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추적, 일제는 민족정기 훼손 위해 고의로 임청각을 철로로 관통했나

산야초 2017. 10. 4. 23:22

추적, 일제는 민족정기 훼손 위해 고의로 임청각을 철로로 관통했나

일제는 고의로 임청각을 훼손했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에 안동의 '임청각'이 소개됐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때, 철도 공사로 인해 가옥의 절반 가까이 수용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이것이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훼손하기 위한 '고의'였는지 논점을 짚어보았다.

    입력 : 2017.10.02 07:33

    [사회]

    지난 8월 22일 찾아간 경북 안동의 임청각(臨淸閣) 앞에는 '국무령 이상룡 생가'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상룡 선생이 태어났다는 임청각 안채 우물방 앞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대문 안쪽 게시판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8·15 광복절 경축사를 인쇄한 종이가 걸려 있었다.

    "경북 안동에 임청각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입니다. (중략)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습니다. 99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토막이 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경북 안동시 임청각의 항공사진. 집 앞으로 중앙선 단선철로와 낙동강 제방도로인 석주로가 지나간다. /안동시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 이후 임청각(보물 182호)은 찾아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날 오후 방문객을 위한 소책자는 이미 동이 난 상태였다. 군데군데 금이 간 외벽과 깨진 기왓장을 보수하기 위해 공사인부들도 수시로 집 문턱을 넘나들었다. 임청각은 지난해 8월부터 안동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사랑채인 군자정(君子亭)과 사당 등을 보수하는 공사에 착수한 상태였다. 공사안내판에 적힌 완공시점 '8월 29일'을 맞추기 위해 속도를 내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 현장 관계자는 "원래 시에서 예산이 찔끔찔끔 나왔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얘기한 다음에 시에서 예산이 많이 내려왔다"고 했다.


    문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를 전후로 고관대작들의 발걸음도 이어지고 있다. 광복절 축사 직전인 8월 10일에는 이낙연 국무총리도 이곳을 찾았다. 이낙연 총리는 "대통령님께 '경북으로 휴가를 다녀오려고 한다'고 했더니 안동으로 가보라고 하셨다"고 했다. 광복절 직후인 8월 18일에는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 8월 19일에는 김종진 문화재청장이 관계 공무원을 대동하고 임청각을 찾았다. 안동시 유홍대 문화예술과장은 "지난해 4억3000만원의 예산이 책정돼 오는 8월 말 준공 예정으로 마무리공사를 진행 중"이라며 "내년 5월 임청각 주변 종합정비계획수립 용역 결과가 나오는 대로 결과에 따라 추가 정비를 해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안동 시골에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임청각이 처음 세간에 회자된 것은 유홍준 교수의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개되면서다. 노무현 정부 때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는 1997년 출간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에서 임청각을 이렇게 언급했다. "안동 시내 동쪽을 감싸고 있는 낙동강 강둑으로는 일제 때 중앙선 철길이 놓였는데 그 철둑은 법흥동 칠층전탑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고, 그리고 낙동강을 유유히 내다보는 전망 좋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고성 이씨 종택과 임청각 군자정은 철길로 인하여 행랑채를 잃어버렸고 지금도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과 소음을 감당하고 있으니 그 열악한 환경에서 나라의 국보와 보물이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안쓰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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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읍성 고지도와 안동역, 임청각, 중앙선 철로의 현 위치. /안동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개


