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희의 맛따라기]
한반도 최북단 녹차를 찾아…동루골막국수, 선장네 횟집은 덤
[중앙일보] 입력 2017.06.23 00:01 수정 2017.06.23 10:23
동루골막국수는 메밀 100% 면을 뽑아 쓰는 집으로 알려져 있다. 메밀녹쌀 70%에 겉메밀 30%를 섞는다고 한다. 면은 옅은 갈색 가닥에 검은 반점이 많다. 김·참깨 가루, 매운 양념장을 얹어서 내온다. 식탁에 놓인 들기름·겨자·식초를 취향대로 넣고 동치미국물을 부어서 먹으라고 안내했다.
책상 귀퉁이에 놓아둔 떡차 한 톨이 며칠 전 눈에 띄었다. 찻잎을 절구에 찧어 떡살 같은 틀에 찍어서 말린 한국식 병차(餠茶)다. 2015년 6월 7일 다원에 갔다가 몇 개 얻었는데 신기해서 기념 삼아 하나 남겨뒀다. 그 녹차 밭이 궁금해졌다. 지난 토요일(17일) 새벽에 나서서 고성 ‘동루골다원’을 찾아갔다. 전남 보성(寶城)이 아니다. 경남 고성(固城)도 아니다. 강원도 고성(高城)이다.
차 밭이 있는 마을에는 서울 사람보다 현지 주민이 많이 찾는다는 ‘동루골막국수’가 있었다. 투박하지만 순도 높은 메밀국수를 만났다. 저녁때에는 속초에 사는 지인이 고깃배 선장네 횟집 ‘설악항 15호 성덕호’에 안내해 예매한 고속버스표를 늦춰가며 자연산 활어회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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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녹차 도전 12년…마지막 남은 제품 생산자
지난 17일 찾아간 동루골다원의 1단지 차 밭은 이제 제법 모양을 갖췄다. 2015년 6월 7일 방문했을 때보다 차나무 키도 자랐고 줄기들도 훨씬 촘촘해졌다. 이 밭에 2011년 11월 차나무를 처음 심고서 6년간 죽고, 심고, 또 죽고 하기를 거듭한 끝에 재배 방법을 터득했다. 그 사이 함께 시작한 10여 농가는 포기하고 말았다. 차 밭 넓이는 3300㎡(1000평)쯤 된다.
▶동루골다원(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동루골1길 18/전화 033-633-7475)=다원이 있는 강원도 고성군은 북위 38˚ 11’~38˚ 36’에 자리 잡은 남북 거리 48.13㎞의 남한 최북단 군이다. 표준 위도 북위 37° 34′인 서울보다 1° 정도(약 111㎞) 북쪽이다. 녹차를 많이 재배하는 전남 보성(34˚ 45´)보다는 3˚ 9’(약 400㎞) 북쪽이고, 도로교통으로는 700km쯤 떨어져 있다. 그런 곳에 아열대작물인 녹차 밭이 있다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많다. 그런데 고성군에는 차나무가 잘 자라고 있는 다원 두 곳이 있다. 동루골다원과 산학다원(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죽화로 110-5 화진포 근처)이다. 고성군 안에서도 더 북쪽인 산학다원은 차 밭은 가꾸고 있으나 제품을 시중에 내지는 않는 듯하다. 홈페이지 격인 주인 부부의 블로그는 휴면상태다.
동루골다원의 ‘송로 발효차’ 한 잔. 5월 초 첫물 차를 따소 덖음차를 만든 다음 6~8월 한 달에 한 번씩 잎을 채취해 발효차를 만든다. 봄 차에 비해 쇤 잎으로 만들어 맛이 거칠 줄 알았는데 순하고 경쾌했다.
내 책상 위의 떡차 생산자인 동루골다원 주인 유성렬(65)씨 집을 찾아갔다. 첫물 차 수확을 끝낸 때라 잠시 짬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1년 묵은 ‘송로(松露)’ 발효차로 나그네를 맞았다. 맑지만 짙은 갈색의 차는 제법 자란 잎으로 만들었을 텐데도 맛이 순하고 경쾌했다.
동루골막국수 집에서 길 건너에 서있는 동루골다원 안내 표지판. 차 밭까지는 약 1㎞ 들어가야 한다.
