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하나에 이름 8개…걷기여행길 판치는 韓, 전국 538개
[중앙일보] 입력 2021.08.08 05:00
손민호 레저팀장의 픽 - 국내 트레일 쪽집게 강의
걷기여행이 다시 붐이다. 트레일도 많아졌고 트레일을 걷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트레일 정책은 허점이 많다. 사진은 전남 완도군 청산도의 청산도 슬로길. 유채꽃이 피는 봄이면 꼭 걸어야 하는 길이다. 중앙포토
우리나라에는 트레일(걷기여행길)이 몇 개나 있을까요? 일단 생각나는 대로 적어볼까요? 제주올레는 당연히 아실 테고, 지리산둘레길도 유명하지요. 강원도 강릉에는 강릉바우길이 있고, 부산에는 부산갈맷길이 있네요. 코리아둘레길은 들어보셨나요? 요즘 정부가 밀고 있는 초대형 트레일입니다.
놀라지 마세요. 우리나라에는 모두 538개 트레일이 있습니다. 8월 6일 현재 한국관광공사의 걷기여행 정보서비스 ‘두루누비’에 등록된 숫자이니 공식 통계입니다. 어마어마하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길이 많을까요? 이들 트레일은 어떻게 다를까요? 여러분의 건강한 레저활동에 도움을 드리고자 국내 트레일의 핵심 포인트를 콕 집어 정리했습니다.
트레일은 무엇인가요?
길을 걷는 건 먼저 이 길을 걸은 누군가의 흔적을 좇는 일이다. 사진은 지리산둘레길의 한 고갯길. 중앙포토
트레일(Trail)은 길입니다. ‘흔적’이라는 의미가 ‘길’로 확장했다는데, 꽤 철학적입니다. 길을 걷는다는 건, 누군가의 흔적을 좇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관광산업의 측면에서 트레일은, 여행 목적지로 이동하는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 여행의 목적이 되는 길을 의미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존 뮤어 트레일, PCT(Pacific Crest Trail) 같은 세계적인 트레일은 길을 걷는 행위 자체가 여행이 됩니다. 트레일은 대체로 매우 길며 대자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PCT는 길이가 4265㎞나 됩니다.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 해안을 따라 이어지지요. 할리우드 영화 ‘와일드(Wild)’가 PCT를 94일간 종주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여 트레일은 ‘걷기여행길’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십수 년 전 트레일이라는 용어가 국내에 들어왔을 때 걷기여행길로 정리되는가 싶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문체부·관광공사 같은 관광 당국이 ‘걷기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걷기여행길이 길어서 줄인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영 어색합니다. 걷기길이 있으면 뛰기길이나 눕기길도 있겠네요. 차라리 트레일을 쓰는 게 나아 보입니다.
트레일이 왜 이렇게 많나요?
경북 봉화 승부역 가는 길의 이정표. 오지마을 여행의 성지와 같은 길이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 기차역이 있었다. 이 트레일은 문체부의 이야기가 있는 생태탐방로로 선정됐지만, 흐지부지 잊혀 버렸다. 손민호 기자
혹시 ‘녹색 성장’이란 구호를 기억하시는지요. 박정희 정부에 새마을 운동이 있었다면, MB 정부에는 녹색 운동이 있었지요. MB 정부가 2008년 2월 출범했습니다. 마침 이맘때 우리나라에 힐링 열풍과 함께 걷기여행 바람이 불었습니다. 지리산둘레길이 2007년 6월, 제주올레가 2007년 9월 첫 코스를 개장했지요. 민간 영역의 사회 트렌드와 정부 영역의 정책 방향이 맞아떨어지면서, 우리나라에는 트레일 대량 생산 체제가 구축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길 사업에 뛰어들었지요.
