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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슬픔과 고통 끝에… 봄날 아지랑이처럼 그림이 피어올랐다

산야초 2022. 3. 13. 13:48

극도의 슬픔과 고통 끝에… 봄날 아지랑이처럼 그림이 피어올랐다

[아무튼, 주말-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황홀한 자연 그린 ‘화단의 신사’
‘빛을 데생하는 화가’ 이대원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입력 2022.03.12 03:00
 
 
 
 
 
이대원 ‘배꽃’, 2000, 개인소장. 이대원은 새하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의 풍경을 자주 그렸다. 이 작품은 가로 5m가 넘는 말년의 역작이다. /갤러리현대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일도 쉽지 않다. 얼마 전 작고한 이어령은 본인의 삶을 ‘실패’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진정 자신을 잘 아는 가족과 친구, 삶의 동행자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스로 늘 ‘애정 결핍’ 속에서 살았다는 고백이다. 진정으로 풍요로운 ‘내면의 풍경’을 지닌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부러운 삶이 스스로에게는 완전히 공허할 수도 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외모도 준수하고, 머리도 비상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 직장도 잘 다니고, 훌륭한 아내를 만나 결혼도 잘했다. 그런데도 절대적 공허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심지어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다. 뜻밖에도 ‘화단의 신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화가’라는 별칭을 지녔던 이대원(1921~2005) 이야기이다.

◇열두 살에 그린 유화 ‘백일홍’

이대원은 지금부터 101년 전인 192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농림 회사의 중역으로 넓은 농원을 소유한 부자였다. 자식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이대원은 서울에서 청운국민학교(현 청운초)와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를 다녔다. 그는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재능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그림 재주만은 압권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열두 살에 이미 유화 작품 ‘백일홍’(1933)을 그렸는데, 과감한 붓 터치와 다채로운 색감이 어린아이 솜씨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재능을 가진 아이라면, 그냥 화가가 되게 두어야 한다.

‘백일홍’, 1933, 개인소장. 이대원이 12살 때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부친 생각은 달랐다. 경성 제2고보에서 늘 전교 2등을 하던 아들을 화가가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당시 정서가 그랬다. 화가를 업신여기던 때였고, 공부를 잘하면 법대나 의대를 가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런 사정이 지금까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어쨌든 이대원의 부친은 아들이 그림을 취미로 그리는 것은 허락했지만, 전공은 법학을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결국 사랑하는 부친의 뜻을 저버리지 못했기에, 이대원은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이대원, ‘온정리 풍경’, 1941, 개인소장. 경성제대 합격 후 취미로는 그림을 그려도 된다는 부친의 허락을 받고 금강산 스케치를 떠나, 외금강 초입 온정리에 머물면서 그린 그림이다.

◇두 번의 전쟁 체험과 방황

이때 그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기는 하필이면 제2차 세계대전이 극에 달한 때였다. 1944년 1월, 문과 계열 재학생 전원이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예외가 없었다. 이대원의 부친은 아들이 끌려가는 걸 어떻게든 막아보려 백방으로 애썼지만 허사였다. 이대원이 떠난 후 우울증에 빠진 부친은 황해도의 한 사찰에 간다고 길을 나선 후 행방불명되었다. 아들의 소망을 꺾고 억지로 경성제대에 보낸 것을 아버지는 후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대원은 용산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일본에 건너가 히로시마에 배속받았다. 당시 용산에서 탄 기차 옆자리에 앉아 같이 학도병으로 끌려간 경성제대 동기생이 김원룡(1922~1993)이었다. 나중에 무령왕릉과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발굴했던 한국 고고학계의 거두 김원룡 말이다. 이 둘이 이후에도 평생 지기(知己)로 남은 것은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강렬한 ‘전쟁 체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대원은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 때는 아키하바라 인근에서 시체 치우는 일을 했다. 한 트럭에 시체를 80구 정도 실어 교외로 나르는 작업을 나흘간 반복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때는 사행을 나간 덕에 폭격을 피했다. 어쨌든 그는 살아남았다.

 

해방 후 귀국했지만, 이대원은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경성여의전 출신의 소아과 의사 이현금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극동기업이라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돈도 벌었지만, 내면의 황폐함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또 6·25전쟁까지 발발해서 트라우마가 반복되었다. 제주도에 피란해 있으면서, 미 공군 전투기(P-51) 사용 교본을 번역했고, 전쟁 고아들이 모여 있던 한국보육원에서 소아과 의사인 아내와 함께 이런저런 일을 돕기도 했다.

이대원의 젊은 시절 사진, 이대원은 일찍부터 한국 민예품을 깊이 사랑하고 애장했으며, 관련 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본인 작품의 화려한 색채는 전통 자수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한때는 미국에서 영화배우나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1957년 미국에서 상영한 ‘전송가(Battle Hymn)’라는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때였다. 이 영화는 6·25전쟁 중 미국인 공군 장교가 상관의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서울의 전쟁 고아 1000여 명을 무사히 제주도로 피란시킨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다. 당시 미국 애리조나에 세트장을 마련해 놓고, 실제로 한국보육원의 고아 25명을 미국에 데려가 출연시켰는데, 이때 인솔자로 가서 통-번역을 담당하고, 엑스트라 출연도 한 사람이 이대원이었다. 워낙 영어도 유창했고 외모도 출중했으니, 미국에서 영화배우를 해도 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원은 자신이 계속해서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기 말대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트라우마의 세계에 갇혀, 그는 자신의 재능을 도무지 펼쳐내지 못했다.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제주도 시절 우울함의 극한까지 치달아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때 그를 구원해 준 것은 현명한 아내의 한마디였다. “다시 그림을 그리세요.”

