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학은 크게 보아 중국의학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조선 고유의 의학 전통 속에서 나름대로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첫째, 세종의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선초부터 조선 의학은 중국과 다르다는 ‘동국東國’ 의식이 강했다. 조선 사람의 치료에는 동의東醫가 필요하다는 정신이다. 둘째, 조선 의학은 중국의 『내경』에서 천명되었듯이 예방과 양생을 중시하였다. 『내경』에는 “성인은 이미 발생한 병을 치료하지 않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병을 치유한다”고 하였다. 발병發病하기 전에 미리 조섭과 양생을 통해 예방하는 방법을 우선하였다. 양생은 단순히 신체의 단련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심신心身의 조화로운 수양을 강조하였다.
이미 15세기에 향약鄕藥 의서들을 집대성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 출간은 이상과 같은 조선 의학의 독자적인 특징들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전순의全楯義가 저술한 『식료찬요食療纂要』와 같은 의서는 병든 후의 약치藥治보다는 미리 음식을 통해 조섭하는 식치食治를 강조하였다. 특히 조선 사람은 조선의 ‘식물食物’로 치료하자는 향약의 정신과 어울려 더욱 독특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선진 의술로 인정받은 외과 중심의 침구 의학
16세기에 간행된 임언국의 종기 치료는 침구술과 밀접하게 결합하면서 발달해 온 조선 외과 의학의 전통이었다. 임언국의 치종 전통은 그 후 17세기 동아시아에 자랑할 만한 침구의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니, 바로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을 저술한 허임이 그 장본인이다. 허임의 『침구경험방』은 멀리 일본에까지 퍼져 오사카의 의원들 사이에 꽤나 인기 있는 의서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되면서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의 선진 의서들을 원했는데 『침구경험방』은 항상 그 목록에 올랐다. 허임은 조선 침구 의학의 진수로서 일본 의원들의 숭모崇慕를 받았던 것이다.
약물 의학의 집대성
조선 의학사의 명의를 논하면서 17세기 초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한 허준을 빼놓을 수는 없다. 허준은 조선 성리학의 인간관 즉 마음의 수양을 강조하는 철학을 ‘몸’의 수련으로 확장하여 적용하였다. 허준은 ‘자연을 닮은 인간’을 강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조선유교의 정치 이념과 도덕의 준수를 심신 수양의 기초로 삼았다. 양생의 철학과 실천 윤리를 하나로 통합해 제공한 셈이다. 이 점에서 그는 유의儒醫라고 불릴 만하다. 유의는 의원이지만 유학에 밝은 자이며, 유학자이지만 의학에 밝은 자를 말한다. 즉 성리학과 의학에 모두 해박한 경우이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통해 임언국과 허임으로 이어지는 외과 중심의 침구 의학 전통과는 다른 약물 의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 『동의보감』의 <탕액편>은 본초本草 지식의 총체로 당시까지 축적된 조선의 동식물과 광물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허준은 당시 서울, 경기 지역의 실학풍을 받아들여 경험 과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그 결과 조선 본초학의 수준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신간新刊 의서 『동의보감』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는데 조선은 이를 번번히 거절하였다. 이에 일본은 『동의보감』 <탕액편>이라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만큼 <탕액편>은 『동의보감』의 핵심이었다.
효과 좋은 처방 선별, 경험방의 대두
17세기에는 수많은 의원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검증된 효과 좋은 처방들을 책으로 펴내고 있었다. 이른바 경험방의 시대였다. 두 차례 호란으로 부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은 비운의 학자 신만申曼은 자신이 수집한 다양한 처방들을 모아 『주촌신방舟村新方』이라는 경험방을 저술하였다. 시골의 백성들을 위해 향산鄕産의 약재만을 사용했다는 서문은 조선 초의 향약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주촌신방』에는 특별히 학질과 두창 치료에 좋은 처방들이 상당 수 기재되어 있다. 조선시대 가장 널리 활용된 두창(천연두) 치료방인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은 박진희가 저술하였다. 일찍이 왕실의 두창 치료에 의약동참으로 참가하는 등 세상에 의술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현종 임금이 직접 나서 『두창경험방』 간행을 독려할 정도였다. 두창 감염 시 주의할 음식과 함께 발열을 동반하는 감염 초기부터 시작하여 발진 단계, 부풀어 오르는 단계, 진물이 터지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에 발진이 수렴되어 꺼져 들어가는 단계로 구분한 처치법은 이후 조선 두창학痘瘡學의 표준이 되었다. 이밖에도 이석간李碩幹, 채득기蔡得己, 박렴朴濂, 허임許任과 같은 당대 명의들의 처방을 모은 『삼의일험방』, 『사의경험방』 등이 다수 간행되었다.
간편함과 실용성을 강조한 조선 의학의 확산
17세기는 『동의보감』이라는 조선의학의 젖줄이 탄생하였을 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방들이 축적되고 있었다. 이는 이후 조선후기 의학 발달의 튼실한 자양분이 되었다. 수많은 향의鄕醫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우리는 유이태라는 거창 출신의 의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유이태는 후일 허준의 스승으로 오해될 만한 수많은 일화를 남겼을 정도였다. 조선후기는 의학 지식과 의서의 보급으로 의원들이 늘어나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의술의 대중화가 가속화 되었던 시기였다. 동시에 양적으로 늘어난 의원들 간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소아과, 부인과, 두창과 등 일종의 전문화 양상도 나타나고 있었다. 18세기 조선 의학의 실용적인 면모는 강명길의 『제중신편濟衆新編』에 잘 나타난다. 전형적인 중인 집안 출신의 강명길은 의과 합격 후 내의원에 근무하면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정조는 『동의보감』의 장점을 이어받으면서도 단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의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강명길은 『동의보감』의 번잡함을 덜어내는 한편 새로운 경험방을 보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제중신편』으로 『동의보감』의 실용화가 진전되자, 간편함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점점 가속화되었다. 치료의 이론적 근거는 간데없고 단지 처방과 약재를 나열하여 사전처럼 만든 간편 의서들이 속속 출간되었다. 『의방활투醫方活套』, 『의종손익醫宗損益』, 『방약합편方藥合編』 등이 그것으로, 황도연은 이들 책을 만든 대표적인 의원이었다.
한편, 다산 정약용은 새로운 패러다임과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진정한 의학자였다. 정약용은 미신에 가까운 의학론은 비판하고, 필요하다면 중국이나 서양의 선진 의학을 받아들였다. 당시까지 간행된 중국의 홍역 의서들을 모두 검토한 후 가장 좋은 치료법을 선택했다. 심지어 두창의 독을 인체에 심는 종두법도 시행하였다. 정약용의 『마과회통麻科會通』에는 당시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고개를 저었던 인두법이 소개되어 있다. 기왕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뛰어넘는 실학자 정약용이야말로 조선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진정한 조선의 명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