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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가단조 D 821

산야초 2015. 10. 4. 23:20

 

Sonata for Piano and Arpeggione in A Minor, D. 821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가단조 D 821
Franz Schubert (1797-1828)
1.Allegro moderato - 2.Adagio - 3.Allegretto
 
Daniil Shafran, Violoncello Felix Gottlieb, piano 1978년 녹음
 
유려한 보윙, 뜨거운 정열의 연주.
아르페지오네를 위한 소나타는 슈베르트가 슈타우퍼의 발명품인 아르페지오네(arpeggione)란 악기를 위해 쓴 작품이었지만, 현재 우리는 샤프란의 음반처럼 첼로로 연주한 음반들을 자주 만난다. 물론 정격 음악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샤프란의 연주는 구식이라고 볼 수 없는 장점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 나긋나긋하고 유려한 보윙, 풍성하게 넘치는 정열로 슈베르트의 연둣빛 감성을 예민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명 연주는 함께 수록된 프랑크와 드뷔시의 첼로 소나타와 함께 그의 본령이 묵직한 독일 음악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음반 리뷰)
     
곡의 탄생 배경
나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오직 어제의 슬픈 생각만이 다시 나를 찾아옵니다. 이처럼 나는 즐거움이나 다정스러움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슈베르트는 27세인 1824년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또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나의 슬픔의 표현입니다. 슬픔으로서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은 이해를 날카롭게 하고 정신을 굳세게 해줍니다.
라고 쓰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아무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던 자기의 허약한 건강을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유명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의 가곡집이라든가, 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a단조>(작품 143) 등의 걸작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해인 1824년 여름에 슈베르트는, 에스테르하찌 일가와 함께, 쩨레스로 갔었다. 그는 여기서 오래간만에 상쾌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아마 슈베르트의 실내악곡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한 가장 다정스러운 정취가 풍부한 <현악 4중주곡 a단조>가 만들어진 것도, 이 해 여름의 일이었다. 백작의 딸인 '카롤리네와'의 사이에 로맨스가 싹튼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슈베르트는 여섯살 쯤 젊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쩨레스는 헝가리의 향토색이 짙었으며, 그래서 슈베르트는 슬라브나 마쟈르의 요소를 풍부하게 채택하여 몇 개의 실내악곡을 작곡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르페지오네라는 새로운 악기에 흥미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나, 한편 이 기타에 첼로를 더한 듯한 성질의 음에 헝가리풍의 특징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혹되어 작곡하기도 했던 것이리라. 따라서 이 소나타에는 슬라브풍이나 마쟈르풍의 힘차고 개성적인 성격이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작품개요 및 배경
아르페지오네(Arpeggione)는 1823년 빈의 악기제작자 케오르그 슈타우퍼에 의해 만들어진 악기의 이름이다. '기타 첼로'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기타와 유사한 크기와 외형의 악기를 첼로처럼 활을 현에 문질러 연주하는 형태의 악기였다. 슈베르트는 빈센초 슈스터라는 아르페지오네 주자를 위해 소나타를 작곡하였는데, 슈스터라는 인물은 이악기를 위한 교본을 남긴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르페지오네는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악기가 되어버렸고, 이 악기를 위해 작곡된 작품도 슈베르트의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다.
아르페지오네는 슈베르트 당대에 애호를 받다가 후에 사라진 악기이다. 기타와 유사한 형태, 음높이를 갖고 있으며 기타처럼 반음씩 나누어지는 지판을 가지고 있지만 첼로처럼 세워 활로 연주하는 악기이다. 오늘날 주로 첼로로 연주되는 이 곡은 주로 첼로의 중고역을 이용하게 되므로 콧노래를 부르는 듯한 독특한 정취를 풍긴다. 슈베르트의 풍요한 멜로디라인이 잘 살아 있는 느긋하면서도 아늑한 소나타이다.
악기 아르페지오네는 소형의 첼로, 바하 시대에 사용되었던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와 흡사한 모양을 했으며 전반적으로 오늘날의 기타를 연상시키는 악기였다. 현재에 와서는 많은 첼로와 피아노로 연주되나, 이 악기는, 지금의 첼로보다 피치가 높기 대문에, 아르페지오네를 위해 작곡된 작품을, 오늘날의 첼로로 연주할 경우에는 높은 음부의 빠른 패세지를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또한 리듬에 변화를 준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곡에는 카사도의 편곡에 의한, 첼로와 관현악과의 협주곡풍의 형태나 또는 도브링거 편곡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2중주의 형태로도 연주되고 있다.
     