우선 차 밭을 둘러보기로 했다. 동루골 쪽지평(토성면 성대리 산 159번지)에 일군 1단지부터 갔다. 고성군에서는 2005년부터 차 밭 조성을 시작했다. 그해 11월부터 차나무를 심고, 죽고, 또 심기를 몇 차례나 하면서 애지중지 끌어안고 가꿔온 3300㎡(1000평) 넓이의 밭이다. 차나무들은 2년 전에 비해 키도 많이 자라고 훨씬 촘촘하게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주변 야산과의 경계도 또렷해졌다. 곧게 자란 20~30년생 소나무 그늘에서 차 잎은 윤기를 뽐내고 있었다. 이어서 천진천 제방을 끼고 설악대교차로 근처(토성면 성대리 산 190-3번지)에 조성한 2단지로 갔다. 중간중간 맨땅이 드러나 보이던 2년 전과는 많이 다르게 차나무 빈 곳이 거의 없었다. 두더지가 굴을 파는 바람에 차나무가 말라 죽은 자리에 올 봄 파종한 씨에서 새싹들도 맹렬히 올라오고 있었다. 여기도 넓이는 1단지와 거의 같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다원은 안정기에 접어들어 보였다. 상식을 깨고 남한의 최북단에서 이토록 무성한 차 밭을 일구는 초기 과정에는 상식 이상의 고난이 점철됐다. 6년간 실패의 연속이었다.
동루골다원 2단지 차 밭 입구에 서있는 표석. 천진천 주변이라 돌이 많은 밭이다. 밭을 일구나 나온 돌에 주인이 직접 글씨를 쓰고 새겼다. 2010년 4월 1일 세웠다고 새겼는데, 이 무렵 2단지 차 밭은 차나무들이 겨울에 얼어 죽고, 말라 죽고, 두더지가 땅굴을 파고 지나가면 뿌리가 들떠서 죽고 하는 통에 보식(補植)하느라 전투를 벌이던 무렵이다.
동루골다원 2단지 입구의 원두막에 놓인 현판도 주인이 판자에 새긴 작품이다. 바닥에 먼지처럼 묻은 자국은 밤에 놀다 간 고라니 발자국이다.
동루골다원 2단지 차 밭에서도 피해 없이 잘 자란 차나무들은 꽤 무성해졌다. 차나무를 줄 맞춰 심고 잘 가꿔 1단지보다 정돈된 느낌이다. 최근에는 어디서 얘기를 들었는지 구경하겠다며 관광버스가 찾아오기도 한단다.
유성렬씨가 기록하고 있는 고성 ‘녹차 실록’ 어느 페이지를 보니 2단지 차 밭 입지와 개발 구상을 약도로 그려놓았다. 하동의 제다(製茶) 스승인 홍소술 명인이 차 씨앗을 보내주기로 했다는 내용과 최선을 다해 좋은 녹차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적었다. 2010~2011년 가을인 듯하다.
이웃 마을 아야진에서 태어난 유씨는 서울에서 25년을 살았다. 태영건설 자재·기획·전산부에서 17년(1978~1995), 크라운베이커리에서 3년(1995~1998) 근무했다. 우리 나이 마흔일곱 살에 고향에 내려가 살려고 스스로 회사를 그만뒀다. 그때까지 한국인이 들어보지 못한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때였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노숙자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이른바 ‘IMF 외환위기’ 사태였다. 귀향 준비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이었다. 노량진 학원에 등록을 했더니 직전에 회사에 다녔다는 증명을 떼어오라고 했다. 학원비를 정부에서 대주고 한달 15만원씩 교통비까지 줬다.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별도 사무실 없이 집에서 열어도 되도록 규제도 풀렸다.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와 ‘우주공인중개사사무소’를 차렸다. 귀향 연착륙이었다. 차나무가 평온을 깼다.
유성렬씨는 초의 선사의 ‘다신전’ 전문을 금분을 개서 필사하고 가리개로 만들어서 다탁 뒤에 세워뒀다. 그에게 ‘다신전’은 종교 경전과도 같다. 필사부터 가리개 제작까지 모든 걸 손수 했다. 왼쪽 아래 사진은 2010년 봄 ‘화개제다’의 홍소술 명인에게 제다 기술을 배울 때 찍은 것이다.