    유홍준 교수의 지적처럼, 임청각은 조선시대 민간 주택의 규모 상한선인 99칸 주택이다. 일제 때 집 앞으로 중앙선 단선철로가 개설되면서 99칸의 가옥 중 30칸 정도를 철로 개설을 위해 수용당해 지금은 70칸 정도만 남아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임청각이 상하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의 생가란 점과 맞물려 "일제가 민족정기 훼손을 위해 고의적으로 집 앞으로 철길을 냈다"는 설이 마치 정설처럼 돼버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언급한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다"는 말에는 이런 시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하지만 1942년 중앙선 개통보다 10여년 앞서 들어선 안동역의 위치와 인근 지역의 등고선이 표시된 지형도를 확인해 보면 중앙선 철길은 영남산을 등지고 낙동강가에 있는 임청각 경유가 불가피했다는 지적이다. 소위 '민족정기 훼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5번 국도가 놓여진 코스를 따라 안동 남후면에서 안동대교를 건너 북후면을 지나면 영주로 접근하는 이동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경우 당시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고을이자 경북선 철도의 종점인 안동역을 경유하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안동에 처음 철마(鐵馬)가 들어온 것은 중앙선 개통 10여년 전인 1931년 경북선 점촌(문경)~안동 구간 개통과 함께다. 안동은 조선 때만 해도 '안동대도호부(大都護府)'로 불리며 권문세족들이 많이 살던 큰 고을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이미 경부선 철로가 지나가는 경북 김천에서 상주~점촌(문경)~예천~안동을 연결하는 철로를 개설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조선철도(조철)'라는 사설철도(私鐵)회사는 철도부설 면허를 획득해, 조선총독부가 1913년 이미 고시한 노선에 따라 118㎞의 경북선 철로를 놓았다. 안동읍성(邑城)의 남문 밖에 '경북안동역'이란 이름의 철도역을 개설했다. 안동대도호부가 있던 지금의 안동 시내 웅부공원(옛 안동군청 터)에서 직선으로 300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 철도역이었다. 굳이 '안동역' 앞에 '경북'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만철(滿鐵·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 이미 운영 중이던 '안동역'(지금의 중국 단둥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중앙선 철로가 임청각 앞을 지나게 된 것은 안동에 철도가 들어온 지 10여년이 지난 1942년이다. 후일 만철 총재를 지낸 조선총독부 철도국장 오무라 다쿠이치(大村卓一)가 입안한 '조선철도 12개년 계획'에 따라 경부선·경의선에 이은 제2 한반도 종관(縱貫)철도 계획을 세우면서다. 이 같은 계획에 따라 1935년 경북 경주에서 영천~의성~안동~영주~제천~원주~양평을 거쳐 청량리(동경성역)에 이르는 노선이 확정됐다. 이듬해인 1936년 착공한 중앙선은 1942년 '경경선(京慶線)'이란 이름으로 개통됐다. 경성과 경주를 잇는다는 뜻이다.


    당시 중앙선 철로를 개설할 때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물자가 부족할 때다. 기존 철로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수요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경북 북부 최대 도시이자, 당시만 해도 경북선의 종점이었던 안동역 경유는 당연했다. 지금은 중앙선·경북선·영동선 등 3개 철로가 교차하는 영주역이 경북 북부 철도교통의 중심이지만, 당시만 해도 안동역이 철도 교통 요지였다. 경북선의 종점이 안동역에서 영주역으로 변경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66년 경북선과 영동선을 영주에서 직결시키면서다. 지금 영주에 있는 한국철도공사 경북본부의 전신인 철도국은 1964년까지만 해도 안동역에 있었다.

    중앙선 철로 옆의 법흥동 칠층전탑. /이동훈

    이미 개설된 안동역을 기점으로 철길이 영주로 북상할 경우 낙동강 제방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가 안동 뒷산인 영남산 계곡을 따라 영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하천 제방 위에 철길을 부설하는 것은 일제 때 흔히 쓴 방법이다. 철로개설과 토지수용에 따른 민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철도개설과 함께 하천 제방을 보강해 여름철 홍수에 대비할 수 있는 여러 장점이 있다. 경부선도 밀양강과 낙동강 제방을 따라 부산으로 간다. 서울에서도 경원선(현 경의중앙선에 편입) 철로가 한양도성을 피해 한강과 중랑천 제방길을 따라 북상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안동은 조선시대 때인 1605년 을사년 대홍수 때 안동읍성이 무너져내리고 읍성문이 떠내려갈 정도로 홍수에 취약했다. 안동이 홍수피해로부터 해방된 것은 1976년 안동댐 축조 후다.


    급회전이 힘든 철도의 특성상 안동역에서 90도로 방향을 꺾어 영주로 북상하려면 민가가 밀집한 안동읍성을 지나가야 한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도심 한복판으로 철로를 개설하는 것은 지금도 골치 아픈 부분이다. 안동읍성의 옛 지도를 확인해 보면 중앙선 철길은 민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안동읍성 남문 밖 안동역에서 동문 밖으로 난 임청각 앞으로 지나가는 노선을 확정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역과 임청각은 불과 1㎞ 거리로 철로가 피해가기에 지나치게 가깝다.


    중앙선 부설 시 안동역을 경유해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낙동강철교가 놓인 것도 안동역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안동 낙동강철교는 중앙선 부설 때인 1938년 준공됐다. 앞서 1934년 준공된 안동교(인도교)와 나란히 놓였다.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 때 육상공사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들고 공기가 오래 걸리는 교량 부설을 피하려 한 일은 흔했다. 호남선을 부설할 때 대전을 분기점으로 정한 까닭은 금강교량 건설에 드는 건설비용 증가와 공기지연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전서 분기할 경우 기존 경부선 교량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교량을 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도가 컸다는 방증이다.


