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 북한산 자락 아래 새롭게 조성되고 있는 한옥마을의 풍경이 익숙한 듯 낯설다. 수십 채의 2층 한옥이 마을을 이뤘다. 전통 한옥마을의 단층집 풍경과 사뭇 다르다. 서울시가 2012년부터 분양해 현재 모두 ‘완판’된 은평 한옥마을이다. 총 156개 필지 중 3분의 1가량에 집이 지어진 상태다. 전부 완공되면 서울시내 최초의 2층 한옥 마을이 탄생하게 된다.
도심 한옥은 지금 진화 중
은평 한옥마을 1호 지은 배윤목씨
“전통 가옥에 현대적 시설 겸비
질리지 않는 미인과 사는 기분”
59㎡ 땅에 올린 서촌 ‘1인 한옥’
마당·다락·부엌까지 다 갖춰
“집 작아도 특별해서 좋아요”
은평 한옥마을에는 2층 한옥을 지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필지 크기는 각각 135~410㎡(약 40~120평)다. 서울시는 땅의 절반에 건물을 지을 수 있고(건폐율 50%), 건물의 바닥 면적을 합하면 땅 크기만큼(용적률 100%)이어야 한다고 정했을 뿐이다. 그래서 수요자들은 용적률을 최대한 채울 수 있는 2층 한옥을 선호하고 있다. 시장의 자연스러운 선택이 한옥의 현대화를 실험하는 장을 만들었다. 건축가 황두진(황두진건축사사무소 소장)은 “과거 평양에 2층 주거 한옥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은평 한옥마을은 거의 100년 만에 2층 한옥이 마을을 이룬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비어 있는 궁궐이 아닌, 살고 있는 집으로서 도심 한옥은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 현대인의 삶터로서 한옥은 지속 가능할 수 있는지, 다양한 시도가 돋보이는 현장을 둘러봤다.
서울 은평 한옥마을에 지은 2층 한옥 ‘목경헌’.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은평 한옥마을의 1호 살림집이다. 2015년 6월 완공했을 때만 해도 허허벌판에 우뚝 선 2층 한옥으로 주목받았고, 한옥 관련 여러 상을 휩쓸면서 동네의 모델하우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목경헌’은 지난해 대한민국 한옥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최근 서울우수한옥으로 꼽히기도 했다. 현대인의 삶을 담는 그릇으로 한옥이 진화한 사례라는 데 이견이 없다.
‘목경헌’의 출입구. 목재로 짜 기와를 올리는 전통 한옥의 대문과 달리 현대식으로 재해석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목경헌’의 주인장인 배윤목(50)·허성경(50) 부부는 23년간의 아파트 생활을 접고 한옥살이를 택했다. 남편 배씨는 “주말에 집에서 쉬고 있으면 박스에 갇힌 기분이 들어 자꾸 밖에 나가 쇼핑하고 외식하는 생활을 반복했다”며 “‘이건 아니다’하던 차에 한옥마을 분양 공고를 보게 됐고 망설임 없이 바로 땅(280.3㎡)을 구입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한옥과 현대 건축을 접목한 작업을 많이 해 ‘한옥 건축가’라 불리는 황두진 소장에게 설계를 맡겼다.
안방에는 누워서도 밖을 볼 수 있게 띠창을 뒀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부부는 집의 마당을 넓게 만들어 봄부터 가을까지 거실처럼 쓰고 싶어 2층 한옥을 짓기로 했다. 노모와 아들 둘을 포함해 다섯 식구가 살기에 단층집의 밀도는 너무 낮았다. 배씨는 “과거 2층 한옥을 짓기 어려웠던 것은 궁궐보다 집을 높게 지으면 안 되는 문화적 문제와 2층에 난방을 할 수 없는 기술적 문제가 컸다”며 “현대에 와서 공간 활용을 위해 2층 한옥을 짓는 게 전통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따로 천장을 설치하지 않고 지붕 서까래를 드러낸 주방.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부부는 ‘목경헌’을 지으면서 방 안 어디서든 서까래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건축가에게 요청했다. “한옥 내부의 백미는 서까래”라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방마다 천장을 따로 설치하지 않고 서까래가 드러나게 했다. 2층의 경우 양 끝에 두 아들의 방을 작게 두고 나머지를 비웠다. 그 덕에 1층 거실에서 2층 서까래가 훤히 보인다.