유성렬씨는 경남 하동 ‘화개제다’의 홍소술 명인을 사사해 2007년부터 매년 4~6월 제다 기술을 익혔고 2012년 7월 25일 기능 전수증을 받았다. 홍 명인은 대한민국 식품명인 30호(죽로차 제조·가공 부문)이다.
고성군은 2005년 정부가 지원하는 신활력사업으로 ‘고성녹차그린투어사업’을 선정하고 녹차재배단지 조성에 착수했다. 차를 관광특산품으로 판매하고 체험농원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10년 안에 100만㎡(30만평)의 단지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2004년 간성읍 동호리에 2000㎡(600평) 시험재배가 시작이었다. 사업 첫 해 4곳에 3만3000㎡(1만평)의 녹차 밭을 조성했다. 다음해 5만㎡(1만5000평)를 더 심었다. 2008년 9월 17일 ‘고성 녹차발전연구모임회’를 만들고 창립총회를 열었다. 군수도 참석해 ‘6차산업 육성’이라는 야심 찬 축사를 했다. 재배 농민 35명이 참석했고 유씨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2009년 8월에는 녹차 밭 조성 4년 만에 고성녹차 시제품 출시했다. 재배 면적은 9곳에 14만1000㎡(4만2652평)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행정적 성과일 뿐이었다. 실제 밭에서는 이런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처음 열다섯 농가가 참여했지만 6년 동안 수확이 거의 나오지 않자 너도 나도 포기했다. 사업을 주도한 지역 농업기술센터도 은근히 종용하는 눈치였다.
차 농사 시작하고 6년이나 실패를 거듭한 이유는 차나무 번식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기본 이치를 몰랐던 것이다. 차나무는 옮겨 심으면 죽고, 씨를 직파해야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는데 그 세월이 걸렸다. 동루골다원 유성렬씨가 1단지 차 밭에서 씨앗이 얼마나 자랐는지 살펴보고 있다.
지난 가을에 맺혀 7~8개월 자란 차나무 씨앗이 많이 열리기는 했지만 크기는 아직 덜 자라 팥만했다. 5개월쯤 더 자라 차 꽃이 피는 10~11월에 익는다. 열매와 꽃이 상봉하는 나무라 하여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라 하기고 한다.
2005년 11월 동루골 쪽지평에 차나무를 처음 심은 유씨는 오기가 생겼다. 어떻게든 성공시키고 싶었다. 2007년부터 매년 4~6월에 하동으로 차 만드는 기술을 배우러 다녔다. ‘화개제다’ 홍소술(88) 명인(대한민국 식품명인 30호 죽로차 제조·가공 부문)을 사사했다. 2012년 7월 25일 기능 전수증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차 농사를 오래 지은 하동 농민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하동에서는 상식에도 못 드는 차 재배의 대전제인데 고성에서는 그걸 몰랐다. 차나무는 옮겨 심으면 죽는다는 사실이다. 키울 땅에 씨를 직파(直播)해야 한다고 했다.
올해 4월에 심은 씨앗에서 올라오는 차나무 새싹.
땅속에서 힘겹게 올라오는 차나무 어린 싹. 배젖이 반쯤 노출된 것도 보인다.
고성의 차 농민들은 농업기술센터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종자를 포트에서 발아시켰다. 깊지 않은 포트에서 자라는 묘목은 뿌리가 바닥에서 갈 곳이 없어 똬리처럼 돌돌 말렸다. 그걸 밭에 옮겨 심으니 죽고 말았다. 큰 차나무도 옮겨 심으면 살지 않았다. 얼마 전 유씨 집 마당에서 잘 자라는 차나무를 밭으로 옮겼더니 죽었다. 그런 특성 때문에 예전 시집가는 딸에게는 차 씨앗을 선물했다. 개가하지 말고 백년해로 하라는 뜻이다. 차나무는 외뿌리가 직근(直根)하는 게 생육의 특징이다. 지상 줄기의 3배 깊이로 뿌리가 땅속으로 곧게 자란다고 한다. 유씨는 “봄에 차 씨를 뿌리고 싹이 나와 겨울을 한번만 지나도 차나무를 손으로 뽑으면 잘 안 뽑힌다”고 했다. 차나무는 어려서부터 그만큼 뿌리를 깊이 내린다. 그걸 제대로 몰랐다.