     
작품 구성
제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a단조, 4/4박자.
정상적인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되어 있다. 9마디의 피아노 전주 다음에, 감미로울 정도로 우아한 주제가 첼로로 노래된다. 이 제1주제는 곡의 주상(主想)으로서는 다루어지지 않으나, 곡의 정취로서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제2주제는 명랑하고 경쾌한 성질이다. 사실은 이 기분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첼로가 5개의 화음을 피치카토로 연주하여 제시부를 마친다. 전개부는 첼로의 피치카토와 피아노로 시작하고, 제1주제가 약간 첼로로 노래된 다음, 거의가 제2주제를 바탕으로 한 전개가 된다. 언제나 유머러스하고, 명랑한 기분이 강조되고 있다. 이윽고 느릿한 첼로의 접속 악구가 있고, 재현부에 들어간다. 공식대로 제1, 제2주제의 재현이 있고, 서정적인 코다가 된다. 첼로가 호소하듯이 연주하는 이 코다는, 과연 슈베르트의 개성을 강하게 나타내어 아름다우며 인상적인 코다이다.
 
제 2악장 아다지오, E장조, 3/4박자, 세도막 형식.
Daniil Shafran, Violoncello Felix Gottlieb, piano
약간 자유롭게 변주곡풍으로 다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피아노의 서주가 있은 다음, 마치 슈베르트의 리이트처럼 여겨지는 애수와 동경을 지닌 주제가 육중하게 첼로로 연주된다. 첼로의 낮은 음넓이를 참으로 아름답게 연주하려고 고려한 듯한, 자유로운 변주가 계속된다. 세도막 형식을 은연중에 교묘하게 변화시킨, 슈베르트가 자주 쓴 수법이다. 첼로와 피아노의 대조가 두드러지며 아름답다. 첼로와 피아노의 2중창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형용이 없을 만큼 격조가 높은 악장이다. 그런 다음, 곡은 첼로의 인상적인 접속 악구로서 그대로 끝 악장에 들어간다.
 
제 3악장 알레그레토, A장조, 2/4박자.
Daniil Shafran, Violoncello Felix Gottlieb, piano
제2악장의 가요풍의 특징을 그대로 론도에 옮긴 형식으로서, 갑자기 첼로로 시작되는 론도 주제는, 순조롭게 전(前) 악장의 주제와 융합되고 있다. 이것이 집요할 정도로 되풀이된 다음, 짧은 접속악구가 있고, 제2주제가 나온다. 이것은 제1악장의 제2주제를 연상시킬 정도로 명랑하고 경쾌하다. 또한 헝가리풍인 첼로의 피치카토가 그것을 더욱 강조한다. 이윽고 곡은 호탕한 곡취를 더하여, 제3주제가 제시된다. 에피소우드풍으로 사용된 이 제3주제는, 자유 분망하게 활약하여 유머러스한 곡취를 강조 한다. 그 뒤 론도 주제가 원조로 돌아와, 동기를 자유롭게 변경시킨 코다에 옮긴다. 밝고 경쾌한 곡취 뒤의 애수 같은 이 코다는 참으로 인상적이다.
     
