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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실의 에디슨'이 선보인 냉면형 밀면

산야초 2017. 5. 19. 22:59

'조리실의 에디슨'이 선보인 냉면형 밀면

입력 : 2017.05.19 08:00

[맛난 집 맛난 얘기] 한돈면가

어느 분야나 방외인이 있게 마련이다. 대전 <한돈면가> 공승택(56) 대표는 그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리실의 에디슨’으로 통한다. 대부분의 식당 주인들은 오직 ‘대박’만을 지고지선의 목표로 삼지만 그는 조금 다르다. 그 역시 매출액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남들이 생각지 못했던 음식을 창조해내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틈만 나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음식을 궁구하고 새로운 메뉴 개발을 실험해 본다. 그럴 때 그의 얼굴은 가장 행복해 뵌다.

함흥냉면처럼 가는 0.9mm 밀면

밀면은 부산의 음식이다. 한국전쟁 때 함경도 출신 피란민들과 마침 미국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원조 밀가루가 부산이라는 공간에서 서로 만나 탄생했다. 그러니 부산에서 수십 년 동안 밀면이 발전해온 것은 당연하다. 그 정도 오래됐으면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도 정착할 만한데 아직 밀면은 고향 부산을 제외하곤 의미 있게 뿌리를 내린 곳이 별로 없다.

대전 <한돈명가>의 물밀면(4900원)과 비빔밀면(5400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부산 아닌 대전에서도 밀면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와 함께 부산식 밀면을 개선한 ‘냉면형 밀면’이 과연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다.

이 집은 문을 연지 2년밖에 안 된 식당이지만 주인장 공씨의 내공과 조리 실력은 주변에서 모두 인정한다. 공씨는 이런저런 조리사들 모임에서 따르는 후배들이 적지 않은 무림의 고수다. 한식 레시피도 정량화·계량화해야 한다는 그의 외침에 공감하는 조리사들도 늘어간다.  

공 대표가 밀면을 처음 접한 것은 30여 년 전. 부산의 한식당에서 배달부로 일할 때였다. 배달을 마치고 들어오면 주방장이 연탄불 스팀으로 눌러 뺀 밀면 면발을 건네줬다. 그 면발 맛이 기가 막혔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면발은 어디에도 없다. 그가 대전에서 식당을 차린 것도 어찌 보면 ‘내 맘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밀면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평소 소망을 실현해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 집 밀면은 식감을 고려해 면의 굵기를 0.9mm로 가늘게 뽑는다. 함흥냉면과 비슷한 굵기다. 보통의 부산 밀면은 1.1~1.2mm, 평양냉면이 1.2mm인 것에 비하면 무척 가는 편이다. 함흥냉면처럼 전분이 아닌 밀가루 위주 반죽으로 이렇게 가늘게 뽑기가 쉽지 않다. 역시 오랜 실험 과정이 필요했다.

처음 1.0mm로 뽑는 데 성공했지만 만족스러운 식감이 안 나왔다. 몇 번 시도 끝에 0.9mm로 뽑았더니 면발이 엉키고 처지고 늘어졌다. 다시 실험을 거듭한 끝에 성공할 수 있었다. 면 반죽 시 특이하게도 오징어 먹물을 소량 첨가한다. 대량일 때는 검은색이지만 면에 소량 흡착시키면 연하게 푸르스름한 색을 띤다. 또 밀가루의 매끈한 성질을 상쇄시켜줘 면발의 물성도 개선해준다.

냉면육수를 닮은 대전식 밀면, 혹은 ‘대전냉면’

반죽할 때 쓰는 소금은 고가의 알칼리 강화 소금이다. 1kg에 무려 1만 원짜리 고급 소금이다. 실험 삼아 알칼리 성분이 풍부한 여러 채소들의 즙을 내어 반죽해보니 반죽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채소 즙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 대안으로 알칼리 강화 소금을 사용하는 것이다. 