두더지가 땅굴을 파며 돌아다녀 뿌리가 들뜬 차나무들이 죽어 보식한 곳이라 나무가 작다. 지난해 4월 씨를 뿌려 싹이 돋은 다음 겨울을 한번 지난 나무들이다. 검은 부직포는 잡초가 자라는 것을 막아주고 땅의 온도를 높여 아열대성 작물인 차나무 생육 환경에 도움이 된다.
두더지가 땅굴을 파며 돌아다녀 뿌리가 들뜬 차나무들이 죽어 보식한 곳이라 나무가 작다. 지난해 4월 씨를 뿌려 싹이 돋은 다음 겨울을 한번 지난 나무들이다. 검은 부직포는 잡초가 자라는 것을 막아주고 땅의 온도를 높여 아열대성 작물인 차나무 생육 환경에 도움이 된다.
이런 걸 모르고 1년에 몇 번씩 포트에서 싹을 틔워 모종이 죽은 자리에 보식(補植)하고 죽고 하기를 6년. 횟수로는 수십 차례를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씨를 밭에 직접 심어야 한다는 사실을 6년 만에 알았다. 이때가 2011년인데 함께 시작한 농민들은 대부분 포기하고 동루골다원과 삼학다원만 버티고 있었다. 그나마 삼학다원은 군청의 지원을 받으며 다원을 이끌어갔다. 동루골다원은 거의 자력으로 버텼다. 1단지에 살아남은 몇 그루의 차나무를 붙잡고 기어코 해보겠노라는 주인의 끈기와 승부욕에 의지해 연명하고 있었다.
동루골다원은 2012년부터 수확을 시작했다. 차 농사를 하던 동네가 아니어서 수확(채차)과 덖고(살청·가향) 비비는 일(유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부부뿐이다. 인력·시설·경험이 모두 열악해 전 과정을 부부가 손으로 하는 완전 수제차를 만든다. 그러다 보니 수확도 적다. 남녘에서는 세물 차 시기인 5월 1~10일 따는 첫물 차로는 덖음차를 만든다. 차나무 줄기 끝에 올라온 새 순에 속잎 하나는 뾰족하게 말려있고 잎 하나는 펴진 1창1기(一倉一旗) 상태를 채차한다. 남녘에서는 대개 곡우(4월 20일) 전 우전차(雨前茶)를 채취할 때 적용하는 기준이다. 우전 다음에는 1창2기를 수확한다. 고성에서는 첫 차 따는 시기가 입하(5월 5일) 전후이므로 찻잎 상태는 남녘 우전과 비슷하게 어리지만 우전이라 부를 수 없어 첫물 차라고 한다. 첫물 차를 따고 나면 이 지역에서는 세작(細雀)·중작(中雀)·대작(大雀)을 구분해 수확할 말미가 없다. 잎들이 급속하게 쇠기(너무 자라 줄기나 잎이 뻣뻣하고 억세짐) 때문이다. 6~8월 한 달에 한 번씩 순을 따서 발효차를 만든다. 남녘에서는 대략 ▷첫물 우전은 곡우(4월 20일) 5일 전 ▷두물 세작 4월 20~4월 30일 ▷세물 중작 5월 1~10일 ▷끝물 대작은 5월 10일~6월 초순에 따고, 그 이후 발효차를 수확한다.
고성 녹차 포장용 통. 고성의 차 재배 농민들 공용으로 제작했다. 같은 포장에 차 이름(빨간 글씨)만 따로 인쇄한 테이프를 붙이려고 한 것이다. 지금은 고성군의 다원 2곳 외에는 사용하는 농민이 없다.
동루골다원에서 생산하는 차 이름은 ‘송로’다. 대밭에서 자란 차를 ‘죽로’라 하는데 동루골 다원 차나무는 솔숲에서 자라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주인이 그 사연을 자필로 한지에 적어 걸어뒀다.
가마에서 덖거나(덖음차) 그늘에서 말린(발효차) 찻잎을 눌러가며 비비는(유념) 작업 때 쓰는 두레방석에 차 녹이 절어있다. 그것도 관록이겠다. 두레방석은 유성렬씨가 짚으로 직접 결었다.
