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90년 전 일본 학자가 찍은 경주 발굴 사진 700장 공개
입력 : 2017.01.31 03:03 | 수정 : 2017.01.31 10:50
1920~30년대 노세 우시조가 경주 일대 조사하며 촬영
황복사터·헌덕왕릉 등 담겨… 경주학硏이 찾아 첫 공개
황복사터 십이지상 발굴 과정, 원원사 석탑 발굴·복원 생생
노세, 1926년 서봉총 발굴현장서 스웨덴 황태자 안내했던 수행원
경주 문화재 매료돼 연구 시작 "신라유적 보면 감격해 '감격선생'"
일제시대 경북 경주시 구황동 황복사(皇福寺)터 삼층석탑(국보 제37호) 주변에 배치된 십이지상(十二支像·12간지 동물을 형상화한 상)이 어떻게 발굴 조사됐는지 보여주는 희귀 사진이 대거 공개됐다. 지금은 경관이 달라진 신라 왕릉의 1930년대 모습, 원원사(遠源寺)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인 삼층석탑(보물 제1429호)이 발굴·복원되는 과정도 생생히 담겼다.
경주학연구원(원장 박임관)은 1920~1930년대 일본인 건축·고고학자 노세 우시조(能勢丑三·1889~1954)가 경주 황복사터, 헌덕왕릉, 원원사터 등 경주 일대를 발굴 조사하며 찍은 사진과 도면 700여장을 발굴, 30일 본지에 공개했다. 사진은 일본 나라시(奈良市)의 문화재 전문 사진회사인 아스카엔(飛鳥苑)에 유리건판 상태로 정리되지 않은 채 보관돼 있었다. 연구원은 경상북도와 사단법인 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의 후원으로 지난해 11월 노세 사진의 전면 조사 및 국내 소개를 위한 계약을 체결했고 12월 아스카엔을 방문해 유리건판 필름을 일일이 재촬영했다. 박임관 원장은 "노세가 남긴 사진 3700여장의 전모가 공개되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경주 십이지상 등 한국 관련 사진이 700여장, 나머지는 일본·중국 문화재 사진들이다.
◇신라 십이지상을 사랑한 '감격 선생'
◇신라 십이지상을 사랑한 '감격 선생'
노세 우시조는 1926년 서봉총 발굴 현장을 찾은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의 수행단 일원으로 처음 경주에 왔다. 당시 서른일곱이던 그는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교실 조수였다. 이 짧은 경주 방문이 그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경주의 문화유산, 특히 십이지상에 매료된 그는 이후 10여 차례 경주 유적지를 찾았고 사비를 털어 발굴·복원까지 했다. 동료 학자 쓰노다 분에이(角田文衛) 고대학협회 이사장은 '고고학 교토학파'라는 글에서 "노세는 열정적으로 조선 고고학과 일본 석조공예사, 회화사를 연구했다. 신라 문화재만 보면 감격을 해서 당시 경주에서의 애칭이 '감격선생'이었다"고 소개했다.
◇직접 발굴한 황복사터 십이지상 생생
그가 찍은 사진은 주로 십이지상에 집중돼 있다. 특히 지금은 땅속에 묻혀 있는 황복사 건물지 기단 터 십이지상의 발굴 전 모습과 조사 과정, 조사 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을 검토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사찰 건물 주변을 한 면씩 파 들어가면서 십이지상이 한 변에 세 개씩 방형으로 노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황복사는 경주 낭산(狼山) 동쪽에 있었던 신라 왕실 사찰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신문왕이 죽자 아들인 효소왕이 692년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탑이다. 이 교수는 "보통 십이지상은 무덤 둘레에 세우거나 탑 표면에 새기는데 왜 사찰 건물 기단에 십이지상을 배치했는지 의문이 간다. 왕릉에 쓰였던 십이지상을 옮겨 사용했을 가능성,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특별한 의례 공간일 가능성도 있다"며 "향후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십이지상 가치 처음 알아본 연구자"
◇직접 발굴한 황복사터 십이지상 생생
그가 찍은 사진은 주로 십이지상에 집중돼 있다. 특히 지금은 땅속에 묻혀 있는 황복사 건물지 기단 터 십이지상의 발굴 전 모습과 조사 과정, 조사 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을 검토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사찰 건물 주변을 한 면씩 파 들어가면서 십이지상이 한 변에 세 개씩 방형으로 노출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황복사는 경주 낭산(狼山) 동쪽에 있었던 신라 왕실 사찰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신문왕이 죽자 아들인 효소왕이 692년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탑이다. 이 교수는 "보통 십이지상은 무덤 둘레에 세우거나 탑 표면에 새기는데 왜 사찰 건물 기단에 십이지상을 배치했는지 의문이 간다. 왕릉에 쓰였던 십이지상을 옮겨 사용했을 가능성,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특별한 의례 공간일 가능성도 있다"며 "향후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십이지상 가치 처음 알아본 연구자"
1928~1931년 원원사터에 완전히 붕괴된 채 방치돼 있던 삼층석탑을 발굴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복원하는 과정도 파노라마처럼 담겼다. 석탑 터를 실측하고 발굴한 각종 부재를 모아 놓은 사진, 석탑을 복원하기 위해 가조립한 장면, 노세가 직접 그린 평면도와 석탑 모형도까지 원원사터 관련 사진만 300여장에 달한다. 헌덕왕릉과 구정동 방형분도 발굴했고, 진평왕릉·흥덕왕릉·경덕왕릉·성덕왕릉 등 신라 왕릉을 비롯해 개성 고려왕릉에 대한 조사도 병행했다. 예천 개심사지 석탑, 구례 화엄사 석탑 등의 십이지상을 최초로 주목한 것도 노세였다. 박임관 원장은 "노세는 한국 십이지상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파악하고 그와 관련한 선구적 업적을 남긴 연구자"라며 "지금처럼 정비·복원되기 이전의 신라 왕릉 옛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1920년대 말~1930년대 초 경주 유적 현황을 입증하는 기록이기 때문에 향후 연구가 진행되면 잘못된 복원·정비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을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연구원은 상반기 중 보고서를 내고 사진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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