자와 테이블을 둬서 좀 더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아지트의 느낌을 주고 싶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시골 뒷동네 레스토랑 같은 느낌? 편안하게 즐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언제든 쉽게 가고 싶은 가게로요. 메뉴에 없어도 이것저것 주인장에게 만들어달라고 할 수 있는 아지트 같은 느낌으로.”

실제로도 그랬다. 감자뇨끼가 너무나 간절히 먹고 싶은 어느 날, 조 셰프에게 전화를 걸어 “감자뇨끼 있어요?”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메뉴에는 없지만 만들어드릴게요. 대신 시간은 좀 걸릴 거예요.”

이곳의 메뉴 구성도 압구정동과는 다르다. 처음에는 스페인 정통 요리에 초점을 맞춰 파스타는 빼고 타파스 종류를 늘렸다. 편안하게 놀러 와 와인 한잔에 타파스를 맛보고 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손님 대부분이 몇 개 안 되는 파스타를 주문했다. 1년 후 메뉴 구성을 대대적으로 바꿨다. 지금은 파스타 종류를 늘리고, 제철 해물이나 채소를 쓰는 요리들로 계절마다 변화를 준다. 가격도 대폭 낮췄다. 저렴하면서도 좋은 재료를 발로 뛰며 구해 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아지트

“비싸고 좋은 재료를 사용하면 누구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어요. 가격을 낮추는 대신, 다소 저렴한 재료로 더 맛있게 요리하려 노력해요. 그게 셰프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손님의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때론 손님이 남기고 간 파스타를 먹어보면서 맛이 짜거나 싱거운지, 혹은 면이 덜 삶아졌는지를 분석하기도 했다. 조 셰프가 택한 길은 ‘쉽게, 대충’이 아닌 ‘천천히, 공들여’ 가는 길이다.

“음식은 대충 하면 티가 나요. 마음가짐이 맛에 다 배어나죠. 음식으로도 손님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드리고 싶어요. 맛있는 음식의 힘이죠. 올해 제 목표는 ‘욕심내지 말자’입니다. 돈에 욕심내지 말고 맛과 질로 승부를 보려 해요. 한자리에서 꾸준하게, 지금처럼 단골손님을 만나고 싶어요. 제가 떠나지 않아야 모두 다시 찾아올 수 있잖아요.”

초창기부터 단골인 나와 동료들은 엘비스텍을 ‘우리의 아지트’라고 부른다. 엘비스텍은 언제 가도 편안하고 변치 않는 맛을 가졌다. 조 셰프는 음식을 만들 때마다 “맛있어져라~” 하고 주문을 건다고 했다. 그 마음이 음식에 스며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