유씨가 차 농사를 시작한 이래 12년 동안 집념과 끈기로 차나무에 쏟은 정성과 노력은 눈물겹다. 첫 수확을 하던 해 그는 해양심층수 떡차를 개발하고 특허(제 10-1187450호 ‘해양심층수를 이용한 발효차 및 그의 제조 방법’)를 냈다. 1창3~4기의 차 잎을 따서 해양심층수 넣고 찧은 다음 틀에 찍어 100일 이상 자연건조한 이 차의 이름은 ‘송심차(松深茶)’라고 지었다. 내가 책상에 두고 있던 까만 석탄 같은 덩어리가 그 차였다. 떡차를 일정한 규격으로 찍어내는 틀도 떡살처럼 나무로 직접 깎았고 차 덖을 때 잎을 비비는(유념) 두레방석도 볏짚으로 손수 결었다. 다탁(茶卓) 뒤로는 글씨를 잔뜩 쓴 가리개(일반 병풍보다 폭을 넓게 하여 두 폭으로 만든 병풍)가 있다. 자세히 보면 내용이 초의선사(1786~1866) 『다신전(茶神傳)』이다. 금분을 개서 육필로 전문을 옮겨 쓴 것이다. 이토록 공부하고 노력하는 유씨도 송심차는 힘들어 포기하고 지금은 생산하지 않는다.
2012년 제조한 해양심층수 떡차 ‘송심(松深)’. 제조방법으로 특허까지 냈지만 과정이 너무 힘들어 지금은 생산하지 않는다. 이 차는 묵을수록 맛이 좋아진다고 한다. 생산을 중단해 한 대접만 남아있다. 항아리에서 대접을 꺼낼 때 향이 잘 마른 땔감 타는 연기처럼 진하지만 가벼웠다.
해양심층수 떡차 한 톨이 내 발걸음을 고성 동루골다원으로 이끌었다. 2015년 6월 7일 방문했을 때 몇 개 얻었는데 기념으로 하나를 남겨 두었다. 오른쪽 붉은 것은 크기를 비교하기 위한 연필 지우개.
심층해양수 떡차를 찍어낼 때 사용한 틀. 손재주 좋은 유성렬씨가 떡살을 본떠 직접 깎았다.
동루골다원 1단지에서 차를 처음 수확한 2012년 유성렬씨는 해양심층수 떡차를 개발하고 특허(제 10-1187450호 ‘해양심층수를 이용한 발효차 및 그의 제조 방법’)를 냈다. 찻잎에 해양심층수를 넣고 찧은 뒤 틀에 찍어 100일 이상 자연건조한 이 차의 이름은 ‘송심차(松深茶)’였다. 생산은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집 거실과 차 밭을 오가며 보니 곳곳에 돌과 나무에 새긴 글씨들이 보였다. 가리개 금분 글씨가 범상치 않더니 모두가 혼자 마음을 다스리며 만든 작품들이었다. “밭에서 일하다가 지루하면 한 글자 파며 쉬고 또 파고…그렇게 한 글자씩 팠다. 초의선사 다신전 구절도 새기고 돌에 ‘茶園’이라고 새겨 표석도 세웠다. 장에서 끌을 사다가 혼자 새겼다. 글자를 다 판 다음에 글씨 속에 검은 칠을 하니까 아주 잘 보인다. 급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차 농사는 특히 그렇더라.”
유성렬씨(오른쪽) 집 마당은 각종 채소와 꽃들이 자라는 텃밭이고 꽃밭이다. 북분자와 초피나무가 자라는가 하면 토종벌도 7~8통 있다. 뒤뜰에는 수령 수백 년이라는 상수리나무 거목이 있고 마당 가에는 두 아름쯤 되는 낙락장송이 서 있다. 마당 그늘에 앉아서 차 애기를 나눴다.
그가 차 농사 말고 정성을 들이는 일이 하나 더 있다. 한지로 책을 묶어 세필로 빽빽하게 적어 내려가는 고성 ‘녹차 실록’이다. 2005년 11월 처음 차나무를 심을 때부터 재배 실패와 새 기술의 발견, 하동에서 배운 제다기술 내용, 해양심층수 떡차를 개발해 특허 받은 과정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은 중간중간 그림으로도 그려 넣었다. 유씨는 자세를 바로 하고 정색을 하더니 말했다. “한지에 세필로 기록하는 이유가 있다. 때가 되면 이걸 고성군청에 사초로 기증할 거다. 모두가 포기하고 떠날 때 나 혼자 남아서 성공한 과정을 한지의 수명처럼 오래 오래 후대에 증언하고 싶다.“
유성렬씨가 2005년 11월 차나무를 처음 심은 이후 차 농사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고성 ‘녹차 실록’ 표지. 그는 한지를 묶어 책으로 만들고 사연을 세필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때가 되면 고성군청에 기증해 고성 녹차의 역사를 후대에 증언하기 위한 작업이다.
