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일본인이 쓰는 조선통신사 길

산야초 2016. 4. 7. 23:45

일본인이 쓰는 조선통신사 길

고달픈 역마을엔 온갖 ‘민폐 유숙’
역졸·역노비 항상 중노동에 시달려 … 온전하게 남은 곳 하나 없는 역촌 안타까움

1930년대의 담배 건조 장면. 담배농사는 농가의 중요한 부수입원이었다.

6일(경인) 맑음, 숭선(崇善)에 닿았다.

경기 안성시 죽산읍부터 잠시 동안 목장 지대로 뻗은 옛길을 간다.

 

 

마치 북유럽을 여행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목초지가 이어진다. 광암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지방도를 따라 지평선까지 길게 뻗은 돌담도 보인다.

 

 

‘서일농원’이라는 개인농장인데, 직접 재배한 청정 야채와 손수 만든 된장·청국장으로 한정식상을 차려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돌담 안쪽으로 항아리가 끝없이 이어진 엄청난 장독대를 보니, 정말 이곳이 한반도가 아니라 드넓은 대륙 한가운데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장관이다.

 

 

교통 편리 집값 뛰는 요즘과 정반대

여기에서부터 옛길은 지방도를 따라간다. 처음 이 길에 왔을 때는 시외버스가 규정 속도의 두 배는 족히 넘을 듯한 속도로 질주해서 걸어가기에 위험천만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차들이 빠져나가 옛길의 정취가 그대로 남은 지방도를 한결 여유 있게 걸을 수 있게 됐다.

 

 

지방도를 따라 계속 걷자 길은 다시 옛길로 접어든다. 언덕을 다니던 길은 어느새 깊은 골짜기로 이어진다. 길 위로 흐른 침식물이 수백년 동안 땅을 파내 이런 독특한 지형이 생긴 것이다.

 

 

정오에 무극촌에 도착하니 여주목사 이시중, 안성군수 박호원, 음죽현감 박동최와 음죽 충주 두 곳의 일가 15~16인이 보러 왔다.

 

 

‘무극촌’이란 조엄이 통신사행을 떠났던 당시 음죽현(현 이천시의 일부) 무극면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면은 일제시대 이후 개편된 면보다 규모가 작은 게 보통이었다.

 

 

 

면의 중심지는 으레 교통이 편한 곳에 있어서 오일장도 함께 서는 경우가 많았다. 세곡을 거두는 사창(社倉)도 같이 있었다. 면의 목적이 주로 백성들의 관리, 특히 세곡의 관리에 있었던 점에 비춰보면 이것은 당연한 일인 듯하다.

 

 

역졸·역노비 항상 중노동에 시달려 … 온전하게 남은 곳 하나 없는 역촌 안타까움


조엄 시절 무극의 중심지 근처에 있던 ‘관촌’이라는 마을은 지금도 있다.

 

 

 

‘관(館)’이란 역 근처에 있던, 지위가 높은 공무여행자를 위한 숙소를 일컫는 말.

 

 

조엄처럼 굳이 묵지 않고 점심만 먹고 지나가기도 했지만, 어쨌든 지금 필자가 지나는 곳은 과거에 무극역이 있던 장소다.

 

 

 

조선시대 역마을 사람들의 삶은 고달팠다. 역을 통제하는 관리(역리) 아래서 일하는 역졸이나 역노비는 항상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통신사나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한 역은 더욱 심했다. 이들은 노동에 대한 봉급을 받지 못했고, 대신 ‘역전(驛田)’이라 불리는 논밭을 배정받아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 역노비는 말 그대로 천민이지만, 역졸은 양민 계급이었음에도 거의 천민 취급을 받았다.

 

“여기가 양반촌은 아니었지.”

 

관촌에서 만난 영감님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일견 자학(自虐)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말투만은 당당했다. 