관광 주무부처인 문체부가 제일 먼저 조성한 길이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입니다. 이어 2009년 동해안 종주 트레일 ‘해파랑길’ 조성 사업을 시작했고요. 그 시절 산림청엔 지리산둘레길, 국토해양부엔 녹색경관길과 해안누리길, 행정안전부엔 녹색길, 환경부엔 북한산둘레길이 있었지요. 잠깐 부연하자면, MB정부 때는 지금의 국토교통부와 해양수산부가 국토해양부라는 이름의 단일 부처였습니다. 부처는 하나로 통합됐지만, 길 사업은 각자 진행했습니다. 국토교통부 쪽에선 녹색경관길을, 해양수산부 쪽에선 해안누리길을 따로 만들었지요. 다들 참 열심히 일했지요?
중앙정부만 길을 만든 건 아닙니다. 우리나라 트레일의 대부분은 자치단체 단위로 관리됩니다. 광역 차원에선 강원도의 산소길이 생각납니다만, 기초단체 차원의 트레일이 제일 많습니다. 인천 강화도의 강화나들길, 경북 영덕의 블루로드, 경남 남해의 남해바래길, 전북 부안의 변산마실길 등이 대표적인 시·군·구 단위의 트레일입니다.
민간단체가 만든 길도 많지요?
외씨버선길 이정표. 외씨버선길은 경북 청송군,영양군, 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을 지나는 내륙산간지역 트레일이다. 중앙포토
사실 우리나라의 트레일 사업은 민간 영역과 공공 영역을 구분하기가 애매합니다. 민간단체가 트레일을 조성하면 정부나 지자체가 민간단체에 예산을 지원하는 사례가 대부분이어서입니다. 이를테면 지리산둘레길은 사단법인 숲길이 운영 주체이지만, 산림청 예산에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앞서 산림청 트레일에 지리산둘레길을 포함한 까닭입니다. 비영리단체인 경북북부연구원이 운영하는 외씨버선길도 길이 지나는 4개 기초단체(경북 청송군·영양군·봉화군, 강원도 영월군)의 예산으로 근근히 꾸려갑니다. 제주올레는 독보적인 예외 사례입니다. 후원금과 자체 수익사업 중심으로 올레길을 꾸려가고 있어서입니다.
지리산둘레길 지도와 배지. 손민호 기자
민간 영역과 공공 영역의 협력 모델은 시행착오를 낳기도 합니다. 하나의 사례를 말씀드립니다. 지리산둘레길의 원래 이름은 ‘지리산길’이었습니다. 실상사 도법 스님과 수경 스님, 지리산 시인으로 유명한 박남준 시인과 이원규 시인, 이 네 남자가 당시 노무현 정부에 지리산 자락의 마을을 잇는 길을 내자고 건의했던 게 지리산길의 시작이지요. 산림청이 로또 기금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지리산을 끼고 있는 3개 도(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와 5개 시·군(전북 남원시, 경남 함양군·산청군·하동군, 전남 구례군), 사단법인 숲길이 힘을 합친 결과가 지리산길입니다. 하나 지리산길은 이내 이름이 바뀝니다. 산림청이 이름에 ‘숲’을 넣자고 제안해서입니다. 왜냐고요? 산림청이니까요. 그래서 지리산길은 개장 직후 ‘지리산숲길’로 바뀝니다. 얼마 뒤 지리산숲길은 지리산둘레길로 또 이름이 바뀝니다. 길을 걸은 사람이 죄 지리산둘레길이라고 부르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길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네, 제가 생각해도 많습니다. 정부 부처는 물론이고 자치단체까지 트레일 사업에 뛰어들면서 과열 양상을 빚었습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한 토막 알려드립니다.
