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가라,내 마음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
* 베르디가 활약했던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존,주세페 베르디(1813~1901)]
베르디는 전 세계 오페라 극장 무대에 그의 작품이 상연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고 할 정도로 사랑을 받는 오페라 작곡가입니다. 그에 대한 至高의 경의와 애정은 그의 오페라 곡 아리아 하나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죠.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이야말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진수(眞髓)와 理想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베르디는 1813년 레 론콜레라라는 小村에서 태어났습니다. 밀라노에서 '태양의 고속도로'를 따라 피렌체를 향해 남하하다가 피덴차에서 내려서면 거기서 부세토까지 15km,부세토에서 다시 남쪽으로 포플러 가로수가 줄선 가도를 따라 4km쯤 가면 레 론콜레 마을이 있습니다.
* 레 론콜레 마을로 가는 길
'론콜레'란 말이 '낫'이란 뜻이듯이 베르디 탄생 당시는 몇 채의 대장간과 농가가 마을의 중심인 산 미켈레 교회 앞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지만, 지금도 농가가 조금 늘었을까요, 넓은 들판 가운데의 한적한 寒村입니다. 베르디가 세례를 받은 그 때의 교회도 여전합니다.
베르디는 자라 10세 때 이 교회의 어린 오르가니스트가 됩니다.
이 교회에서 광장 건너편 크레모나에서 오는 길이 파르마로 빠지는 동네 끝의 모퉁이에 베르디의 생가가 남아 있습니다. 벽이 더덕더덕 낡은 2층짜리의 헛간 같은 古家입니다. 집 앞마당에 놓인 베르디의 흉상은 그의 탄생 100주년 때인 1913년에 제막된 것입니다. 베르디가 고고성을 울린 2층의 소박한 방은 기념실이 되어 있습니다.
* 베르디 생가
베르디가 태어나기 며칠 전 그의 아버지가 식료품상 겸 여관을 경영하고 있던 이 집에 떠돌아다니는 거리의 악사들이 나타나 아들이 태어나면 축하하러 오겠다고 했고, 베르디의 탄생 소식을 듣자 이들이 약속대로 다시 와서 세레나데를 연주해 주었습니다. 대음악가의 출생은 이렇게 음악으로 축복되었습니다.
* 베르디가 태어난 방
레 론콜레 마을은 베르디를 낳은 영예에 광을 내기 위해 1963년부터 마을 이름을 '론콜레 베르디'로 고쳤습니다. 이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베르디는 10세 때인 1823년 중학 과정에 진학하기 위해 이웃 부세토로 갑니다. 부세토는 그가 19세 때 밀라노에 처음 나갈 때까지 수업을 했고 그 후로도 늘 이 고장과 끈끈한 마음의 끈을 가지고 틈만 있으면 돌아왔던 곳이라 베르디 음악의 本鄕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시 인구 2천 미만의 시골이던 부세토는 이제 만명이 넘는 小邑이 된 채 거리를 거닐면 베르디의 이름이 도처에 밟힙니다.
우선 시청 앞의 커다란 동상은 물으나마나 베르디입니다. 그 앞쪽이 베르디 광장, 광장 건너로 베르디의 동상이 마주 향하고 있는 건물이 바레지의 집입니다. 바레지는 베르디의 후원자로, 베르디는 이 집에서 기거하는 동안 그의 맏딸 마르게리타를 사귀게 되어 결국 결혼합니다. 건물에는 기념판이 걸려 있습니다.
* 베르디 동상
바레지의 집 바로 이웃이 산 바르틀로메오 교회. 빨간 벽돌의 이 교회에서 23세의 베르디는 마르게리타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후 불과 4년 사이에 두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내고 끝내는 아내마저 死別한 젊은 베르디의 悲痛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베르디가 마르게리타와 신혼 생활을 하던 팔라조 테달디란 집, 그가 36세 때 사들였던 팔라조 오란디란 저택도 베르디 순례의 코스가 됩니다.
* 베르디의 후원자였던 장인 바레지
부세토의 중심 거리에서 조금 외떨어져 있는 빌라 팔라비치노 박물관에는 베르디 기념실이 따로 있고, 거기서는 베르디가 마르게리타와 나란히 앉아 連彈하던 그랜드 피아노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작은 동네에 오페라 극장이 있는 것도 베르디의 고향답습니다. 시청 바로 옆에 붙은 이 가극장은 베르디가 생존 중이던 1867년에 개장되어 베르디 가극장이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베르디는 이 극장 건축에 1만 리라를 기부했고, 市에서는 그 보답으로 극장의 가장 좋은 박스席을 영구히 그에게 기증했습니다. 개관식 때는 베르디의 <리골레토>가 공연되었습니다.
