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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뿌리' 되살렸다…138년전 美외교관 일기 속 황홀한 밥상 [e슐랭 토크]

산야초 2022. 4. 24. 09:22

'전주 뿌리' 되살렸다…138년전 美외교관 일기 속 황홀한 밥상 [e슐랭 토크]

중앙일보

입력 2022.04.24 05:00

 

미국인 '복구씨'가 남긴 전주 밥상의 뿌리

"오전 10시에 아침상이 들어왔다. 가슴 높이까지 올라온 수많은 음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말기인 1884년 11월 11일. 전라감영을 방문한 주한미국공사관 대리공사 조지 클레이튼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가 쓴 일기 내용이다. 그는 당시 전라감사(관찰사) 김성근으로부터 푸짐한 음식을 대접받은 내용을 상세히 적어놓았다.

 

포크는 전라감영에서 모두 8번의 음식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일기에 "저녁이 되자 나를 위한 연회가 열렸다. 상을 채우고 있는 둥글고 작은 접시에는 10명도 먹을 수 있을 만큼 음식이 쌓여 있었다"고 적었다. "오늘은 나에게 실로 환상적인 날이다. 이곳 감영은 작은 왕국"이라는 내용도 담겼다.

상차림 그리고 번호까지 매겨…9첩 넘어 

 

주한미국공사관 대리공사를 지낸 조지 클레이튼 포크(왼쪽)과 포크의 일기에 기록된 17가지 전라감염 음식. 사진 미국 해군역사센터, 미국 UC버클리대학 도서관

 

포크는 당시 상차림을 일기에 그려 넣고 음식에 번호까지 매겼다. 밥상 위에는 콩밥·소고기뭇국·닭구이·돼지고기구이·오리고깃국·꿩탕·숯불고기·소고기전·수란·젓갈 등 9첩이 넘었다.

미 해군 중위 출신인 포크는 고종 21년인 1884년 9월부터 12월까지 조선 팔도를 여행하면서 일기 형식의 기록을 남겼다. 전주에는 11월 10일~12일 사흘간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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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는 138년 전 조선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건물·음식 등을 일기에 자세히 담았다. 조선말도 할 줄 알았던 포크의 조선 이름은 '복구(福久)'였다.

"전주 음식문화 알 수 있는 최고(崔古) 기록"

 

옛 전라감영의 모습을 재현한 '전라감영이 돌아왔다' 공연. 사진 전주시

 

전주대 식품산업연구소 송영애 연구교수는 "포크가 기록한 전라감영 관찰사 밥상은 전주의 음식 문화를 알 수 있는 최고(最古)이자 최초(最初)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서양인의 시선으로 본 조선의 음식과 식문화 연구가 매우 적은 데다 다른 감영 관련 기록에도 음식 내용이 없는 현실에서 가치가 더 크다는 설명이다.

 

포크의 일기는 송 교수가 2019년 8월 열린 세미나에서 '전라감영 관찰사 밥상과 외국인 접대 상'이라는 주제 발표를 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전라감영은 조선시대 호남·제주를 관할하던 전라도 최고 지방통치 행정기구로, 행정·사법·군사를 책임지는 관찰사가 근무하던 곳이다.

풍성한 상차림…『전주부사』 "호화로움 극치"

 

전주시가 송영애 전주대 식품산업연구소 연구교수와 함께 복원한 전라감영 관찰사 밥상. 사진 전주시

 

과거 전주의 음식하면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풍성한 상차림을 연상했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일본인이 일본어로 기록한 『전주부사(全州府史)』에는 "전주의 토착 구가(舊家·한 곳에 오랫동안 살아온 집안)의 요리는 그 종류·방법·재료 등에서 호화로움의 극치를 자랑한다. 맛에 있어서는 조선 전 지역을 통틀어도 이와 비할 데가 없다"고 나온다.

 

전주는 2012년 국내 최초이자 유일하게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에도 선정됐다. 하지만 정작 전주만의 음식 조리법이 기록된 고문헌은 거의 없다. 전주 음식의 계보를 연구해 온 학자들이 포크의 일기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도대체 포크는 어떤 인물이고, 일기에 어떤 내용을 썼기에 '전주 맛의 뿌리를 짐작할 만한 단서가 들어있다'라는 평가를 받는 걸까.

美, '정보 수집' 조선 파견…"고종·명성황후 신임"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전라감영(옛 전북도청 터). 전주시는 한국전쟁 때인 1951년 폭발사고로 소실된 선화당(관찰사 집무실) 등 전라감영 7개 건물을 2020년 10월 복원했다. 사진 전주시

 

미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2년 뒤 포크를 조선에 파견했다. 양국의 통상조약을 통해 갓 수교한 동양의 낯설고 먼 나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포크는 정확한 정보 수집을 위해 조선 팔도를 여행했다. 당시 여정에는 조선인 통역과 보교꾼(가마 메는 사람), 하인 등 18명이 동행했다. 외국인인 포크가 한반도를 누빈 데는 당대 최고 권력자인 민영익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포크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수집의 선구자(HUMINT Pioneer)'라고 평가했다.