고성 ‘녹차 실록’ 내용 첫 페이지. 머리말과 범례에 해당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고성 ‘녹차 실록’ 본문 첫 페이지. 동루골다원에서 생산하는 차에 대해 설명하고 초의선사 ‘다신전’을 읽으라고 권하고 있다.
동루골다원에서 생산한 차 ‘송로’는 30g 단위로 포장해 판매한다. 덖음차 3만원(2통 5만원), 발효차 1만7000원, 발효차 티백(0.5gx60개) 2만원에 판매한다. 고성·속초 농협 하나로마트와 양양 대명 솔비치 호텔&리조트에서 구입할 수 있다. 포장단위가 너무 작은 거 아니냐고 묻자 5만원 포장을 하면 잘 팔리지 않는다고 했다. 차 농사 소득은 한 해 1000만원 정도. 그래서 부동산중개업을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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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투박한 막국수…찬바람 불면 송이육개장
동루골막국수의 막국수와 동치미.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동치미에는 무·배추와 함께 대파와 재래종 중파가 들어간 듯하다.
▶동루골막국수(강원 고성군 토성면 동루골길 3-11/전화 033-632-4328)=동루골다원 주인 유씨 집 바로 옆에 마당이 드넓은 집이 있다. 한적한 시골에 있지만 속초·고성 사람들이 알아준다는 막국수 집이다. 마당에 들어서 보면 2층 슬라브 본채와 앞마당에 벽 없이 지붕만 이고 평상을 앉힌 모정(茅亭) 같은 야외석 건물 2채가 있다. 그 중 왼쪽 채에는 머루나무 한 그루의 넝쿨이 처마를 무성하게 감쌌는데 줄기마다 머루가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려있다. 이 집에서는 머루주를 판매하기도 한다(1.5L 3만원). 추워지기 전까지는 야외석에서 시원한 주변 경관을 보면서 먹는 게 운치가 있다. 넓은 마당 겸 주차장에는 토요일 오후 3시인데도 차가 10대쯤 있고 평상은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동루골막국수 집 마당의 원두막 형 야외석은 지난 17일 토요일인 오후 3시쯤인데도 빈자리가 별로 없다.
동루골막국수 집 원두막 형 야외석 지붕의 추녀를 타고 뻗어간 머루넝쿨에는 머루 송이가 주렁주렁 열렸다.
동루골막국수의 쉼터 둘레로는 상수리나무 거목과 수십년생 소나무가 둥치로 울타리를 두른 듯 줄지어 자란다. 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의 눈 맛이 좋다.
마당 끝에 모정 같은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쉼터라고 표지가 붙어있다. 그 너머로 축대 아래 자리 잡은 상수리나무 거목과 아름드리 소나무 여러 그루가 줄지어 둥치로 울타리를 이뤘다. 그 경치만으로도 먼 길 온 보람을 조금은 채워준다. 계절메뉴로 도토리묵(1만원)을 하는 걸로 봐서 집 주위 나무에서 떨어지는 상수리를 주워 묵을 쑤는 모양이다. 메뉴판에는 없지만 주방 앞의 제법 세월을 견딘 간판에는 ‘도토리국수’가 새겨 있다. 한동안은 팔았던 모양이다. 동네 둘레에는 눈이 번쩍하는 낙락장송이 무시로 보이고 서로의 가지를 비비며 곧게 곧게 자란 송림도 곳곳에 펼쳐졌다. 그 풍경도 눈을 정화하는 데 더없이 좋았다.