* 베르디 가극장
이 베르디 극장에서는 매년 6월이면 베르디 국제 성악 콩쿠르가 열립니다.
베르디의 생전에는 주세피나와의 재혼때문에 그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았던 부세토 시민들이었습니다. 이제 부세토는 베르디 왕국의 王都가 되어 있습니다. 부세토뿐만 아니라 생가가 있는 론콜레를 포함하여 인근 일대는 베르디의 領地나 다름없습니다.
부세토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진 비달렌초 마을에는 베르디의 양친이 잠들고 있습니다. 베르디는 주세피나를 꺼려하는 양친을 달래기 위해 <리골레토>의 수입으로 농가를 사서 양계장을 차려 주었습니다.
또 이곳에서 멀지 않은 빌라노란 곳에는 베르디 기념 병원이 있습니다. 1887년 <오텔로>가 대성공을 거두자 향토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그 수입으로 이곳에 병원을 지어 바쳤습니다.
이 병원에서 남쪽으로 2km.부세토에서는 3km쯤 되는 곳이 산 아가타입니다. 긴 수풀 사잇길을 한참 들어가면 길가에 '빌라 베르디'가 나옵니다. 숲으로 둘러싸인 외떨어진 건물입니다. 베르디는 35세 때인 1848년 이 곳의 농장을 사들인 후 죽을 때까지의 후반생을 이 집을 근거지로 하여 살았습니다.
* 빌라 베르디
<리골레토>를 비롯하여 <오텔로>,<아이다> 등 많은 명작들을 써낸 것도 이 농장에서였습니다.
빌라 베르디 안에는 대작곡가가 지금 외출 중이기나 한 것처럼 그의 日常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현관 입구에 선 두 번째 부인 주세피나의 像은 여기가 세상의 이목에서 멀리 떨어져 단둘이 단란했던 숨은 행복의 거소였음을 말해 줍니다.
<리골레토> 등을 작곡한 피아노도 그대로이고 우산,장갑 등 쓰던 물건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방 하나에는 베르디가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에서 숨질 때의 방을 그가 죽은 지 31년 후인 1932년에 옮겨 재생시켜 놓았습니다. 죽을 때 입던 옷도 와 있고, 데스마스크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 줍니다.
넓이가 7헥타르나 되는 정원은 아름드리 나무로 빽빽합니다. 베르디에게 정신적인 안식을 주던 자연입니다. 그는 이 집에 살 때 아침 5시에 일어나 숲으로 사냥을 나갔고 어떤 때는 종일 뜰에서 밀,옥수수를 심는 등 밭일을 했습니다. 자기 집을 자주 찾아온 거리의 악사 하나를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 두번째 부인 주세피나
이 악사는 베르디를 음악의 길로 나가게 하도록 그의 아버지에게 진언했고, 그래서 베르디는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후년 베르디는 그 老악사를 찾아내어 이 산 아가타의 농원에서 살게 했습니다. 베르디는 그 악사를 잊지 않듯이 일생을 고향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맴돈 사람입니다.
고향 땅 외에 베르디의 가장 큰 활동 무대는 밀라노였습니다. 베르디 오페라의 홈 그라운드 격인 밀라노의 라 스칼라 가극장에는 오페라 박물관의 일실(一室)을 '베르디의 방'으로 꾸며 놓았습니다.
* 라 스칼라 극장 내부
베르디가 19세 때 시험을 쳤다가 입학하지 못한 당시의 밀라노 음악원은 베르디가 죽던 1901년 이래 베르디 음악원이 되었습니다.
베르디가 마지막 숨을 거둔 그랜드 호텔은 라 스칼라 가극장에서 멀리 않은 곳에 있는데 아직도 호텔입니다.
베르디는 밀라노에 있는 '음악가 휴식의 집'에 묻혔습니다. 베르디의 동상이 선 부오나로티 광장, 그 광장 한쪽 가에 3층 짜리 '음악가 휴식의 집'이 있습니다. 베르디는 죽기 전 유언에서 700만 리라의 거대한 유산 중 일부로 불행한 음악가들이 여생을 보내는 양로 기관을 설치하고 자신도 죽은 후 여기서 안식하기를 희망했습니다.
* 음악가 휴식의 집
베르디가 죽은 다음 해인 1902년에 완성 된 '휴식의 집'에는 60여 명의 각국 음악가들이 살고 있고, 안뜰 정면 영묘(靈廟)에 베르디와 두 번째 아내 주세피나의 무덤이 나란히 있습니다. 무덤 위에는 '모두를 위해 울었고 사랑했다'는 碑銘이 쓰여 있습니다.
* 베르디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