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김대중 친일“그리고 친일파 박정희”

산야초 2016. 12. 19. 23:19
김대중 친일“그리고 친일파 박정희”
軍을 버린 김대중은 장례식 참석을 외면한 채 검은 리본은커녕.
최종편집  2012.06.21 00:14
기고논객 대마왕 (press@frontiertimes.co.kr)기자의 기사 더보기    

    

金大中 親日인가


집권 후 측근들과 좌익언론을 총동원해 원수보다 더 싫은 故박정희 前 대통령을 끊임없이 친일파로 음해한 金大中은 과연 친일사상과 전력에 흠이 없는 깨끗한 者인가.


'센세이 아노 도요다 다이쥬 데스요'


김대중이 대통령 당선 후 목포상고 왜놈 스승 '무쿠모토 이사부로'에게 달려가 저처럼 정중하게 인사말을 올렸다. 왜놈 스승 이사부로는 조선총독부 교육청 훈도담임선생으로 일제강점기 말까지 우리 민족에게 황국신민조선을 교육시켜 민족얼 말살에 나섰던 전형적 침략주의자다.


김대중은 중.고 교육 모두를 일제교육청소속 학교에서 받아 日語가 자유로웠다. 졸업 후 왜놈이 경영하는 목포해운회사에 들어가 뛰어난 일본어를 앞세워 사주를 구워삶은 덕에 징용. 입대 모두 피할 수 있었고 종내는 젊은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게 된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시절 민족원흉 히로히토가 저 세상으로 갔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전두환 前대통령은 일왕 조문을 꺼려했으나 金大中은 일본대사관 뒷문을 통해 몰래 들어가 90도로 깍듯이 조문을 했다.


▼=민족수탈의 원흉 히로히토 영정 앞에서 90도로 꺽고 있는 다이쥬(大中) 총재


 


그 누구의 조문강요도 없었고 일본정부의 공식조문 요청도 없었으나 김대중은 끝내 조문을 갔고 이것이 경향신문에 포착되어 1989. 1.9일 사진과 함께 특종보도 됐다. 민족수탈 수괴에다 전범 총책임자에 대한 조문행위는 국민정서에 반하는 명백한 親日행위다.


이런 김대중이 1998년 정권을 잡은 후 공식적인 일본방문을 앞두고 아키히토 일왕의 정부공식호칭을 천황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 국내의 반대여론과 논란이 많았으나 김대중이 강력히 밀어붙여 1998.10월 방일을 앞두고 천황으로 공식 명명하게 됐다. 실로 믿기 어려운 도발적 親日이다.


김대중은 일본 공식방문 중 왜놈들과 입을 맞춰 독도해역 반을 즉시 일본에 넘겨준다. 신한일어업협정 이라는 망국적 간판 아래 독도를 포함 울릉도 33해리까지 한국.일본이 공동 관리하는 수역을 확정해 우리 영해의 주권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스스로 포기했다. 일본에게 독도 침탈 빌미를 제공한 이 굴욕적 협정은 친일부역(親日附逆) 행위나 다름없다.


어민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어선 700여척이 헐값에 강제 폐선 처리됐으며 가수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 노랫말은 금지곡으로 독도주권과 대한민국자존심을 지켜주지 못하고 사라졌다.


민족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를 일본과 뒷거래한 돈으로 건설한다 하여 공사 현장에 달려가
자빠져 누워 시위에 가담했던 金大中. 여기서 대한해협을 일본에 팔아넘겼다는 음해까지 나왔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대한해협은 물론 독도에 관한 자주권에도 완고해 일본외교부장이 2억불을 들고 찾아와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헛소리하는 것을 박대통령이 무례한 외교관이라 소리쳤다.


이어 대통령은 차라리 독도를 부숴버리겠다며 호통을 쳐서 쫓아냈고 결국 독도는 우리 영토로 온전히 보존되면서 오히려 태평양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수탈한 피해보상금 총 8억불을 받아냈다.