주요 메뉴는 메밀막국수·육개장(각 7000원)·송이육개장·편육(각 2만원)·닭백숙(6만원) 등이다. 도로변 대형 입간판에는 ‘순메밀국수 전문점’, 본채 주방 입구에 가로로 건 간판에는 ‘순수메밀’이라고 당당하게 써놨다. 막국수는 그릇에 면을 사려 앉히고 김 가루, 계란 반쪽, 참깨 가루와 매운 양념장을 얹어서 내왔다. 막국수 대접보다 큰 양푼에 동치미가 국자와 함께 따라왔다. 들기름·식초·겨자를 취향대로 넣고 동치미 국물을 부어서 먹으라고 알려줬다. 양념 케이스에는 설탕통도 있었다. 간판에 쓰인 대로 100% 메밀면을 하는 집으로 알려져 있다. 메밀녹쌀 70%에 겉메밀 30%를 섞는다고 한다. 국수 가닥에는 옅은 갈색이 돌고 검은 반점이 많은 편이다. 아무 양념도 닿지 않은 면을 몇 가닥 추려 먹어보았다. 쌉쌀함이 연하지만 싸하게 혀에 감돌았다. 거친 메밀 맛이다. 한 젓가락 더 입에 물고 우물거리니 거칠고 뚝뚝한 듯 하면서도 목질 기운이 부드럽게 혀에 얹힌다. 메밀 향은 늦봄 아지랑이처럼 느릿하게 하늘거린다. 좋다.
동루골막국수에서 아무 양념도 닿지 않은 메밀 면을 몇 가닥 추려 먹어보니 쌉쌀함이 연하지만 싸하게 혀에 감돌았다. 거친 메밀 맛이다. 메밀 향이 코와 입 사이에서 아지랑이처럼 하늘거렸다.
동치미는 맛도 온도도 시원하다. 블로거들은 동치미가 점점 달아진다고 지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걱정보다는 덜 달았다. 단맛이 혀끝에서 느껴지는 게 아니라 혀뿌리 쪽에서 들치근하게 올라왔다.
비비지 않고 몇 젓가락 먹은 후 들기름·겨자·식초를 조금씩 치고 동치미국물을 부은 모습. 동치미에 있던 큰 얼음덩어리는 다 먹을 때까지 녹지 않았다.
비비지 않고 두어 젓가락 먹다가 들기름·식초·겨자 넣고 동치미 국물을 부어 먹었다. 막국수만 놓고 보면 동해안의 이름있는 집들에 비해 밀리지 않는 맛이다(배가 불러 먹을 수 없던 다른 음식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반찬으로 나온 열무김치는 화장기 없이 투박한 시골 맛이어서 보리밥과 고추장 생각이 바로 났다. 순박한 맛의 무절임도 나쁘지 않았다. .
이 집의 다른 명물은 찬바람 불 때 하는 송이육개장이다. 입구 간판에도 크게 써놨다. 철이 되면 먹으러 가볼 생각이다. 송이철이 아닐 때는 일반 육개장을 한다. 먹어 보지 못했지만 옆 자리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니 호기심이 들끓었다. 서로를 교수라고 호칭하는 네 남자는 육개장 셋, 막국수 하나를 주문했다. 누군가 “막국수는 주변에 많으니 육개장을 꼭 먹어보라”고 권했다. 이 지역 학교에 근무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육개장이 나온 걸 보고 사진 좀 찍자고 청했다. 흔쾌히 응해줬다. 젓가락으로 건지 좀 들어보라 했더니 그것도 즐겁게 해줬다. 고사리·토란대·대파 같은 나물 대신 버섯과 당면이 많이 들어있다. 진해 보이는 국물을 먹으면서 나누는 말을 들었다. “육개장이 별미네. 국물이 진짜 진해. 맛집 이런 데 관심 없는 편인데 여긴 참 잘 왔네.” 그들은 포장 4인분을 더 주문했다.
동루골막국수 집의 메뉴 대표 상비군 격인 육개장. 고사리·토란대·대파 같은 나물류 대신 버섯이 많이 들어갔다. 당면도 많은 편이다. 옆자리에서 먹던 사람들이 “국물이 진하다”고 했다. 가을~초겨울에는 야생 송이를 넉넉히 넣은 송이해장국이 인기다.
동루골막국수 입구의 대형 입간판에는 ‘순메밀국수 전문점’이라고 씌어있다. ‘송이육개장’도 씌어있는데 이 집의 특징 음식이다. 간판 뒤로 상수리나무 거목과 붉은 둥치가 늘씬한 노송들이 보인다. 흔히 볼 수 없는 미인송이다. 앞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차로 20여분 가면 속초시다.