     
[모르토퐁텐의 추억]
-캔버스에 유채, 65*89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초판본 LP의 재킷에 있던 코로의 풍경화 [모르토퐁텐의 추억]
코로의 풍경화는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밝은 색조의 작품으로 예컨대 이탈리아 유학시에 그린 로마, 피렌체 풍경 따위가 그것이다. 또 하나는 푸른 색조와 송진과 같은 색을 주로 하여 막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거기에 정서가 흐르는 것 같은 풍경화로서, 대단히 낭만적인 작품들이다.
후자의 작품이 이른바 코로다운 풍경화로서 크게 환영 받은 것들이다. 이 종료의 풍경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풍이 이 그림이다. 코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풍경화는 아름다운 요정들을 조심스럽게 등장시킴으로써 자연을 인간화 시킨다는 옛 고전주의의 프로그램을 새로운 형태로 이끌었다. 정확한 감각으로 한낮의 풍경을 만들었던 코로는 또한 정반대로 꿈의 풍경을 그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코로(Corot, Jean-Baptiste Camille 1796~1875)파리 출생.
처음에는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1822년부터 미샤롱과 베르탱에게 사사하여 그림을 공부하였다. 1825년부터 2년간 동경하던 이탈리아에 유학, 자연과 고전작품을 스승으로 한 정확한 색가(色價)에 의한 섬세한 화풍을 발전시켜, 1827년 《나르니다리》로서 살롱에 등장하였다. 그 후는 프랑스에 살면서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을 비롯한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뛰어난 풍경화를 남겼다.
《샤르트르 대성당》《회상》 등이 유명하며, 풍경화 이외에도 《진주의 여인》《푸른 옷의 여인》《샤르모아 부인상》 등이 있다. 코로의 작품은 은회색의 부드러운 채조(彩調)를쓰면서 우아한 정경을 드높여 주어, 단순한 풍경에도 시와 음악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큰 특색이다. 동시에 착실한 관찰자로서 자연을 감싸주는 대기와 광선의 효과에도 민감하여, 빛의 처리면에서 훗날 인상파화가의 선구자적 존재였다.
     
     
아르페지오네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유명한 바이올린과 기타 제조업자였던 요한 게오르크 슈타우퍼(1778~1853)가 살고 있었다. 그의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그 당시 수타우퍼가 디자인했던 헤드스톡 부분은 20세기의 전기 기타인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에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면 능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823년 오늘날 '아르페지오네'라고 알려져 있는 새로운 악기를 개발하였고, 빈 일반 음악신문 4월 30일자에 이 악기를 소개했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이 악기는 기타 다로므, 혹은 기타-첼로라고 부를만한 것으로 모양은 일반의 기타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지만. 음역은 훨씬 넓으며, 여섯 줄이 매여져 있는 것은 기타와 같으나, 현을 기러기발로 지탱하고 있는 점과 손가락이 아닌 활로 연주하는 것은 첼로와도 같다, 소리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음량도 풍부한데, 고음은 오보에에 저음은 바샛 호른의 영역까지 미치고 더블 스톱 연주까지 가능하여 특히 반음계 악구의 연주에 잘 어울린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일반 기타와 똑같이 E-A-D-G-B-E의 순으로 조율하도록 되어 있고. 바이올린 족의 밋밋한 지판 대신 24개의 금속 기러기발로 지판이 나뉘어져 있던 이 독특한 악기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악기라고 지칭한 것은 슈타우퍼의 손에 의해 태어난 이후 현역악기로서는 제대로 대접을 받았던 기간이 고작 10여 년에 지나지 않았던 까닭이다.이 악기가 개발된 직후인 1824년 슈베르트가 이 악기를 위해 소나타를 한 곡 작곡하였을 뿐, 다른 작곡가 어느 누구도 이 악기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10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또한 아르페지오네의 독특한 음향을 사랑하는 아주 소수의 연주자들에 의해서 그 명맥이 이어져왔을 뿐이다.슈타우퍼는 낭만주의 꽃을 피웠던 19세기의 대기를 호흡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페지오네 15-6세기 비올족 악기들의 음향 이론을 그대로 접목시켰는데, 사실 여기에서 아르페지오네의 수명을 단축시킨 모든 문제가 출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크 시대까지 맹위를 떨쳤던 비올족의 현악기들과 기타 류트 등은 음량의 한계때문에 바이올린족 악기들에게 오케스트라의 주인공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는데, 바로크 말기인 1760년대 후반, 유럽을 두루 여행하면서 각지의 음악에 대해 기록을 남겼던 찻스버니도 이미 지적했듯이 그것은 이미 예견되어 왔던 것이다.
그 후, 새로운 포르테피아노의 개발 및 개량이 한참 진행된 19세기였던 만큼 아르페지오네는 볼륨이라는 물리적인 측면에서 반주 악기인 포르테피아노와 동등한 혹은 우월한 위치에 절대 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음량이나 기술적인 측면을 떠나 역간 목이 쉰 듯 어슴푸레하게 들리는 아르페지오네의 울림에서 우러나오는 향기만을 생각한다면, 너무나 매력적인 악기임에 분명하다.
     
