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김응환(金應煥1742~1789) 작품세계 

산야초 2016. 3. 23. 23:04

김응환(金應煥1742~1789) 작품세계

 

 

강안청적도(江岸廳笛圖)


이 작품은 일찍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게재되어 김응환의 그림 중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었던 편화이다.

중앙에 접혔던 자국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화첩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마일각(馬一角)의 변각구도로 오른쪽에 무게를 둔 쌍구(雙鉤)의 노송과 , 그 아래서 동자를 대동한 인물이 나귀에서 내려 쉬며 강 건너편을 응시하고 있다.

노송과 그 아래 인물의 현격한 크기의 차이는 화면의 깊이와 거리감을 부여해 준다. 수묵 위주의 명확한 선묘(線描)와 두드러지지 않는 담청의 수면은 화면에 신선감을 준다. 그림 내용이 전해주는 시적(詩的)인 분위기는 이 그림의 격조를 고조시킨다.

화첩 종이에 수묵 담채 20.7*37.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해암전도(海嶽全圖)


김응환은 정조의 명을 받아 내외금강산을 두루 사생(寫生)하고 돌아왔으니 이 그림은 금강산 화첩 중 한 장이다.

화면을 모두 충만하게 채운 포치(布置)법이라든지 활윤한 필치의 특유한 분위기는 이 화첩의 독자적인 신선한 감각을 이루고 있다.

골산(骨山) 연봉(連峰)은 호분채(胡粉彩)를 했으며 작은 인물들은 윤곽만을 가볍게 선묘했다.  

 화첩 비단에 수묵 담채 32*42.8cm

 

서울 개인 소장

 

 

 

 

 

헐성루(歇惺樓)


이 작품은 김응환이 타계하기 1년 전인 1788년 정조의 명에 다라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금강산첩>에 속해 있다. 이때 동행한 김홍도는 <금강사군첩>을 남겼다.

<헐성루>는 화면을 상하로 양분하여 상단에 원경과 골산(骨山)을 정선 화풍으로 그리되 호분(胡粉)을 입혔고, 하단에는 중앙에 누(樓)를 포치시키고 그 주변의 경관을 나타냈다. 중경에 나타난 기석(奇石)의 암봉에선 선염(渲染)에 의한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실경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중국풍의 화본(畵本)식으로 그렸으며, 이 인물과 건물의 비례도 어색함이 보인다. 정선의 여맥(餘脈)이 간취되며, 강세황의 실경 산수와의 연관도 보이고,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종손 김하종의 <금강산화첩>과 비교할 때 가전(家傳) 화풍으로서 또 다른 짐작을 가능케 한다.   

화첩 비단에 담채 32*42.8cm

 

한국 개인 소장

 

 

 

금강산 연주담도(連珠潭圖) 견본 담채, 32?2.8 cm, 개인 소장

 

 

〈연주담도〉는 금강산의 명승 가운데 하나인 연주담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1788년에 김응환이 그린 〈금강산 관동팔경도첩〉에 실려 있는 그림들 중의 하나이다.

명승을 유람하면서 거기서 받은 인상을 그림으로 그린 기행첩은

김응환의 기행첩 외에도 강세황의 〈송도기행첩 松都紀行帖〉,

정선의 〈장동팔경첩 壯洞八景帖〉과 〈경외명승첩 京外名勝帖〉 등이 현존하고 있다.


이들 기행첩은 단순히 경치를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유람을 통해 받은 인상이나 느낌도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행가사(紀行歌辭)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강세황이 그의 〈영통동구도〉에서 화제를 통해 자연 경관을 본 소감 등을 피력하고 있는 것도

기행첩의 이런 성격을 말해 주고 있는 사례라 하겠다.

 

 

금강전도(金剛全圖)  견본담채. 22.3×35.2cm ◈ 박주환 소장

 

그림의 우측 상단에 「歲壬辰春 擔拙堂爲西湖 倣寫金剛全圖」라는 그의 발제로 보아 1772년 김응환이 만 30세 되던 해에 정선의 금강전도를 모방해서 후배 화원인 김홍도에게 그려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금강전도는 대향봉, 소향봉, 금강대를 중심으로 금강산의 명찰인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순으로 앞쪽 좌측에 대각선을 이루고 있으며, 멀리 둥그스름한 비로봉, 중앙에 솟은 혈망봉, 중향성 등이 눈에 띈다.

반조감법의 시점과 타원을 이룬 구도, 미점으로 처리한 토산과 수직의 개골산은 겸재의 화풍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부족하여 역시 겸재를 계승했지만 겸재의 수준을 뛰어넘지는 못하였다.

 

 

김응환(金應煥1742~1789)

 김응환은 영. 정조대에 활동이 두드러진 화원으로 벼슬은 별제(別提)를 역임했다. 그의 자는 영수(永受)이고, 호는 복헌(復軒) 외에 담졸당(擔拙堂)이 있다. 그의 가문에서는 많은 화원들이 배출되었다. 김득신, 김석신, 김양신의 세 조카들을 위시하여 장한종. 이명기는 사위이고 종손 김건종과 김하종도 화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응환은 불과 3년 연하인 김홍도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세 때 김홍도에게 그려 준 <금강산도>가 유존(遺存) 되고 있으며, 정조 12년(1788) 봄에 왕명으로 내외금강산을 탐승하여 화폭에 옮겼는데, 이 당시 김홍도도 동행했다. 현존하는 김응환의 작품은 전칭을 포함하여 20여점이 알려져 있는데, 한 폭의 운룡(雲龍)을 제외하고 모두 산수화들이다.

세상에 전해진 그의 진적이 매우 드물어 그의 대표적 화풍을 종잡기는 어려우나 그 시대 산수화 가체에 두루 빼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일본에있는 <강람승람도>를 제외하곤 50cm 이내의 편화(片畵)들이다. 대체로 실경산수와 더불어 남종화풍의 산수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