밀면 육수는 한우 사골과 잡뼈, 그리고 담백한 맛을 내기 위해 돼지 사골을 약간 넣어서 끓였다. 여기에 각종 채소와 약간의 감초가 들어간다. 이렇게 뽑은 육수 맛이 부산 밀면과 가장 차이나는 점이다. 계피를 비롯한 한약 냄새가 나는 부산 밀면과 달리 맛이 깔끔하다. 냉면 육수에 가까운 맛이다. 맛이 고급스러워졌고 정성도 더 들어갔다. 차라리 ‘대전냉면’으로 부르고 싶다.

비빔면의 소스는 태양초 고추장을 기본 베이스로 했다. 처음에는 냉면 비빔장을 썼는데 면발과 조화가 되지 않아 조금씩 조정해 지금의 맛을 잡았다. 새싹, 상추, 베이비 등의 채소와 함께 비벼먹는다. 고명으로는 오이 채, 무 채, 지단과 함께 특이하게도 삶은 제주 흑돼지 안심을 찢어 올렸다.

새콤하고 매콤한 비빔면 한 젓가락 먹으니 고향집 뒤란 자두나무에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쩔쩔매지 않을 만큼 매콤하고 싫지 않을 만큼 새콤하다. 과일 갈아 넣은 단맛이 뒷맛으로 남는다.

쌀국수로 만든 콩국수도 있어, 손님 배불리 먹고 가야 맘 편해

공씨의 부친은 지금도 전남 곡성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다. 고향 노인들이 농사지은 콩을 구매해 콩국수를 만든다. 그는 콩국수를 팔 때마다 고향 어르신들께 용돈을 드리는 듯해서 뿌듯하다. 이 콩은 요즘 흔한 개량종이 아니라 토종 콩이다. 익기 전에 꼬투리가 벌어져 수확량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지만 맛은 개량종보다 훨씬 좋다고 한다.

콩물과 소금 외에 다른 첨가물은 넣지 않는다. 아주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면이 일반적인 밀국수가 아닌 쌀국수이기 때문이다. 사실 쌀가루는 반죽이 되질 않아 국수로 만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쌀국수를 파는 식당들도 대개는 건면을 사서 쓴다. 그런데 공씨는 50% 정도의 쌀가루를 넣고 반죽해 자가제면에 성공했다.

인절미처럼 우리 입맛에는 쌀+콩의 조합이 잘 맞는다. 쌀면으로 만든 쌀콩국수(6000원) 역시 구수하고 고소하다. 시간이 지나 면발이 불면 맛이 떨어지는 다른 면류와 달리 오히려 불을 수록 보들보들하고 차져서 더 맛이 좋다. 원가는 밀면콩국수(6000원)보다 훨씬 비싸지만 같은 가격을 받는다.

주인장 공씨가 기억하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할머니의 ‘삶은 보리’다. 어린 시절, 요즘 같은 봄철 춘궁기에 보리 이삭을 잘라 삶은 뒤 낟알만 빼내 소금물로 간을 한 것이다. 음식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이 삶은 보리가 그렇게 맛이 좋았다. 어쩌다 길 가던 봇짐장수나 들짐장수들이 집에 들어오면 할머니는 그들에게도 이 음식을 대접했다. 그러곤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아무리 없이 살아도 내 집에 온 손님 배고픈 채 내보내지 않도록 해라!”

세상에서 제일 낮고 겸손한 음식이지만 힘든 시절 생명을 살려낸 음식이다. 새끼들 입에 넣어주고자 할머니가 정성과 사랑으로 준비한 음식이다. 이웃들과 정을 나눈 음식이다. 이보다 고귀한 음식이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 그는 30년 넘게 음식을 만들면서 할머니의 삶은 보리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이때의 할머니 말씀을 그는 화인처럼 가슴에 새겼다. 이 집 국수의 양이 엄청 푸짐한 이유다. <한돈면가>에서는 절대 곱빼기로 주문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국도변을 달리는데 가끔 보리밭이 지나갔다. 석양이 비친 보리 이삭에 누런 기운이 돌았다.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 이삭이 할머니의 미소를 닮았다. 이제 보릿고개도 거반 넘어선 모양이다.
대전시 서구 대덕대로 161번길 26, 042-536-0600

글 사진 이정훈 음식문화연구자(월간외식경영 외식콘텐츠마케팅연구소 실장)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