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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의 매운맛과 푸근한 된장의 향, 씁쓸한 다슬기가 그 이음새를 메웠다

산야초 2023. 7. 9. 10:05

고추의 매운맛과 푸근한 된장의 향, 씁쓸한 다슬기가 그 이음새를 메웠다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해장국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입력 2023.07.08. 03:00
 
 

화곡 교차로 사거리는 언제나처럼 차가 밀렸다. 고가로로 올라가려는 차와 고가 옆으로 빠지려는 차가 어깨 싸움을 하듯 힘을 겨뤘다. 고가 옆 좁은 도로로 조금 나아가니 오른쪽으로 뻗은 이면도로가 나왔다. 그 초입에 ‘청천 올갱이 해장국’이라는 간판을 단 집이 작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예전에는 24시간 영업을 했지만 이제는 힘에 부쳐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문을 열어 놓는다. 그마저도 지금 세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과한 노동이다. 그러나 속을 풀려는 술꾼과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객들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이 집을 찾아든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청천올갱이해장국의 올갱이 해장국./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식사 메뉴는 올갱이 해장국 한 종류. 건더기로 부추와 아욱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고 둘 다 섞어 먹을 수도 있다. 양념으로 다진 고추를 넣는 정도가 이 집 해장국의 전부다. 주문을 넣고 얼마 뒤 받은 뚝배기는 손에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겁지 않았다.

 

그보다는 바로 입을 댈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온기,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80도에서 85도 사이의 온도로 나왔다. 이른바 식품공학에서 이야기하는 향과 맛을 가장 느끼기 좋은 온도대였다. 밥을 말면 그 온도는 아마 60~70도 언저리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바로 숟가락질을 해도 델 염려가 없었다. 첫술을 들었다. 황토를 닮은 된장의 구수한 향내가 비강을 통해 밀려들어왔다. 고추를 풀어 매운맛이 돌았지만 연신 물을 찾게 하는 자극적인 종류가 아니었다. 두세 숟가락 먹었을 때는 이마에서 조금씩 땀이 맺히는 것 같았다. 잠시 고개를 들어 가게 문 너머 지나다니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문득 어머니가 처음 끓여줬던 해장국이 떠올랐다.

 

간밤의 즐거움은 괴로움과 고통으로 얼굴을 바꿨다. 눈을 뜰 힘도 없었다. 대학생 때 친구들과 밤새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 방 침대 위였다. 혀를 차던 어머니는 부엌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더니 해장국 한그릇을 차려 놓았다. “이거라도 먹어.” 걱정 섞인 어머니의 말에 나는 몸을 질질 끌어 식탁 앞에 앉았다. 콩나물과 황태포를 넣어 끓인 맑은 해장국이었다. 건더기는 놔둔 채 국물만 마셨다. 짭짤하고 달달한 국물의 시원한 맛이 가랑비처럼 몸에 젖어 들었다. 나중에는 밥까지 말아 먹을 정도로 기운이 났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가 말했다. “나한테는 콩나물국 한번 안 끓여주더니!” 아버지는 매일 저녁 반주를 즐겼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애초에 평일에는 아침을 잘 먹지 않았다. 주말 아침 메뉴는 보통 오징어볶음이나 삼겹살 같은 것이었다. 부모님은 함께 오전부터 밤까지 장사를 했기에 밥을 제대로 차려 먹을 시간이 없었다. 그랬던 어머니가 마음먹고 차려준 해장국을 먹었을 때 나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이 음식을 찾는지 이해가 됐다.

 

어릴 적 생각을 하며 계속 숟가락질을 했다. 해장국의 수위가 조금씩 낮아졌다. 부추는 특유의 금속성 향기를 내며 아삭하게 씹혔다. 주인장이 일일이 얇은 껍질을 벗겨내 익힌 아욱은 부추와 달리 부드럽고 달달한 맛이 났다. 맛이 살짝 빈다 싶으면 다진 고추를 넣으면 된다. 고추의 매운맛은 푸근한 된장의 향에 묻혀 맛과 맛의 이음새를 메워주는 보조적인 역할에 충실했다. 섭섭하지 않게 씹히는 다슬기, 충청도 말로 올갱이는 살에서 느껴지는 단맛이 적고 내장에서 우러난 쌉쌀한 맛이 두드러졌다. 이 역시 주인장이 다슬기 하나 하나를 붙잡고 속살을 뽑아낸다. 물으니 주인장 고향이 충북 제천이라고 했다.

 

어릴 적 충북 생극에 할머니 댁이 있었다. 지금은 큰 도로가 뚫리고 커다란 공장이 들어섰지만 30년 전만 해도 나무에는 사슴벌레가 붙었고 마을 어귀 냇가 바닥에는 다슬기가 깔려 있었다. 작은 손으로 동생과 함께 다슬기를 한 냄비 훑어 오면 할머니는 “이 작은 걸 어디다 쓰려고”라고 말하며 된장찌개에 쓸어 넣었다. 바다에서 난 바지락의 시원한 맛과 다른 그 씁쓸한 민물의 향, 봄날 마냥 부드러운 아욱, 그 사이를 새벽 들판 안개처럼 자욱하게 펼쳐진 된장의 맛은 오래전부터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하나의 풍경이 되어 몸 전체로 다가왔다. 그릇 바닥이 보였을 때 이마부터 셔츠로 덮인 등판까지 땀이 맺혔다. 그 해장국 한 그릇은 거칠고 험한 것에 상한 속만 어루만진 것이 아니었다. 어른이기에 어쩔 수 없게 되어버린 것들, 잃어버리고 놓아버린 것들이 어느새 내 눈 앞에 있는 듯했다. 그것들은 만져지지 않고 잡히지 않은 채 그저 맛과 향으로 몸속에 남았다.

#청천올갱이해장국: 올갱이해장국 보통 1만 2000원, 올갱이 부추전 2만원, (02-2608-8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