Daniel Shafran and Felix Gottlieb in London 1978
     
다닐 샤프란 (Daniil Shafran)
Daniil Borisovich Shafran (Russian: Даниил Борисович Шафран, January 13, 1923, Saint Petersburg – February 7, 1997, Moscow) was a Jewish Russian cellist.
샤프란은 1923년 1월 13일 페트로그라드(Petrograd, 후에 Leningrad로 개명됐다가 다시 옛이름 St.Petersburg로 돌아간다)에서 태어나, 6살 때부터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첼로 수석이었던 아버지 보리스로부터 첼로를 배우기 시작하여, 2년 뒤부터는 어린이를 위한 특수 음악학교에서 알렉산더 쉬트리머(Alexander Shtrimer, 1888 - 1961)에게 사사했다. 이듬해,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입학이 허가되고 그 해에 음악원에서 "물레젓는 노래"등 2곡을 연주했다. 샤프란이 대중들 앞에서 한 첫연주였다. 이어서 1933년(10세)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을 연주했다.
14세 때(1937년) 전(全)소련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콩쿠르 요강에 따르면 샤프란의 나이가 응모자격이 없었지만 콩쿠르 운영위원회가 특별히 응모를 허가했던 결과였다. 이때 부상으로 받은 1630년도에 제작된 아마티를 받아 그 이후 평생 사용한다.
레닌그라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1943년에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솔로이스트로 임명되고, 그때부터 샤프란의 본격적인 연주경력이 쌓이기 시작한다. 1946년엔 에네스쿠와 루마니아에 가서 연주회를 갖고 바흐, 하이든, 베토벤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부다페스트의 "평화우호축제 콩쿠르"(1949년), "프라하의 봄 국제 콩쿠르"(1950년)에서 로스트로포비치와 공동 우승했고, 그 후 런던에 데뷔하고, 1960년에는 카네기홀 데뷔 리사이틀을 가져 미국에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71년에는 소련에서 수여하는 인민 예술가 상을 받았다. 1974년 6월, 연주가로서는 대단한 명예였던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의 첼로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54년, 카발레프스키(Dmitry Kabalevsky)의 첼로 협주곡 제1번을 녹음한 음반이 발표됐다. 이 음반의 반응이 성공적으로 나타나자 작곡자는 제2번 협주곡을 써서 샤프란에게 헌정했다. 1959년엔 로마의 '국제 예술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샤프란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곡 연주에 몰입하기에 이른다. 1960년에 뉴욕 카네기 홀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과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소나타 등을 연주하고, 이들 레퍼토리를 RCA 레이블로 녹음하기도 했다. 샤프란 최초의 스테레오 녹음으로 기록되는 음반이다.
1962년엔 하차투리안의 첼로 협주곡을 모스크바 음악원강당에서 연주했고, 1965년엔 자기에게 헌정된 카발레프스키의 협주곡 제2번을 협연했고, 처음으로 일본에 가서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제2번을 도쿄 심포니와 협연하고 리사이틀도 가졌다. 프로코피에프, 슈베르트,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을 연주했는데 이때를 계기로 일본에서 샤프란 신드롬이라고 할만한 대단한 바람이 일어났다. 이무렵의 일본 미디어들도 샤프란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는데, 이를 접한 국내의 일부 매니아들에 의해서 샤프란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졌다. 그러나 상당한 부분은 심하게 과장되기도 했고, 지나치게 이 연주자를 미화하거나 신비로운 존재로 부각시키도 했다. 그무렵 우리나라엔 소련 연주가들의 음반수입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더더욱 이 연주가에 대한 정보가 부풀려지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다. 샤프란은 1974년과 1976년에 다시 일본에 가서 드보르작의 협주곡과 카발레프스키의 협주곡 제2번, 생상스의 협주곡 제2번을 NHK 심포니 등과 협연하고 독주회도 가지면서 또다시 샤프란 바람을 일본에 일으켰고, 그 바람이 역시 한국 매니어들에게도 분다. 여전히 그의 음반은 수입이 금지된 상태였고, 그래서 샤프란은 점점 더 신비로운 존재로 부각된다.
1995년과 1996년에는 피아니스트 긴스버그(Anton Ginsburg)와 런던의 위그모어 홀에서 몇 차례 연주회를 갖고 쇼스타코비치와 프랭크, 벤자민 브리튼의 작품을 연주했다.
1997년 2월 7일 러시아에서 74세라는 생애를 마감했다.