이대원, ‘창변’, 1956.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이대원이 다시 붓을 잡은 후 그린 작품이다. 창밖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는 둘째 딸을 모델로 한 것이다. 화가 마티스처럼 모든 사물을 평면적으로 해석한 것이 특징이다.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이 하나 없는 그림”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내는 힘을 얻는 것 같다. 이대원은 잃어버린 세월을 떨쳐내고, 1950년대 후반 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친 반대로 미술대학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는 경성제2고보 시절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번 입선했을 정도로 이미 틈틈이 그림 지도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 미술 교사 사토 쿠니오, 경성에 약 1년 체류하며 학생을 지도했던 아오야마 도시오, 숭삼화실을 운영했던 도상봉이 모두 그의 스승이었다. 알고 보면 초일류 교수진이었다.

이대원은 다시 붓을 잡은 후,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섯 딸을 자꾸 그렸다. 부친이 지은 혜화동 집을 되찾아 그 집도 그렸다. 개나리, 국화, 붓꽃 같은 예쁜 꽃도 여러 점 그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안착한 주제는 어린 시절 화가의 추억이 깃든 파주의 ‘농원’이었다.

이대원, ‘개나리’, 1960. 개인소장.

부친이 남긴 파주의 넓은 농장을 일구면서, 이대원은 생명의 에너지를 다시 흡입해 갔다. “친구들과 할미꽃을 캐고 넓은 산소 터에서 숨바꼭질하던 일, 웅덩이에서 헤엄치고 낚시질해서 붕어를 잡아 자랑하던 일”, 그런 어린 시절의 “빛나는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농원은 그에게 진정한 힐링 장소였다. 거기에는 이대원의 경성제대 입학을 기념하여 부친이 심은 사과나무도 있었다. 수십 년 지나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그 나무를, 이대원은 마냥 그렸다. 좋은 추억이니까. 어찌 보면, 좋은 것만 기억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살아도 모자란 게 인생 아닌가.

이대원, ‘농원’, 1984, 개인소장. 이대원의 대학 입학을 기념하여 부친이 심은 사과나무를 그린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 수형이 비틀어졌는데도, 화가는 이 나무를 계속 그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작품은 점점 더 밝아졌다. 이대원은 결국 자신의 재능을 발현하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바로 내 가까이에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하고 그림으로 그리는 일 말이다. 그렇게 돌고 돌아 되찾은 행복감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겼다. 지우(知友) 김원룡의 표현대로라면, 이대원의 작품에는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이 하나 없다.” “인생의 행복감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그림들이다. 그러나 김원룡도 알고 있었겠지만, 이대원은 극도의 슬픔과 고통, 방황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다시 시작한 인생의 행복감을 더 소중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대원, ‘대추나무’, 1995, 개인 소장. /갤러리현대.

◇“빛을 데생하는 화가”

어떠한 규율이나 사조, 유행에도 구애받지 않았지만, 이대원의 작품에는 그 나름대로 고심(苦心)이 있다. 그의 작품은 서양의 유화지만, 동양의 ‘준법(皴法)’을 구사한다. 전통 수묵화에서 나무, 바위, 산을 표현할 때 붓질 방식을 다양하게 변주하는 것처럼, 이대원의 붓 터치도 속도감 있는 짧은 선을 반복적으로 겹쳐간다. 그의 작품은 일견 후기 인상주의 화가 쇠라의 점묘법을 연상시키지만, 쇠라의 점이 특정한 형태를 만들기 위한 ‘부분’으로 존재한다면, 이대원의 짧은 선은 그 자체로 속도감과 활력을 지닌 독립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유화를 그리면서도 이런 동양 준법을 구사하는 이유는, 작가가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에너지, ‘자연의 생동감 자체’를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한 프랑스 평론가는 그를 “빛을 데생하는 화가”라고 표현했는데, 재미난 말이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빛! 그 빛의 생생한 에너지를 화면 가득 담기 위해, 화가는 짧은 선들을 빠른 속도로 겹치면서, 사물도 배경도 동일한 밀도로 반짝반짝 빛나게 화면을 채운다. 화가는 ‘황홀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을 그렇게 평생 그렸다.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꾸준히, 계속해서.

이대원, ‘봄’, 2004. 개인 소장

88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수많은 삶의 경구(警句)를 남긴 이어령은 그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어찌 보면 이대원의 삶이야말로, 바로 이 경구를 실천하여 성취해 낸 결과물인 셈이다. 행복이란, 남의 신념대로 살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방황하고 길을 잃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바로 내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무엇’인가 보다.

이대원이 파주 작업실에 앉아있는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