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연천 경순왕릉(敬順王陵)

산야초 2017. 9. 16. 23:35

[경기도 문화유산 답사] [2] 연천 경순왕릉(敬順王陵)

입력 : 2017.09.15 09:50

    연천 경순왕릉(敬順王陵)
    사적 제244호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번지 일대

    신라, 삼국을 통일하다

    백제나 고구려와 비교하면 불리한 입지적 여건으로 때로는 백제에 의존하거나 고구려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야 했던 신라가 660년 7월 29대 태종무열왕에 이르러 나당 연합군과 함께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다. 이어 668년 9월, 30대 문무왕에 이르러 고구려를 함락시키고 마침내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룩하니 한반도에 등장한 최초의 통일국가이며 이렇게 통일신라는 역사상 최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후 귀족들과의 갈등에 따른 반란 등으로 왕권은 약해지고 정국은 혼란에 빠지면서 통일왕국 신라는 바람 잘 날 없는 난국이 이어진다.


    혼란기에 접어든 통일왕국

    통일 후 극심해진 권력투쟁으로 36대 혜공왕 때부터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나 왕을 살해하기에 이르더니 이후 40대 애장왕, 43대 희강왕과 44대 민애왕이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르렀으며, 51대 진성여왕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젊은 남자들과의 음사(淫事)에 열중하니 조정은 엉망이 되고 만다. 결국, 진성여왕은 병들어 사망하고 태자로 세웠던 헌강왕의 아들 52대 효공왕이 이어받았으나 그 역시 색(色)에만 빠져들어 신하들이 애첩을 죽여버리고 실권을 장악하니 효공왕은 허수아비로 지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실권을 장악한 왕비 박 씨 일족이 김 씨 왕족에서 박 씨 왕족으로 바꾸기 위하여 효공왕을 살해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박 씨가 이어받은 신라왕조

    신라는 건국시조 박혁거세 이후 8대 아달라왕까지 박 씨가 왕위에 있었지만, 9대 벌휴왕 16대 흘해왕까지 석 씨, 이후 17대 내물왕 52대 효공왕까지 김 씨 왕조가 560년간 이어지다가 53대 신덕왕에 이르러 다시 박 씨에게 왕조를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신덕왕도 이미 연로하고 병세가 완연하여 5년 만에 죽는다. 그 아들이 54대 경명왕도 병치레로 7년 만에 죽게 되니 동생이 이어받아 55대 경애왕이 되니 이들 3대 임금이 박 씨 왕조이다.


    바람 앞에 등불, 천년왕국 신라

    그러나 이렇게 박 씨 왕조가 다시 이어받을 때쯤이면 신라왕조는 그 명이 다하게 되니 이미 51대 진성여왕 때  전국 각지에는 군웅이 할거하고 도적과 민란이 급증하며 서라벌 주변만 빼고는 저마다 왕을 칭하는 군벌이 난립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상주의 아자개 아들 견훤과 궁예가 이끄는 양대 세력이 대표적으로 손꼽히니 역사는 이때를 후삼국 시대로 기록한다.

    궁예와 견훤이 각축을 벌이는 동안 신라는 최 씨 왕조로 바뀌면서 사실상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고 서라벌을 지키기 급급하였는데 54대 경명왕 대에 이르러 마침내 왕건이 태봉의 궁예를 쳐내고 고려의 건국을 선포(918년 6월)하였으며, 견훤의 아비 아자개가 왕건에 투항(918년 9월)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천하의 대세는 왕건에게 기우는 듯싶었다.

    이렇게 되자 신라의 54대 경명왕과 55대 경애왕은 친 왕건 노선을 표방하면서 견훤과 왕건의 화친을 반대하고 견훤을 믿지 말라거나 시급히 출병하여 제압하라는 권고를 왕건에게 간청하게 되는데 이는 견훤에게는 분노를 사는 일이 되는바 927년 11월, 마침내 견훤이 군사를 몰아 서라벌로 쳐들어가니 신하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제를 올리던 경애왕은 백제군에게 잡혀 죽기 직전에 자결하였고 왕비는 견훤에게 강간당하였다는 기록만 남게 된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

    이렇게 경애왕을 죽이고 난 견훤은 다시 김 씨를 택하여 대를 잇게 하니 56대 경순왕이다.

    경순왕의 이름은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후손으로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고려 왕건에게 기울어 있었으며, 왕건이 백제군을 완전 퇴각시켰음을 알려오자 감사 표시와 함께 경주를 방문해주도록 요청한다. 그리하여 931년 2월 왕건은 서라벌에 도착하여 경순왕과 신하들의 환대를 받았으며 두 달여 머물다가 돌아가게 되는데 그 일행의 품행이 방정하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이후 백제의 견훤은 금강을 후계자로 지목한 탓에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유폐된다. 신검이 즉위하게 되나 견훤이 탈출하여 왕건에게 몸을 의탁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경순왕은 자신도 고려에 투항하는 문제를 논의하게 되고 태자와 일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이미 신라는 자력으로 국방이 어렵고 현 상황에서 고려와 일전을 불사한다면 오히려 그 화(禍)가 백성에게 미치어 군주로서 도리가 아니라며 고려에 항복할 것을 통보한다. 이에 대하여 935년 11월 왕건이 대사를 보내 항복을 받아들이니 경순왕은 전쟁 없이 순조롭게 나라를 넘김(양국:讓國)으로서 천년왕국 통일신라는 마침내 992년의 사직에 종언을 고하게 된 것이다.