샤프란이라는 이름은 상대적으로 로스트로포비치에 비해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공산혁명 후 이념적인 문제로 소련을 떠나 서방에서 활동한 로스트로포비치와는 달리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러시아 등 동구권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만큼 서방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공산권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폐쇄적인 태도들까지 겹쳐서 결과적으로는 아주 고고(孤高)한 존재인 것처럼 서방세계에 인식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세련미가 대단하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서정성과 아름다움이 그의 연주에서 느껴진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스케일이 크고 열정적이고 외형적으로 화려한 연주를 했던 반면, 샤프란은 소박하고 따스하고 내면적으로 깊은 사색에 잠긴 연주를 들려주었다. 따뜻한 음향을 좋아한 과거 LP 수집가들에게 샤프란의 음반이 중요한 수집 목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매력 때문이었다. 외향적이고 박력 있는 연주를 들려주는 로스트로포비치에 비해서 샤프란은 비교적 악보에서 자유로운, 낭만적이고 주관적인 연주를 들려준다는 평가를 들었다.
샤프란은 깊은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진지한 연주자의 길을 걸은 철학적인 연주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새삼스레 그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는 많은 매니아들이 생겨나고 있고, 심지어는 첼로의 황제인 카잘스에게 비교될 수 있는 유일한 첼리스트라는 과격한 표현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물론 다닐 샤프란은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첼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빈약한 관계로 여전히 사실보다는 훨씬 과대포장된 상태로 '신비의 첼리스트'로 남아 있다. 언젠가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는 “만약 당신이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에 감동을 받았다면 샤프란의 연주를 들을 때까지 기다리시오”라고 하면서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첼리스트가 러시아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했었다.
샤프란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참고해야 할 음반은 바흐의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첼리스트의 정신과 기교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이유도 있겠고, 모든 연주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도전하는 곡이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역시 샤프란의 깊은 내면 세계가 이상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닐 샤프란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연주에 본격적으로 어프로치하게 된 것은 1950년대 후반으로 그의 나이 30대 중반을 지났을 때의 일이다. 연주가로서의 경험이나 정신적 깊이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면서 이 심오한 음악에 자신만의 특별한 영혼을 불어넣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1997년 74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연주자로서의 그의 삶에 있어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지고의 예술적 이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샤프란은 끊임없이 청중들 앞에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하며 서서히 이 작품해석의 완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 결과 젊은 시절의 열정과 경외감에 삶의 무게를 실어 깊고 웅혼한, 그야말로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를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샤프란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의 40대인1969-1974년 사이에 소련의 국영 레이블인 멜로디아에서 녹음 발매했던 전곡녹음으로 LP시대에는 전설적인 명반으로 여겨졌던 유명한 연주이다.
샤프란은 대단히 열정적인 성격이면서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심한 낯가림을 할만큼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레슨도 꼭 자기 집이나 제자의 집에서 했다. 학교에서 레슨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무대에서 연주할 때, 그가 사용하는 의자는 아주 높았고, 항상 의자의 맨끝 부분에 걸터앉듯이 앉아 연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