마치 양옥집처럼 1~2층을 통으로 뚫은 거실. 남편 배윤목씨는 “서까래를 드러낸 뒤 은평 한옥마을에서 따라하는 집이 많아졌다”며 웃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목경헌’의 부엌과 화장실은 모두 내부에, 현대식으로 설치했다. 지하도 파서 남편의 작업실이자 AV룸으로 쓴다. 지상의 목구조 공간과 달리 지하는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현대식 공간으로 디자인했다. ‘목경헌’에서 두 번째 겨울을 나고 있는 아내 허씨는 “20년 넘게 아파트에서 살면서 손님상 치른 것보다 목경헌에 살면서 치른 게 훨씬 많다”고 말했고, 남편 배씨는 “한옥이 참 아름답다. 질리지 않는 미인과 사는 기분”이라며 만족했다. 이강민 한국예술종합학교(건축과) 교수는 “전통에만 천착하다 보면 현대인의 삶을 담기 어려워지는 한옥의 딜레마를 잘 풀어낸 집”이라고 평가했다.
서촌의 작은 한옥 ‘쿠티카’는 좁은 집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샤워실과 세면 공간을 분리했다. 세면대를 화장대처럼 쓰게 하기 위해서다
서울 서촌의 59.5㎡(약 18평) 땅에 32.46㎡(약 10평)짜리 한옥을 30대 싱글녀가 지었다. 전통 한옥의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이 한 문장 안에 담겨 있다. 몇 대가 같이 사는 대가족을 위한 집, 교외의 넓은 땅에 짓는 큰 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힌디어로 작은 집을 뜻하는 ‘쿠티카(Kutika)’로 이름 지은 집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는 송문숙(38)씨는 “서촌 나들이를 하다 우연히 들어간 한옥에 반해 집까지 짓게 됐다. 아파트에서만 살아왔던 터라 한옥의 마당과 나무 냄새가 정겨웠다”고 전했다. 주차가 안 되는 좁은 골목길에 있는 80년 된 한옥을 사서 철거 후 신축했다. 그는 “형편에 맞게 작은 땅을 샀고, 지을 때 서울시에서 7200만원가량 공사비 지원을 받아 경제적인 부담을 줄였다”며 “규모가 더 크고 주차가 되는 집을 사려면 노인이 돼서야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 빨리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쿠티카’는 집 가운데 가로 2.7m, 세로 2.1m의 작은 중정을 둔 ‘ㄷ자’ 한옥이다. 집의 설계를 맡은 선한공간연구소 엄현정 소장은 “좁더라도 공간 분리를 위해 ‘ㄷ자’ 배치를 택했고, 한쪽의 층고를 높여 다락 공간을 만들어 집을 넓게 쓸 수 있게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ㄷ자 집의 한쪽 층고를 높여 설치한 다락 공간.
작은 집이더라도 생활에 필요한 것은 빠짐없이 있어야 하니 설계 단계부터 치밀하게 공간 계획을 짰다. 안방에 붙박이장을 넣어 수납 공간을 확보했다. 화장실 안에 설치하던 세면대를 밖으로 빼 다락 계단 아래 배치했다. 세면대 겸 화장대로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집의 삼면이 오래된 옛집에 둘러싸여 있어 집 짓는 과정에서 민원도 많았다. 게다가 측량 결과 앞집의 벽이 1m가량 ‘쿠티카’의 땅을 침범하고 있어 계획했던 것보다 집 면적이 작아지기도 했다. 그래도 송씨는 “최근 20평대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집들이를 갔는데 ‘쿠티카’에 비하면 너무 평범했다. 작은 한옥이더라도 특별해서 좋다”며 웃었다. 집의 시공을 맡은 서울한옥의 황인범 대표는 “한옥은 기와 빼고 대다수 자재를 맞춤형으로 제작하다 보니 일반 건축물보다 평당 건축비가 비쌀 수밖에 없다”며 “도심 소형 한옥의 경우 건축비 부담을 줄일 수 있고, 1인 가구가 늘고 세대 구성원이 점점 줄어 작은 집을 선호하는 요즘 트렌드와도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