2002년 6.29일 제2연평해전 발발 당시 북방한계선(NLL)에 무력도발 징후가 있어 함대사령관의 선제사격 요청이 있었으나 김대중은 북한이 공격할시 반격하라는 어이없는 교전수칙을 하달했다. 국군통수권자로서 본분을 망각한 김대중의 교전수칙에 손발 묶여 싸운 우리 장병들은 故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 6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교전 중 손발이 잘려나가는 처참한 공격을 당해야 했다.


바로 다음날 우리 軍을 버린 김대중은 장례식 참석을 외면한 채 검은 리본은커녕 빨간 넥타이를 매고 일본으로 건너가 왜왕 아키히토 내외와 함께 월드컵 결승전을 보며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일왕을 '천황'으로 고쳐 부르게 지시한 후 방일해 붉은 넥타이를 매고 아키히토와  2002 월드컵 본선을 관람하는 도요다 다이쥬(金大中). 대통령



조국을 위해 산화한 장병들 영결식에 정부관계자 단 한명도 참석치 않았고 5일장을 3일장으로 축소한 후 대통령장이 아닌 해군장으로 결정 장병들은 마지막 가는 길까지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서해교전을 제2연평해전으로 명명하고 매년 국가보훈처가 기념식을 주관하는 정부주관행사로 격상시켜 비통한 눈물로 살아온 유족들의 아픔을 뒤늦게나마 어루만졌다.


김대중 집권 중인 2002. 9.7일 상암동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진 남북통일축구경기. 주최측은 방임된 공권력 속에 입장하는 관중들로부터 태극기를 압수하고 대신 한반도기(좌익 깃발)를 손에 쥐어주면서 조국의 태극기가 쓰레기처럼 굴러다니고 구석으로 쌓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래서 전쟁광 김일성이 뒈지기 전 의형제와 다름없는 김대중을 확실히 믿은 나머지 '남한은 한 세기가 지나기 전 총 한방 안 쏴도 공산화 할 수 있다'라며 자신감을 보인 것이다.


으리으리한 동교동 아방궁부터 김대중광장. 김대중도로. 김대중광주홀. 김대중역. 김대중백화점. 김대중박물관. 김대중도서관. 김대중미술관. 김대중기념관, 김대중컨벤션센터. 그리고 나라곳곳에 수없이 세워져 있는  어마어마한 김대중의 동상과 흉상들.


드러나고 확인된 진성 親日 金大中!


金大中에 비해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는 바보 대통령 두 사람. 공산당이라면 무조건 때려잡은  故이승만 건국대통령.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일괄하며 김일성에게 무조건적 사과를 받아낸 위대한 민족지도자  故박정희 대통령.


박대통령은 좌파집권 후 親日이라는 수식어가 꼬리를 물었으나 실제 패전국 일본제국주의에 감화. 귀속. 귀화되는 것을 상당히 경계하는 냉철한 구석이 있었고 일본과의 다변화 접촉을 받아들이는 이면에는 국익창출 포석이 언제나 깊게 깔려있었다.


두 분의 투철한 반공정신 정기가 온전히 이어져 오며 살아 숨쉬는 이 나라. 대한민국이 아직 공산화 되지 않은 절대적 이유임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정희의 親日 한일국교 정상화


1964년 3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국교 정상화를 마무리 지으며 “우리는 긴 안목으로 대국을 내다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고독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 더욱이 극동에 몰아치고 있는 차가운 국제정세 속에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여야 할 것입니다”라며 대 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 위대한 결단은 대한민국을 1조 달러의 무역대국으로 달려 가는 노둣돌이 되었다.


이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충심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넉넉한 세월임에도, 아직까지도 박정희 대통령을 일본과 굴욕외교를 맺은 매국노로, 일본에서 정치자금을 받은 친일파로 매도하고 있다. 심지어 독도를 팔아먹고, 월남 파병용사의 수당을 착복하고, 정신대 할머니 배상금을 빼앗은 파렴치한으로 손가락질 하는 우매한 무리들이 있다.