    경순왕 영정. 경주 숭혜전(崇惠殿)에는 초본 1점을 비롯하여 총 5본의 영정이 있다고 전해진다.

    신하들과 함께 송도에 도착한 경순왕은 태조 왕건의 환영을 받으며 정승공(政丞公)에 봉해지니 이는 태자보다 높은 서열 2위로 신라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최초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되었으니 훗날 사심관 제도의 시작이다. 이후 왕건은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과 결혼시켰고 경순왕 사촌누이는 왕건과 결혼하니 4부인 신성왕후 김 씨이다. 그리하여 경순왕은 왕건의 사위가 되었으며, 또한 3대 정종과 4대 광종이 모두 낙랑공주와 친남매 간이니 처남 매부지간인 것이다.


    신라 경주를 벗어난 유일한 신라 왕릉

    귀부한지 43년 만인 978년(고려 경종 3년), 왕건보다 35년을 더 살고 경순왕이 승하하니 소식을 접한 신라유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였으며 경순왕의 운구를 모시고 장례를 치르러 경주로 가려는 행렬이 거리를 가득 메웠지만 아쉽게도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운구 행렬은 정지된다.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계기로 혹여나 신라 유민들이 동요하거나 민중 봉기가 있을까 우려한 고려 조정은 '왕의 구(柩)는 도성에서 100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국법이라며 운구 행렬을 멈춰 세우니 그 장소가 지금의 임진강 고랑포 미치지 않은 곳이며 결국 경순왕은 더는 남하하지 못하고 근처 나지막한 언덕에 모셔졌다.

    이렇게 생각지 못한 곳에 묻히게 된 경순왕릉은 임진왜란 이후 실전(失傳)되고 말았는데 1727년(영조 3년)에 후손이 '敬順大王葬地(경순대왕장지)'라는 6자가 새겨진 지석을 발견하고 상소를 올려 왕명으로 릉(陵)을 정비하고, 장단부(長湍府)에서 매년 봄·가을로 제향(祭香)을 올리도록 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다시 또 잊혔는데 왕릉이 위치한 이곳이 휴전선과 가까운 민간인통제선 안에 있는 까닭에 사람들의 발길이 멀어졌다.

    그렇게 또 잊힌 채 지나던 중 1973년 이 지역을 관할하던 중대장이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 비석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나타난 경순왕릉은 1975년에 사적 제244호로 지정되고 경내 일원을 보수, 정비하였으며 협소하나마 능역은 민간인통제선에서 해제시킴으로써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참배 및 답사를 할 수 있다.

    경순왕릉 전경. 정자각은 없지만, 능침은 곡장을 둘렸으며 비석과 상석, 장명등, 석양과 망주석 등의 석물을 갖추었다.
    능침은 올라가 볼 수 없지만,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 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6·25전쟁 때 이곳이 격전지였는지 지금도 총탄 자국이 선명하다. /조선일보 DB
    비각은 1986년에 지었는데 그 안에는 경순왕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고랑포구 주변에 방치되어 마을 주민이 빨래판과 징검다리로 이용하던 것을 1976년 고랑포 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다고 하며, 영조 때 후손들이 발견한 신도비로 추정하여 이곳으로 옮겨 비각을 세웠다.
    비각 안에 세워진 비석은 마모 상태가 심하여 몇 글자만 판독될 뿐, 내용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언제인가 비석 전면에 사람의 얼굴 형상이 나타나고 있어 경순왕께서 현신한 게 아닌가 하는 흥미로움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비각 옆으로는 최근에 지은 재실이 있다.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데 신라 김 씨 연합대종회 주관으로 많은 김 씨들이 참여하니 1,000명이 넘게 참석할 때도 있다고 한다. 조선왕릉 제향보다 규모가 더 크게 느껴진다.
    경순왕릉은 최전방 민간인통제선에 포함될 만큼 북쪽 지역에 위치하였지만, 관심이 가는 문화유적으로 최근 들어 많은 탐방객이 찾아오고 있으며, 현장에는 문화해설사가 상주하여 희망하면 언제든지 상세한 해설을 들려준다. 해설사가 설명하는 모습.

    경애왕이 피살되고 견훤에 의해 옹립된 경순왕은 아무런 실권도 없는 이름만 왕일 뿐, 한 일도 없고 할 일도 없었으며 무기력하게 왕건에게 항복하였다는 혹평을 가끔 보고 듣는다. 그러나 선왕이 무참히 죽임을 당한 후 왕위에 올라보니 나라는 이미 파탄지경이며 노심초사 천년사직의 안위와 백성의 평안을 걱정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천하대세를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명분과 군왕의 권위를 내세워 이미 강성한 국가가 되어버린 고려와 최후의 일전도 불사한다고 버틴다면 왕실과 귀족들의 척살은 물론 무고한 백성을 먼저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며 천 년의 영화를 지켜온 신라의 문화와 유적이 파괴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니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긴 것은 비록 신라왕조의 992년 사직에 마침표를 찍은 마지못해 한 일이지만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이는 당시 민심이 경순왕의 결정을 따르고 흠모하여 각지에 사당을 짓고 경배한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 있게 된 경순왕릉, 잊히면 누군가가 찾아내고 또 잊히면 어떻게든 밝혀져서 마침내 사적 제244호로 지정되고 관리되고 있는 경순왕릉은 서울에서도 멀지 않아 하루 일정으로 들러보기에 적당한 곳이다.

    자료 제공 = 내 나라 문화유산 답사회(http://band.us/@4560dap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