 

포크는 당시 28세 나이에도 고종과 명성황후가 중요한 정치 문제를 의논할 정도로 왕실의 신임을 얻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22권(1885년 9월 13일)에는 '고종이 건청궁에 나아가 미국 대리공사 포크를 접견했다(御乾淸宮 接見美國代理公使福久)'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말 구사…영어와 발음 비슷한 단어도 알아"

 

'고종이 건청궁에 나아가 미국 대리공사 포크를 접견했다(御乾淸宮 接見美國代理公使福久)'는 기록이 나오는 고종실록 22권. 사진 송영애 전주대 식품산업연구소 연구교수

 

명성황후도 임시대리공사직을 마치고 1887년 1월 일본으로 떠나는 포크에게 "자네가 가면, 앞으로 우리가 만날 새롭고 낯선 나라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정직하고 올바른 길을 지적할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포크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과 결혼해 귀화했다.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수학 교수로 재직하던 1893년 8월 6일 도치기현 닛코(日光)에서 원인 미상의 죽음을 맞았다. 당시 나이 37세였다.

 

포크는 전라감영에서 2박3일간 묵으면서 겪은 일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는 전주 도착 첫날 감사에게 자신이 조선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를 설명했다. 또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설명한 뒤 은박지에 싼 담배를 건넸다고 한다.

"환상적인 날" "감영은 작은 왕국" 감탄 

 

포크가 1884년 여행 중 직접 찍은 전라감사와 육방 관속들. 사진 위스콘신대 밀워키캠퍼스 도서관

 

"감사가 터무니없는 걸 묻기도 했다"라고도 했다. "미국도 조선만큼이나 좋은 나라입니까?", "조선의 음식이 미국의 음식보다 더 많습니까?" 등의 질문이었다.

 

구한말 조선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외국인은 드물었지만, 포크는 조선말과 영어에서 발음이 비슷한 단어까지도 알고 있었다. 포크는 "나는 씨(seed)·배(pear)·죽(porridge) 같은 단어는 발음이 영어와 비슷하다고 말해줬다. 그 덕택에 서로의 대화가 훨씬 부드러워져서 잔치 분위기가 났다"고 썼다. 밥(Pap)·왕(Wang)·감사(Kamsa)·아전(Achon)·현감(Hiengam) 등 고유명사는 발음 나는 대로 영문으로 표기했다.

 

포크의 일기는 날짜에 따라 장소·시간·기온을 적는 게 기본 구성이다. 길이 단위인 마일(mile)·야드(yard)·피트(feet)·인치(inch) 등을 비롯해 시간은 분·초까지 기록했다.

일기에 날짜·장소·시간 정확히 기록…"조리법 유추"

 

포크가 전라감영에 머물 당시 선화당에서 펼쳐진 연회에서 승전무를 춘 기생들. 포크는 '게이샤'라고 표현했다. 사진 위스콘신대 밀워키캠퍼스 도서관

그는 조선의 단위인 리(里)와 푼(分) 등을 언급했고, 사물의 색까지도 정확히 기술했다. 나주(Naju)·주막(Chumak)·산성(Sansung)·광주골(Kwangju-Kol)·영남루(Yongam-nu) 등 여행지와 공간을 그림으로 그리고 방위도 표시했다.

포크가 묘사한 상차림과 비슷한 그림은 1800년대 말 편찬된 『시의전서(是議全書)』에도 나온다. 『시의전서』는 저자 미상의 책이며, 현존하는 것은 1919년 필사본이다.

 

『시의전서』는 전통적인 상차림 형태를 문자화한 국내 최초의 책이지만 포크가 그린 상차림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게 송 교수의 견해다. 『시의전서』에 그려진 밥상에는 한자로 밥·국·구이 등을 표기한 형태지만, 포크의 상차림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 정확히 기록해 음식 재료와 조리법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전주시, 고문서 토대로 관찰사 밥상 복원 

 

송영애 전주대 식품산업연구소 연구교수가 포크가 일기에 그려둔 전라감영 관찰사 밥상을 바탕으로 음식과 재료 등을 정리한 표. 사진 송영애 교수

 

전주시는 2018년부터 송 교수와 함께 전라감영 관찰사 밥상을 복원해 왔다. 포크 일기를 비롯해 전라감영 관찰사를 지낸 서유구의 『완영일록』, 유희춘의 『미암일기』 등 고문서를 참고해 고증했다. 현대인의 입맛까지 고려해 밥상 메뉴를 정했다.

 

송 교수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비싼 한지에 '나 점심때 뭐 먹었어'라고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다만 '선물로 누가 감을 100개 가져왔다', '속이 안 좋아 부추죽을 먹었다' 등 식재료는 가끔 기록해 거기에서 유추해 음식을 재현했다"고 말했다.

 

전주시는 지난해 12월 공모를 통해 관찰사 밥상을 판매할 음식점 2곳도 선정했다. 전주비빔밥으로 유명한 '가족회관'과 '종로회관'이 정찬상(9첩 반상)·소찬상(5첩 반상)·국밥(소고기뭇국·피문어탕국) 등 세 종류의 상차림을 준비 중이다.

음식점 2곳 선정…"9첩·5첩 밥상 준비 중"

 

포크가 일기에 그린 전라감영 선화당. 선화당에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사진 UC버클리대 도서관

 

전문가들이 전라감영의 관찰사 밥상을 전주 음식의 뿌리로 보는 까닭은 뭘까. 송 교수의 설명에서 그 해답을 찾아봤다.

"아전들이 즐기고 동경했던 음식이 전라감영 음식이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아전들이 지주가 됐다. 아전의 음식이 지주로 넘어가고, 지주 옆에 있던 참모들이 1940~1950년대 식당을 차렸다. 전라감영의 음식 문화가 전주 음식의 뿌리가 돼 서서히 자리를 잡은 과정이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전라감영이 전주 한곳에서만 500년간 있었던 것도 맛의 역사를 이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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