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프레임 벗어야 진짜 광복
‘러시아 공관으로 피란’ 아관파천
노골적인 국왕 폄하의 뜻 담겨
갑오경장은 서울 점령 ‘갑오왜란’
을미사변도 ‘을미왜변’이 마땅
대한제국 선포 직전 전개된 주요한 세 사건을 먼저 돌아보자. 대한제국 탄생에 직접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소위 ‘갑오경장’(1894)-‘을미사변’(1895)-‘아관파천’(1896)이다. 세 사건의 명칭이 어떤가. 역사는 누구의 시각으로 특정 사건에 어떤 이름을 붙였느냐는 것으로부터 분별돼야 한다. 이 명칭들에는 일제의 시각이 반영돼 있다. ‘식민지 프레임’이다. 다른 말로 식민사관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의 근대적 서술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의 손에 의해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1894년 6월 일본군 침략 이후 조선의 국가 상황은 ‘갑오왜란’의 시각으로 재규정돼야 한다. 그해 6월 26일 80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3일 경복궁을 침공해 왕을 생포했다. 이후 전국 각 지방에서 계속된 일본군의 무력행위는 실제 전쟁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우리 역사에서 그 전쟁을 누락시켰다. 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일제가 친일파(당시 ‘왜당 정부’라 불림)를 앞세워 벌인 일종의 ‘사이비 개혁’을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면서 정작 갑오왜란은 감쪽같이 감췄다. 무력행위를 덮고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또 ‘을미사변(乙未事變)’은 무슨 말인가. 한 나라의 왕비가 일본 군대와 자객들에 의해 시해당한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그런 만행에 ‘사변’이란 중립적 표현을 붙여놓았다. 2000년대 들어서며 대한제국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그런 재평가가 이뤄지기 전이라고 해도 적어도 ‘을미왜변’이라고는 해줘야 우리의 시각이 조금이라도 반영된 명칭일 것이다. 1592년(임진년) 일본의 침략을 임진왜란이라고 했듯이 ‘갑오왜란’ ‘을미왜변’이란 작명도 가능할 텐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해놓은 틀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란 용어는 국왕에 대한 노골적인 폄하의 뜻이 담겼다. ‘아관’은 러시아 공관의 한문 표기다. ‘파천’은 왕이 도성을 버리고 지방으로 피란 가는 것을 말한다. 고종은 도성을 버리지도 않았고 지방으로 피란 가지도 않았다. 당시 외국에선 대부분 ‘망명(asylum)’이라고 불렀다. 고종 실록에는 ‘이어(移御)’나 ‘이필주어(移蹕駐御)’ ‘이차(移次)’라고 했다. 일본 공사관과 ‘한성신보’ 그리고 친일파들만이 ‘파천’이라고 불렀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멸망한 아시아·아프리카 나라들(인도·알제리·모로코·사우디아리비아·이라크·이란·캄보디아·미얀마·베트남·라오스·대만·필리핀 등) 중 국왕이나 국민이 국내외에서 망명정부를 세워 반제투쟁을 50년 넘게 이어간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러시아 공사관 내의 ‘국내 망명정부’든, 덕수궁의 ‘대한제국 망명정부’든, 중국 상하이의 ‘해외 대한민국임시정부’든 이 망명정부들은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민족사의 영광으로 기록될 일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제1차 국내 망명정부’를 수립했다면, 러시아 수비대의 지원 등 각종 안전장치를 마련한 후에 덕수궁(경운궁)에서 선포한 대한제국은 ‘제2차 국내 망명정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흐름으로 보아야 1919년 거국적인 3·1만세운동에 힙입어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만들어지며 국호를 정할 때 독립운동 지사들이 대한제국을 계승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우리는 먹고사는 데 바빠 우리 역사를 제대로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하면서 산업화-민주화, 보수와 진보의 이념 대립 속에 제대로 보지 못한 역사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 이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새로 써나가야 할 또 하나의 시각은 명칭부터 달라져야 한다. ‘식민지 프레임’을 벗어나야 진정한 광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