더 깊은 내용을 알아보려고 주방 쪽으로 갔다. 제면기를 올린 면 삶는 가마 옆에서 사진을 찍자 국수를 건지던 남성이 “얼굴은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알겠다. 옆모습 조금만 나온다”고 했더니 주인인 듯한 이 사람은 잠시 후 생각을 바꿔 “무엇이든 찍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부인이 옆에서 “여러 방송의 출연 요청도 다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그 바람에 주인에게 직접 물어야 알 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 문 여는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7시. 명절만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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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호 선장이 잡아온 활어, 두툼하게 썰어 파는 아내
성덕호 횟집 자연산 활어 모둠회 본 접시에는 부시리(히라스)·광어 회와 가자미 세꼬시(왼쪽 위부터 시계방향)가 푸짐하게 올라왔다. 회를 무 삐지듯 투박하게 툭툭 잘라 야성의 미각을 자극했다. 회가 상당히 차졌다. 지난 17일 시세는 자연산 4인분 10만원이었다.
설악해맞이공원 주차장 뒤에 있는 설악항회센터 15호 성덕호 횟집의 자연산 활어 모둠회 첫 접시에는 해삼·멍게와 활오징어 회가 올라왔다. 오징어가 잘 안 잡혀서 양이 적다.
모둠회 마지막은 생선구이. 선장인 남편이 잡아온 고기 중에 흔한 것을 골라 구워준다.
▶설악항 15호 성덕호(강원도 속초시 동해대로 3666/전화 010-4354-1371)=설악로와 국도 7호선이 만나는 곳 3거리 바닷가에 설악해맞이공원이 있다. 그곳 주차장 안쪽에 설악항회센터(내물치 어촌계)가 있다. 26호까지 있는 횟집 상호는 배 이름인 경우가 많다. 어촌계 선장들이 잡아온 활어를 회로 파는 집들이다. 이곳에서 설악산 길로 2.8㎞ 들어간 중도문리에 사는 가든디자이너 오경아씨 부부의 추천과 안내로 ‘성덕호(정호네)’ 가게 앞 평상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평상이 끝나는 곳은 어선이 뱃머리를 댄 부두다. 횟감을 살피는 사람들이 다른 집보다 많았다.
성덕호 횟집에서 손님이 회로 떠 달라고 골라놓은 활어. 바구니에 광어·도다리·가자미·비단멍게가 보인다.
설악항회센터에는 26호까지 횟집이 있다. 선장 부인이 하는 집들이 많은데 배 이름으로 상호를 쓴다. 15호 성덕호도 그런 집이다. 여주인(정호 엄마)이 활어를 잡아 회를 뜨고 있다.
회 주문은 인원수 말하고, 자연산·양식 선택하면 끝이다. 그러면 그날 있는 활어 몇 가지를 섞어서 양을 맞춰준다. 지난 주말 자연산 4인분은 10만원쯤 했다. 처음 접시에는 활오징어·해삼·비단멍게가 나왔다. 두 번째 접시에 부시리(히라스)·광어 회와 가자미 세꼬시를 가득하게 썰어줬다. 이어서 생선구이(볼락)가 나왔다. 회는 두툼하고 큼직하게, 어슷어슷 섞박지 무처럼 잘랐다. 어부들 뱃일하다가 갑판에서 식사할 때 싱싱한 생선 아무렇게나 툭툭 잘라 초고추장에 비벼 먹던 TV 다큐 장면이 떠올랐다. 별로 기대하지 않고 갔는데 회 맛도 좋고 값에 비해 양도 푸짐했다. 대포항에 밀려 외지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인데 회는 실속 있고 바다도 가까워 썩 마음에 들었다.
한 줄로 이어져 있는 설악항회센터의 횟집 크기는 모두 같다. 실내에 자리가 좁아 부두에 평상을 똑같이 놓았다. 바로 옆이 어선들 정박한 선착장이다. 손님들은 이 자리를 더 좋아한다. 횟감 살피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성덕호 횟집이다.
물회·회덮밥(1만5000원)도 있다. 매운탕(6000~1만원)을 주문하면 다른 집에서 끓여서 배달해준다. 이곳 회센터는 가게가 모두 좁기 때문에 분업을 하는 듯했다. 매월 둘째 수요일 휴무. 어황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가기 전에 꼭 전화로 확인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