    민족정기를 끊으려 임청각 앞으로 철길을 놓았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부합하지 않는다. 임청각 당주(堂主)였던 이상룡 선생이 1913년 6월 임청각을 일본인 오카마 후사지로(小鎌房次郞)에게 매도한 것은 2015년 처음 발견된 매매계약서를 통해 확인됐다. 일본인 손에 넘어간 임청각은 팔린 지 두 달 만에 다른 고성 이씨 일가에 재인수됐지만 이미 이상룡 선생의 손을 떠난 상태였다.


    이상룡 선생이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은 1911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것은 1925년부터 1926년까지다. 중앙선 노선계획을 확정한 1935년보다 3년 전인 1932년 이상룡 선생은 이미 사망한 터였다. 게다가 중앙선 착공 당시는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잇단 의거 이후 일제가 불온한 조선인으로 부른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이뤄지면서 독립운동은 사실상 와해상태에 있었다.


    민족정기 훼손 주장이 맞다면 왜 일제가 뒤늦게서야 민족정기를 끊으려 나섰는지가 먼저 규명돼야 한다. 중앙선이 개설된 1930~1940년대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유림(儒林)을 중심으로 철도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보였던 구(舊)한말과 달리 철도의 중요성에 이미 눈뜬 시기다. 한때 번성했던 상주, 공주, 청주 등 대고을이 간선철도 노선에서 비껴가면서 몰락한 반면, 허허벌판이었던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들어오면서 충남도청까지 옮겨올 정도로 급부상했다. 전국 각지에서 지역 유지들과 일본인 거류민을 중심으로 철도개설 청원이 오히려 활발했을 때다.


    결국 중앙선 부설과 함게 임청각 일부가 수용돼 헐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가 민족정기를 끊으려 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여러 정황을 따져봤을 때 당시 상황에서 중앙선을 부설하면서 안동역에서 1㎞ 떨어진 낙동강변의 임청각을 경유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오히려 안동 관내를 통과하는 중앙선 철길 옆에 남아 있는 법흥동 칠층전탑, 안동역 주차장의 운흥동 오층전탑과 같이 철도부설에 따른 문화유산 파괴를 최소화하려는 흔적들이 여럿 있다. 임청각을 민족정기 훼손과 연관해 보는 것은 일제 때 벌어진 모든 일을 선악(善惡) 구도 속에서 바라보는 과도한 피해망상에 다름 아니다.

    2020년 중앙선 철로 이설과 함께 이전을 앞둔 안동역. /이동훈


    2020년 이설되는 중앙선 철로

    현재 안동에서는 중앙선 철도를 곧게 펴는 작업이 한창이다. 영주역에서 임청각과 안동 도심을 거치지 않고 안동 외곽을 통해 의성역까지 곧장 내려가게 하는 중앙선 복선전철 공사다. 이 공사에 따라 안동 원도심에 있는 안동역은 오는 2020년까지 외곽인 안동 송현동 버스터미널 옆으로 이전한다. 이날 찾아간 안동역 이전 예정지에는 현재 노반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는 2020년까지 공사가 마무리되면 현재 청량리역에서 안동역까지 3시간30분가량 걸리는 이동시간은 1시간20분대로 줄어든다. 임청각도 앞을 가로막는 중앙선 철길에서 해방된다.


    안동역 이전 시 안동 원도심의 공동화 현상은 불가피하다. 안동역 이전 예정지인 송현동은 원도심에서 택시비만 1만원 가까이 나올 정도로 제법 거리가 있다. 2011년 안동역 옆에 있던 안동버스터미널이 외곽인 송현동으로 옮긴 후 이용객들을 적지 않은 불편을 호소해왔다. 안동시 우병식 도시건설국장은 "경북도청이 안동과 예천 경계로 오는 등 외부적 요인으로 구도심의 공동화가 진행 중인데 기차역마저 옮겨가면 공동화가 더 심해질 것"이라며 "안동역 부지가 5만3000여평(17만5000㎡)쯤 되는데 부지 소유주인 한국철도시설공단, 한국철도공사와 함께 협의해 도시재생 활성화를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하는 방향에 대해 협의 중"이라고 했다.


    중앙선 철길 이설 시 옛 철길을 따라 난 왕복 2차선 제방도로 석주로를 어떻게 처리할지 문제도 남는다. 중앙선 철길이 사라지면 임청각은 또다시 도로와 마주해야 한다. 일제가 놓은 중앙선 철길은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이보다 통행량이 훨씬 많은 도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탑승한 안동발 청량리행 무궁화호 1608호 열차는 안동역을 떠난 지 1분 만에 임청각 앞을 스쳐 지나갔다. 중앙선 철길 옆 제방도로 위로는 자동차들이 열차보다 더 빨리 달리고 있었다.


    <본 기사는 주간조선 2472호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