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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로 둘러싸인 90개 도시… 암흑이었던 유럽을 문명으로 깨우치다

산야초 2017. 4. 26. 23:11

물로 둘러싸인 90개 도시암흑이었던 유럽을 문명으로 깨우치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남쪽으로 약 100떨어진 에게해() 최남단, 넓이가 제주도의 4배를 훌쩍 넘는(8303)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 크레타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는 이 섬에 미궁을 짓고, 왕비와 흰 소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뒀다.

    입력 : 2017.04.20 04:00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 크레타

    이 섬의 뜨거운 햇빛 아래서라면,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신들의 왕 제우스라 해도.

    신화 속에서 섬의 역사는 시작된다. 봄날, 들판에서 꽃을 꺾던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에게 제우스는 한눈에 반해 버린다. 당장에 소로 변신해 공주를 등에 태우고 바다를 건너 자신이 태어난 섬에 다다른다. 그 섬에서 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제우스는 공주와의 사이에서 미노스를 낳았다. 시인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에서 노래했다. "와인처럼 진한 바다 위에 '크레타'라 불리는 비옥한 섬이 있으니, 물로 둘러싸인 그 땅 위엔 아흔 개 도시. 도시 중에 위대한 도시 크노소스가 있으니, 아홉 살 때부터 다스린 왕 미노스의 땅이라네."

    크레타의 관문인 이라클리온 항구엔 이 섬이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 지어진 해안 요새와 성벽이 굳건히 서 있다. 옛 항구엔 어선들이, 새 항구엔 거대한 유람선과 화물선들이 가득하다. /크레타=이태훈 기자
    크레타의 관문인 이라클리온 항구엔 이 섬이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 지어진 해안 요새와 성벽이 굳건히 서 있다. 옛 항구엔 어선들이, 새 항구엔 거대한 유람선과 화물선들이 가득하다. /크레타=이태훈 기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남쪽으로 약 100㎞ 떨어진 에게해(海) 최남단, 넓이가 제주도의 4배를 훌쩍 넘는(8303㎢)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는 이 섬에 미궁을 짓고, 왕비와 흰 소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뒀다. 매년 아테네가 공물로 바친 일곱쌍의 소년소녀를 이 괴물에게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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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클리온 성벽 위,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

    크레타의 관문인 항구 도시 이라클리온에서 차로 20여 분 달리면 2200㎡ 면적에 확인된 방만 1300여 개에 달하는 다층 건물 크노소스 궁전의 폐허에 닿는다.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딴 4000년 전 유럽 최초의 문명, 미노스 문명의 터전이다. 붉은 나무 기둥 사이, 중요한 방이나 문의 벽마다 '푸른 여인들'(Blue Ladies), '백합 왕자'(Prince of Lilies) 같은 이름의 거대한 색채 부조와 벽화들이 자리 잡았다. 희고 붉은 살결의 여성과 남성, 4000년 세월을 뛰어넘어 당장이라도 숨 쉬며 걸어나올 듯 생동하며 지극히 우아하고 향락적이었던 영광의 시대를 증언한다. 방문객들은 그 앞에서 압도돼 발을 떼지 못한다.

    크레타는 지도를 놓고 조금 멀리서 떨어져 보면 소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이 만나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커다란 배처럼 보인다. 고대 크레타인들은 이 섬을 터전으로 이집트와 페니키아의 선진 문물과 문자를 받아들이고, 강대한 해군력으로 바다의 교역로를 장악했다. 궁터 여기저기 남아 있는 가장 신성한 징표는 쌍날도끼 '라브리스'. 고대 크레타 사람들이 숭배했던 성스러운 소의 뿔을 닮은 이 상징에서 '라비린토스(라브리스의 집)' 즉 '미로(래비린스·Labyrinth)'라는 단어가 나왔다. 괴물을 죽여 아테네 젊은이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왕자 테세우스는 목숨을 걸고 그 미로로 들어갔다. 신화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크레타 해양 제국에 대한 본토 세력의 정복과 승리를 비유해 담은 것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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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영웅 테세우스의 신화가 전해지는 미노스 문명의 터전, 크노소스 궁전 /크레타=이태훈 기자

    영국인 아서 에번스(1851~1941)가 20세기 초 이곳에서 수많은 토기와 유물, 그리고 전설 속 크노소스 궁터를 발견한 것은 당시 세계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에번스는 토기 조각 하나 영국으로 가져가지 않았고, 사재를 털어 매입한 땅과 발굴 때 지은 집까지 모든 걸 현지 정부에 기증했다. 크레타에서 태어난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1883~1957)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크레타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첫 교량이었다. 완전히 암흑이었던 유럽을 깨우친 첫 장소도, 신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숙명적 사명을 성취한 것도 크레타였다.

    여기 크레타를 거치면서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괴이하고 꿈쩍도 않던 조각들은 작고 우아해졌으며, 그들의 몸은 움직이고 미소를 띠었다. 마침내 신은 인간의 용모와 체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 문명은 무너진 궁터만 남긴 채 사라졌지만, 그 뒤에도 미케네인과 그리스 본토인, 로마와 비잔티움, 이슬람 에미레이트와 베네치아, 오토만으로 이어지는 정복자와 제국들이 신들처럼 이 섬을 지배하고 각자의 언어와 건축물로 흔적을 남겼다. 이라클리온 시내 고고학 박물관에는 크노소스 궁터 미노스 예술품들의 진품을 비롯, 고대 이집트 영향을 받은 고대로부터 여러 제국의 흔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가는 허리와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채 손에 땅의 상징인 뱀을 쥔 '풍요의 여신'과, 지금도 그 의미를 해독할 수 없는 문자판과 화려한 그릇, 귀금속 세공품들이 나그네들에게 손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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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노소스 궁전에 4000년 전 그려진 벽화 ‘푸른 여인들’ 속 크레타 고대 여성들. 여전히 생동감 넘친다.

    "크레타의 빛으로 목욕하면 육체는 눈이 멀고, 풍요하고 충일한 영혼이 이성의 간섭 없이 올바른 길을 찾는다." 카잔차키스의 조언에 따라 새벽 여명에 길을 나서 그의 무덤을 찾아간다. 생전의 그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 같은 신성모독적 소설들을 썼던 그는, 시내에 묻히지 못하고 성벽 위 홀로 누워 있다. 에게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 허름한 나무십자가 아래 어제의 뜨거운 햇빛에 이미 늘어져 버린 들꽃 한다발이 방문객을 맞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유명한 묘비명이 새겨진 묘석 아래 카잔차키스는 앞으로도 이 도시를 거쳐 갈 제국들을 바라볼 것이다.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에 이렇게 썼다. "바다,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裸身)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죽기 전에 에게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이스탄불에서 환승해 아테네까지 간 뒤, 그리스 국내선 편으로 갈아타고 크레타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까지 가는 항공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 17시간 넘게 걸린다. 영국 런던과 맨체스터, 이탈리아 로마와 밀라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에서 크레타로 가는 운항 편수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