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내음 속 '봄' 머금은 수줍은 향에 초록빛 기운이 솟아난다
입력 : 2017.03.02 04:00 | 수정 : 2017.03.02 10:47
[정동현 셰프의 생각하는 식탁](46) 냉이 된장찌개
집에는 고양이와 나뿐이었다. 부모님은 이른 아침 출근하여 집은 적막했다.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라 수업은 적고 시간은 많았다. 오후 강의를 들으러 가기 전 끼니를 가볍게 집에서 때워야 했다. 밖에 나가 밥을 먹으면 다 돈이었다. 먼저 냉동실을 열었다. 어머니가 얼려 놓은 쌀밥이 비닐에 담겨 있었다. 전기밥솥에 밥을 오래 두면 맛이 상하니 차라리 얼려둔 것이었다. 밥을 꺼내다 냉동실 저 안쪽에서 다른 색으로 빛나는 봉지가 있었다. 호기심에 봉지를 꺼내 열었다. 하얗게 김이 서린 냉이였다. 아마 이른 봄 얼려놨을 그것이었다.
무슨 기분이 들었는지 그 봉지를 꺼내 도마 옆에 두었다. 매일 내가 먹는 식단은 냉동 밥에 된장찌개, 그리고 달걀 프라이였다. 셋 다 빨리 준비할 수 있었다. 밥은 전자레인지에 데웠고 달걀은 두서너 개 깨서 팬에 지졌다. 된장찌개도 금방이었다. 김치찌개는 오래, 된장찌개는 빨리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본식으로 된장찌개를 만들 때는 물이 끓으면 불을 끄고 그다음 된장을 푼다. 된장의 향긋한 내음이 거친 열을 오래 받으면 다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 타이밍을 맞추는 나의 노하우는 간단했다. 재료를 잘게 써는 것이다. 군대에서 배운 칼질로 감자, 양파, 고추, 애호박을 얇고 작게 잘랐다. 큰 멸치 몇 마리와 다시마 한 장, 마늘 한쪽을 뚝배기에 넣고 우르르 끓였다. 감자가 몽글몽글해질 무렵 된장을 풀었다. 단단히 엉겨 있던 덩어리가 물에 흩어지며 달큰한 향이 올라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냉이를 넣었다. 차가운 냉이가 데워지고 다시 국이 끓을 때 불을 껐다. 뚝배기의 잔열로도 어차피 재료는 계속 익을 터,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어제 먹다 남아 랩을 씌어놓은 김치 종지도 꺼냈다. 간단한 상이 완성됐다. 조용한 가운데 밥을 먹기 시작했다. 때는 늦여름이었지만 얼려놓았던 냉이의 향은 여전히 쨍쨍했다. 풀을 비비면 나는 풋내와 뿌리에서 올라오는 흙냄새가 아무도 없는 집에 봄을 가져왔다.
초등학교 시절 겨울방학이 끝나고 등교할 때면 아직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산에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이 가득했다. 양지 바른 곳이면 이제 갓 새싹이 나는 시기였다. 학교가 산 중턱에 있어 작은 몸으로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면 숨이 턱턱 막혔다. 껴입은 옷은 여전히 두꺼웠지만 금세 땀이 났다. 길 옆으로 벚꽃이 막 피고 개나리가 만발했다.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그 언덕을 다 넘어갈 즈음에 보이는 것이 바로 할머니들이었다.
"저기 우리 할매 있다 아이가."
함께 하교를 할 때면 늘 할머니가 "인제 왔나 내 새끼"라고 말하며 반기던 친구가 소리쳤다. 피구를 하다 한번 공이라도 놓치면 멀리 뛰어 내려가야 했던 골목길에서 해가 질 무렵이면 할머니 손에 이끌려 가장 먼저 사라지던 친구였다. 봄이 되면 그 골목길에는 온통 '할매'들이 따온 냉이 지천이었다. 아침나절 따온 냉이를 햇볕에 말리기도 하고 다듬기도 하면서 손주들 하굣길을 기다리던 것이었다. 우리는 봄 햇살을 뚫고 길을 걸으며 냉이 내음을 맞았다. 집에 가방을 내팽개치고 들어서면 냉이 된장찌개 냄새가 나를 반겼다. 찌개만이 아니었다. 냉이를 초고추장에 무쳐 반찬으로 내놓기도 했고 때로 어머니 기분이 좋으면 노릇한 전이 되어 아버지가 술잔을 챙기게 만들었다. 날이 더워지면 자연히 냉이는 밥상에서 사라졌다. 뜨거운 햇볕 아래 어리고 여린 이파리는 사라지고 억세고 드센 것들만 남아 섬세한 향기는 날아가고 없었다. 계절이 바뀌듯 나도 나이를 먹었다. 웃자란 상추 대처럼 해가 바뀔 때마다 키가 머리 하나만큼 커졌다. 식성은 저수지에 풀어놓은 블루길, 베스처럼 먹성이 좋다 못해 흉포해졌다.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입 속에 밀어 넣었다. 목소리는 굵어지고 성격이 드세졌다. 여드름이 나고 몸 곳곳에서 털이 자랐다. 맛과 향이 강한 것을 찾았다. 고기가 아니면 배가 부르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는 술 맛을 알게 되고 긴 밤 다음 날이면 진하게 끓인 해장국을 찾았다. 군대에 가서는 단맛 나는 것이면 환장을 했다. 그러다 나는 주방 구석에 서서 향신료와 채소를 다듬으며 잊었던 여린 향기를 되찾았다.
