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작전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한국전쟁중에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미국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악몽을 남긴 전투 중 하나이다.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생존자가 몇 안 된다 하여 영어로 그들을 가리켜 "The Chosin Few"라 하였는데 그 말은 "The Chosen Few" (선택 받은 소수)를 의미하는 일종의 "pun (펀)", 하나의 동음이의적 표현이다.
장진호전투는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여기에는 미 해병사단 외에도 국군 7사단이 동참하였다.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 목적과 병력규모를 11월 초까지도 경시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선제공격을 단행하기로 결심함에 따라 서부지역을 담당한 미 제10군단 알몬드 소장은 국경선을 목표로 한 북진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1일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1군단을 우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좌측으로 하여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은 미 제10군단 정면에 제9병단을 투입하고 있었다. 제9병단은 예하에 제20군단과 제27군단, 제26군단을 두고 있었다.
11월 27일 중공군이 유담리의 미 해병대를 공격하며 전투가 개시되었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장진호 지역의 전황이 급변하자 미 제10군단장은 11월 30일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계획을 재검토하였다. 회의에서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유담리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에 미 제1해병사단의 제5연대와 제7연대가 각각 이를 격파하고 12월 4일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서 고립된 미 제7사단은 구출이 지연되자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하갈우리로 이동하였다.
하갈우리에 대한 공격은 중공군 제58사단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또한 중공군 제60사단은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하여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 제1해병사단의 분전으로 12월 7일 고토리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함으로써 장진호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장진호전투는 여러 측면에서 전선에 영향을 주었다. 중공군은 장진호 부근 전투에서 전투손실 뿐 아니라 비전투손실도 상당히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더 이상의 군사작전 수행이 불가능하여 중공군 제9병단 지휘부는 3개월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반면에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망을 돌파하여 함흥지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공군 제9병단이 서부전선의 제13병단을 증원할 수 있는 역량을 소멸시킴으로써 서부지역 전선의 미 제8군이 위기를 모면하는데 일조하였다.
글로 축약하여 전투내용을 설명하였지만 사실 장진호 전투에는 추운 날씨와 중공군의 엄청난 인해전술탓에 미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얼어죽는 병사의 숫자는 넘쳐났으며 부상자의 이동수단이 부족해 걸어서 이동하다가 사망하기 일수였다. 한 부대가 괴멸이 되기도 했으며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굶어죽는 인원들도 발생하였다.성공적인 후퇴작전의 이면에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또한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무사히 탈출시킬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공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장진호 전투는 후퇴하였지만 승리한 전투였으며 엄청난 희생을 치룬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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