 

 

 ‘이 마을은 높은 사람들을 모시고 말을 쉬게 하는 마을이었다’며  마방(馬房) 터 등 마을구석구석을 안내해주는 분들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직업에 귀천은 없으며, 어떤 전통이든 그것에 대해 자랑스레 생각한다면 진정 자랑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말씀해주시는 듯했다.

 

 

 

사실 역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통이다. 아직 시설이 남아 있다면 문화재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역을 낮춰본 조선시대의 ‘악습’ 때문인지, 유독 한국에는 제대로 보존된 역촌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다.

 

 

 

충청도 달천 수계 ‘장자울마을’ 통과

보통 큰길가에는 양반촌이 없다. 대로를 통해 들어오는 전쟁, 거대 행렬, 전염병 등 온갖 민폐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길가에 있는 것은 길 자체를 상대해야 하는 마을뿐이었다.

 

 

역촌, 주막촌, 원촌, 시장촌 등이다. 그래서 길가 마을은 풍수적 택지와 무관하고, 반촌(班村)에 비해 사회적 평판도 낮은 경우가 많았다. 요즘 교통이 편리한 아파트일수록 비싼 값이 붙는 것과 정반대였다.

 

 

오늘날 면 소재지인 충북 음성군 생극면(곤지애)을 지나자 길은 3번 국도와 합류하면서 지금까지의 목가적인 구릉지대를 벗어난다.

 

 

큰 산이 눈앞에 병풍처럼 다가온다. 여기부터 청미천 수계에서 달천 수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차피 크게 보면 양쪽 다 남한강 수계이지만 길의 모양새에는 분명 큰 차이가 난다.

 

 

이제 길은 국도와 갈라져 작은 농도로 들어섰다. 충북 충주시 신니면에서 ‘장자울고개’를 넘어가는데 도중에 길이 끊긴다.

 

 

길이 아닌 곳을 한참 헤매다 고갯마루를 지나 ‘장자울’이라는 마을을 통과했다. 곰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심산유곡이다. 흙벽돌로 지어진 집들과 담배건조 창고가 보인다.

 

 

반 이상 무너져 있는 모양새를 보면 아마 상당수는 폐창고인 것 같다. 정부가 농가의 부수입 증가를 위해 담배 농사를 장려했던 흔적이다. 이런 모양의 창고는 충북과 강원도 영서지방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온전하게 남은 곳 하나 없는 역촌 안타까움




오랜 세월 흘러내린 빗물로 깊이 파인 옛길. 경기도 안성시 죽산읍에서 이천시로 향하는 길이다. 충북 충주시 장자울마을에 남아 있는 흙벽돌 집(위부터).

저녁에 숭선촌에 닿으니 문의현감 김성규, 진천현감 윤득열, 제천현감 이영배, 연원찰방 이익섭과 유촌의 일가 6~7인이 보러 왔다.

 

 

충북 충주시 신니면 숭선마을은 ‘대동지지’에 ‘숭선참(站)’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참’이란 조선시대에 파발(긴급한 군사통신을 위한 특수한 역제)을 위한 역을 가리키는 말인데, 가끔 ‘원’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숭선참은 후자에 속한다.

 

 

 조엄 외에도 역대 통신사가 쉬거나 묵어가는 경우가 많았으니, 나름의 격식을 갖춘 시설이 있던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숭선참이 용안역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옛 지도 등을 참조해보면 가까운 위치이긴 하나 이 두 곳은 엄연히 다른 시설이다.

 

 

 

과거 숭선참이 있던 숭선마을은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물밑에 있기 때문이다.

 

 

일제 말기에 생긴 신니저수지 때문이다. 물밑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싶어 저수지에 올라갔지만, 한겨울 깊은 얼음 탓에 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도를 찾아보니, 저수지로부터 북쪽 깊은 골짜기 끝에 ‘숭선’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어르신께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수몰된 마을에 살던 이들이 집단으로 이사를 해 만든 동네라고 한다. 마을 할머니들은 강제 이전당했을 때의 이야기는 잘 해주셨지만, 통신사나 옛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도도로키 히로시/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hst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