서양 주방에서 가장 허드렛일은 설거지가 아니다. 웬만한 주방에서는 설거지하는 인력이 따로 있다. 양파 썰기, 감자 껍질 깎기도 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허브(herb) 손질은 끝이 없다. 이탈리아 요리에 빼놓을 수 없는 파슬리(parsley)는 기본이다. 고기 요리에 주로 쓰는 로즈메리(rosemary)와 타임(thyme), 연어 등 해산물 요리에 자주 등장하는 딜(dill), 파스타와 피자에 주로 들어가며 제일 잘 상하는 바질(basil), 칵테일이나 샐러드에 들어가는 민트(mint) 등 새로 이름을 외우고 조리법을 익혀야 하는 허브가 수두룩했다. 한번 다듬어 놓았다고 해서 오래가지 않으니 수시로 준비해야 한다. 덩치 큰 요리사들은 허브를 다듬을 때면 마치 꽃꽂이 교실에라도 온 것처럼 허리를 굽히고 잡담을 하면서 쉼 없이 손을 놀렸다. 거친 줄기에서 연한 이파리만 떼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다듬은 허브는 조리의 마지막 단계, 혹은 완성된 이후 요리 위에 뿌리거나 곁들이게 된다. 열 때문에 향이 날아가고 조직이 물러져 식감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나는 허드렛일인 허브 다듬기를 좋아했다. 나뿐만 아니었다. 언젠가 이웃 가게에서 하루 저녁 일을 도우러 왔던 덩치가 크고 수염에 잔뜩 난 인도 셰프도 큰 눈을 굴리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이 일을 정말 좋아해."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파슬리 줄기가 들려 있었다. 입에 머금으면 살짝 쓰지만 희미하게 레몬 향이 풍기는 파슬리를 한참 만지고 나면 내 손에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탈리아 어딘가의 풀밭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레몬 나무 아래 누워 푸른 향을 맡으며 오후 나절 낮잠을 자는 것 같은 백일몽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어두운 주방을 나와 가로등만 켜진 이국의 거리를 걸으며 그리워한 것은 어린 날 지겨울 정도로 맡던 냉이의 향이었다. 거친 흙내음을 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볼을 붉히던 수줍은 향을 머금은 냉이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사시사철 하우스에서 재배되는 허브는 잘 정돈되고 말끔한 향을 가졌다. 그에 비해 냉이는 촌스러울 정도로 향이 투박했다. 하지만 힘이 있다. 언 땅에 뿌리를 박고 찬바람에 몸을 숙여가며 초록빛을 이끌어낸 기운은 말끔하지 않을지언정 못나지 않았다. 통제할 수 없고 다듬을 수 없는 저 생명의 힘이 그 작은 몸에 있었다.
취업 준비를 하며 홀로 밥을 먹던 이십대 후반, 그 시절 나는 냉이를 듬뿍 넣은 된장찌개에 얼마나 힘을 얻었던가? 웃자라 버려 쓸모없어진 냉이 줄기처럼 몸만 커지고 나이만 들었다며 자책한 순간은 없었던가? 시간이 갈수록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연민만 많아진다. 찬란한 봄처럼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또순이네(02-2672-5545): 서울에 냉이 된장찌개 하는 곳을 찾자면 여럿이다. 하지만 이 집처럼 이름을 날리는 곳은 드물다. 소고기를 파는 고깃집이지만 유명세를 날리게 한 것은 따로 파는 냉이된장찌개다. 고기를 다 먹을 즈음에 참숯 위에 올려 끓이는 모습부터가 입맛을 돋운다. 맛은 국물이 걸쭉할 정도로 진하다. 하지만 묘하게 산뜻한 느낌을 입안에 남는다. 아끼지 않고 듬뿍 넣는 냉이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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