강원도 고성 화진포 어귀에 설치됐던 이정표. 2012년 촬영했다. 지금은 '관동별곡 8백리길'이 잊힌 지 오래다. 이 구간은 현재 해파랑길이 지난다. 손민호 기자
강원도 고성군에 가면 송지호에서 화진포까지 동해안을 따라 그림 같은 길이 이어집니다. 이 28㎞ 길이의 길 이름은 애초 ‘관동별곡 8백리길’이었습니다. 고성군이 조성한 트레일이었지요. 2012년 이 길에는 이름이 무려 7개나 더 붙습니다. 관동팔경 녹색경관길(국토해양부), 평화누리길(행정안전부), 해안누리길(국토해양부), 해파랑길(문체부), 강원도 길 낭만가도(강원도), 산소길(강원도). 이미 이름이 7개인 이 길에 고성군이 ‘고성갈래길’을 더 붙여 기어이 이름을 8개로 늘립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고성군청에 문의했었지요. “정부에 길 사업 신청만 하면 예산이 내려오니 지자체 입장에서 안 만들 이유가 없지요.” 고성군청의 답변이었습니다. 현재 이 구간은 해파랑길 47코스 막바지 지점(송지호)에서 49코스 종점(화진포)까지에 해당합니다. 해파랑길을 제외한 나머지 길은 이름만 남아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예산이 끊기면 어떻게 되나요?
올림픽 아리바우길 2코스 아우라지 돌다리.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평창올림픽 공식 트레일이다. 문체부가 33억 원을 들여 조성했는데, 지금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예산이 끊기면 길도 없어집니다. 예산이 없으면 아무도 신경을 안 쓰기 때문입니다. 자체로 수익을 내지 못하는 민간 단체에 희생만 강요할 순 없습니다. 한 번 조성했으면 자생력을 갖출 때까지 관리해야 하는데, 중앙 정부고 자치단체고 운영과 관리는 다들 나 몰라라 합니다. 길은 사람이 걸어야 비로소 길이지만, 한국의 트레일은 예산이 내려가야 비로소 트레일이 됩니다.
올림픽 아리바우길이라는 트레일이 있습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문체부가 33억 원을 들여 조성한 올림픽 공식 트레일입니다. 길 이름에 ‘올림픽’을 쓰기 위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공식 승인도 받아냈지요. 평창올림픽이 열리는 세 고장(강원도 정선, 평창, 강릉)을 연결한다는 의의도 있습니다. 이 의미 있는 길도 지금은 싹 잊혔습니다. 올림픽이 끝나자 문체부도, 강원도도, 3개 기초단체도 관심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1년에 1억 원만 확보해도 올림픽 유산으로 활용할 수 있는데 다들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문체부와 강원도가 트레일 사업을 중단한 것은 아닙니다. 문체부는 한반도를 에두르는 코리아둘레길 사업에 매달려 있고, 강원도는 최근 영월∼정선∼태백∼삼척 고원지대를 연결하는 운탄고도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새 길을 낸다고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 이 길도 조만간 잊힐 게 빤히 보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니 문체부가 한동안 야무지게 추진했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도 기억에서 지워진 지 한참이네요.
전북 군산의 대표 트레일이었던 군산구불길. 군산시가 의욕을 갖고 조성했고 처음엔 사람도 많이 걸었으나 지금은 두루누비에서도 검색이 안 된다. 완전히 사라졌다는 얘기다. 자치단체가 조성한 트레일은 지자체의 의지에 따라 생기거나 사라지는 일이 반복된다. 그 사이에 애먼 예산만 날아간다. 손민호 기자
현재 우리나라 트레일 수는 538개이지만, 개별 코스 수는 2002개입니다. 트레일 하나에 평균 서너 개 코스가 있는 셈입니다. 제주올레만 해도 26개 코스가 있고, 해파랑길은 코스가 50개나 되니 오히려 코스 2002개는 많은 게 아닐 수 있습니다. 한두 개 코스만 거느린 소형 트레일이 의외로 많다는 얘기겠지요. 이 2000개 넘는 길 중에서 얼마나 많은 길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을까요? 저는 최소한 절반 이상은 허수라고 봅니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걷기여행에 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습니다. 이참에 한국의 트레일 정책 전반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얘기 나온 김에 당분간 한국의 트레일을 중점적으로 다룰까 합니다. 다음 [뉴스원샷]에선 코리아둘레길을 비롯한 온갖 둘레길의 실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길 하나에 이름 8개…걷기여행길 판치는 韓, 전국 53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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