한일회담은 장장 14년 동안 밀고 당기며 신경전을 벌린 국가 간의 전쟁이었다. 이승만과 장면 정부에서 9년간 회담을 벌렸지만 별반 소득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5년 만에 협상을 마무리 짓고 다시는 쓰라린 역사를 되풀이 않겠다며 어금니를 물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5개국이 대일청구자금을 받았고, 우리는 그렇게 일본으로부터 받은 유, 무상 대일청구자금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종자돈이 되어 오늘을 있게 한 불꽃을 피웠다. 그러나 여타의 나라는 먹고 쓰는데 소비하고, 3류 국가가 되어 아직도 가난 속에 인권탄압이 횡행하는 독재국가로 남아있다.


대일청구자금이 가장 많이 쓰인 곳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이자 견인차였던 포항제철 건설(대일청구 자금의 24%에 이르는 약 1억2천만불)이다. 그 외 전액,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다목적 댐, 철도시설 확충, 화력발전소 건설, 상수도 확장,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기계시설, 홍수경보시설 도입, 농업증산, 과학기술 개발과 기술교육 진흥 등 대부분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투입되었다. 수년, 수십 년 지나야 이윤이 창출되는 사회간접자본에 투자 했다. 아사자가 속출하던 그때, 당장의 끼니가 아쉬운 당시, 일시적이라도 고픈 배를 채워주는 것이 통치자로서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끌어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인의 신앙인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다.


유신헌법으로 법조인이 된 것이 부끄럽다며 몽니를 부리던 노무현 정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등감을 풀기 위하여 박정희 죽이기에 나섰다. 살아있는 권력이 임명한 현직 관료와 권력이 선발한 코드인사를 통해 마녀사냥단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심사반”을 동원하여 3만5천장이 넘는 관련서류를 뒤졌다. 그러나 박정희 죽이기 도부수들은 “한일협상은 국익유지와 옹호를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라고 참회했다.


그들의 확인에 의하면, 한일협정에는 일제의 불법인권 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귄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 정신대 문제는 우리뿐만 아니라 필리핀, 태국, 대만 등 다수의 국가에 피해자가 산재하며, 아직까지 일본정부는 뻔뻔한 낮짝으로 배상을 회피하고 있다. 단 한 번도 정신대 배상을 한 적이 없다. 월남 파병 장병에 관한 문서도 공개 되지 않았는가. 파월 장병의 해외근무수당은 미 군사고문단이 결산하였기에 전용의 여지조차 없었으며, 우리보다 잘살던 필리핀, 태국 파월장병과 대등하게 해외근무 수당을 받았으며, 단 한 푼의 수당도 전용되지 않았음이 밝혀지지 않았는가.


▼=이른바 이승만 라인으로 명명된 대한민국 해역(독도가 포함된 붉은색선 모두)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협정 서명을 코앞에 둔 65년 주일대사에게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의 융통성도 허용하지 말라”며 엄명을 내렸다. 굳건하게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임을 확인하였으며 우리의 경제적배타수역에 두었다.  독도를 한일공동어로수역으로 팔아 넘긴 것은 김대중 정권이며, 그것을 묵인한 정권은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노무현 정권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독도를 박정희 대통령 탓을 하고 있는가. 적반하장도 유만부득이다.


▼=도요다 다이쥬가 일본과 체결한 '신한일어업협정'으로 독도 해역을 일본과 공동(중간수역) 관리하게 된다. 협정 이후 일본은 자국 지도에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발빠르게 표기했다. 당시 노무현이 해양수산부 장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배워 산업화의 불꽃을 피워 올리는 중국은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 만약 8년만 늦게 산업화가 시작되었다면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대일청구 자금을 종자돈으로 산업화의 활화산을 터트리지 않았다면, 오늘날 쌀, 보리 팔아 첨단 일제 공산품 사들이고, 빛 갚느라 제 2의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김일성 친동생 김영주는 알려진바 왜놈 헌병 꼬봉이었고, 군부 요직까지 친일파가 득세했다. 그러함에도 북한을 향해 친일파라 감히 입도 뻥끗 못하면서 어디라고 감히 박정희 대통령에게 손가락질 하고 있는가.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프런티어타임스(www.frontier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