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영서(令書)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품 가운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왕인 아버지에게 밉보여 뒤주에 갇혀 죽은 폐세자의 흔적을 가까이 해봐야
득 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50년이 흐르는 동안 꼭꼭 감춰져 오던 사도세자의 유품 한 점이 최근 공개됐다.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천도교 대교당에서 열리는 제12회 서울고서전에 사도세자가
조돈(1716-1790)에게 내린 영서(令書)가 출품됐다.
영서는 왕세자가 신하에게 내리는 공식문서지만 임금이 내리는 교서와 위상이 같다.
대리청정을 한 왕세자만이 영서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오영선 학예연구관은 "대리청정을 한 왕세자는 사도세자, 문종, 익종
정도에 불과하며 그 기간도 짧기 때문에 영서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문서의 형식에서도 영서는 '교(敎)-관직-성명-서(書)'의 순서로 구성된 교서와 마찬가지로
'영(令)- 관직-성명-서(書)'의 격식을 갖춘다. 사도세자의 영서 역시 '영(令)
경기관찰사겸(京畿觀察使兼)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겸(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兼)
개성부유수강화부유수광주부유수(開城府留守江華府留守廣州府留守) 조돈(趙暾) 서(書)'로
시작한다. 영서를 내린 때는 건륭22년(1757) 12월28일로 경기관찰사와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등을 겸직하며 빈민구제에 힘쓴 조돈의 공을 높이 사는 내용이다.
사도세자는 영서에서 '백성의 힘이 대단히 궁핍하고 촉박한데 부역과 세금을 덜어준
바(賦減稅), 충성스럽고 후덕하며 맑고 근면한 덕이 있다(忠厚淸謹之德有是)'고 조돈을
치하하고 있다. 또 '방백(관찰사)으로서 더욱 힘써 백성의 아픔을 잘 보살피라
(폐민막지<幣에서 巾대신 大>民<病에서 丙대신 莫>之)'고 당부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영서를 출품한 손창규(술고화랑 대표) 씨는 "15년 전 부산의 한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던 유물로 그 분이 돌아가신 뒤 한참 동안 유족을 설득해 구입한 물건"이라고
출처를 밝혔다. 손씨는 "10여 년 동안 장롱에 감춰두고 혼자만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렸지만
이번 고서전을 통해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며 "값을 측정하기 어려운 물건"이라고 말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양진석 연구원은 "지금까지 사도세자의 영서는 규장각이 소장한
1점만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며 "귀한 자료인 만큼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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