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너희가 팔아먹은 나라, 우리가 찾으리라"
입력 : 2017.10.18 03:04 | 수정 : 2017.10.18 11:38
[95] 만주로 떠난 사람들과 조선귀족(朝鮮貴族)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에 전국 의병부대 거의 소멸
양명학의 산실 강화도 이건창이 기른 강화학파 집단으로 만주 망명
서울 이회영 형제도 신민회 조직 후 전 재산 털어 떠나
안동 이상룡·김동삼 가문 강화학파·신민회에 동참
전국적으로 이뤄진 조직적 집단 망명… 만주 횡도촌에 총집결
신흥무관학교 세우고 상해 임정도 참여
그 사이 친일파 76명은 총독부로부터 '조선 귀족' 작위와 거액 은사금 받아
나라가 사라지고 만 1910년 경술년 겨울이었다. 중국 간도 땅 유하현 횡도촌에 몇 무리 사람들이 모였다. 모인 사람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강화도에서 온 양명학자 이건승과 홍승헌, 정원하 그리고 소론 출신 서울 갑부 이회영 6형제와 이동녕. 안동에서 온 이상룡도 합류했다. 이상룡은 부유하되 권력과 거리가 먼 남인 출신 안동 사대부였다.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회영, 이시영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합방이 되자 이동녕씨와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해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 그들이 만주로 향하는 동안 한 줌 되지 않는 친일파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있었다.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
풍전등화, 백척간두 따위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스산한 1909년이었다. 1895년 민비 시해, 그리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이어진 망국 대행진 속에 많은 이들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제국에 저항했지만 현실은 정신력과 신념만으로는 바꿀 수 없었다. 1909년 9월 1일, 그 정신력과 신념까지 꺾어버리겠다는 작전이 펼쳐졌다. 일본의 남한대토벌(南韓大討伐) 작전이다.
군대 해산과 함께 많은 군인이 의병에 가담했다. 무기와 전술에서 절대적인 열세였다. 전국 의병 활동이 위축돼갔다. 1909년 전국 의병 전투 가운데 절반이 호남에서 벌어졌다. 일본 통계에 따르면 호남 의병장은 50명, 의병은 4000명에 달했다.(한민족문화대백과) 동학농민혁명의 흐름이 남아 있던 데다, 곡창지대를 수탈당한 반일의식이 큰 지역이었다. 대구에 있던 한국임시파견대 사령부, 보병 2개 연대, 어뢰정 4정이 파견됐다. '위로 진산, 동으로 진주, 남은 목포로부터 일본군이 그물을 쳐놓은 것 같다. 강한 자는 적진에 돌진해 싸우다 죽고 다친 자는 꾸무럭대다 칼을 받았다. 갈 곳이 다하니 죽은 자가 무려 수천명이었다.'(황현, '매천야록')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회영, 이시영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합방이 되자 이동녕씨와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해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 그들이 만주로 향하는 동안 한 줌 되지 않는 친일파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있었다.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
풍전등화, 백척간두 따위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스산한 1909년이었다. 1895년 민비 시해, 그리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이어진 망국 대행진 속에 많은 이들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제국에 저항했지만 현실은 정신력과 신념만으로는 바꿀 수 없었다. 1909년 9월 1일, 그 정신력과 신념까지 꺾어버리겠다는 작전이 펼쳐졌다. 일본의 남한대토벌(南韓大討伐) 작전이다.
군대 해산과 함께 많은 군인이 의병에 가담했다. 무기와 전술에서 절대적인 열세였다. 전국 의병 활동이 위축돼갔다. 1909년 전국 의병 전투 가운데 절반이 호남에서 벌어졌다. 일본 통계에 따르면 호남 의병장은 50명, 의병은 4000명에 달했다.(한민족문화대백과) 동학농민혁명의 흐름이 남아 있던 데다, 곡창지대를 수탈당한 반일의식이 큰 지역이었다. 대구에 있던 한국임시파견대 사령부, 보병 2개 연대, 어뢰정 4정이 파견됐다. '위로 진산, 동으로 진주, 남은 목포로부터 일본군이 그물을 쳐놓은 것 같다. 강한 자는 적진에 돌진해 싸우다 죽고 다친 자는 꾸무럭대다 칼을 받았다. 갈 곳이 다하니 죽은 자가 무려 수천명이었다.'(황현, '매천야록')
의병 사망자가 1만7779명, 부상 376명, 포로 2139명. 말 그대로 초토화였다. 체포된 의병들은 해남에서 하동까지 이어지는 도로 건설에 투입됐다. 도로명은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했다.(한민족문화대백과)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과의 전쟁은 전선을 옮겨야 했다. 많은 무리가 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군으로 변신했다.
1909년 가을, 강화도
그 잔인한 가을, 광양 선비 황현은 강화도에 있는 이건창의 무덤 앞에 있었다. 이건창은 황현, 김택영과 함께 구한말 삼재(三才)라 불리던 사람이다.
이건창은 양명학자다. 할아버지 이시원은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가 프랑스에 넘어가자 동생 지원과 함께 자결했다. 막내 희원에게 '뒷일을 부탁한다'며 담소를 나누다 숨이 끊겼다고 했다.
이건창은 그 피를 이어받고, 집안 대대로 공부한 양명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집권층인 노론이 성리학과 사대주의에 몰두해 있을 때 실용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던 학자였다. 벼슬아치 시절 이건창은 앞뒤 안 가리는 강퍅한 성질로 세도가들과 친하지 못했다.
대신 민심은 크게 샀다. 타협할 줄 모르는 그는 수시로 암행어사로 탐관오리들을 척결해 권력가들 불만을 샀다. 서울 송파와 강화도, 인천 모도에는 그의 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이건창이 사는 강화도에는 많은 후학이 와서 공부를 했다. 이들 양명학자를 강화학파라 부른다. 제도권에는 있되 권력과 거리가 있던 소론파, 현실 직시파들이었다.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과 건방, 동학 정원하, 홍승헌과 함께 황현은 선배 이건창에게 술잔을 올리고 낙향했다. 이듬해 9월 10일 황현은 자결했다. 유언은 이러했다. '식자(識者)로 살기가 쉽지가 않구나.'
1909년 가을, 강화도
그 잔인한 가을, 광양 선비 황현은 강화도에 있는 이건창의 무덤 앞에 있었다. 이건창은 황현, 김택영과 함께 구한말 삼재(三才)라 불리던 사람이다.
이건창은 양명학자다. 할아버지 이시원은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가 프랑스에 넘어가자 동생 지원과 함께 자결했다. 막내 희원에게 '뒷일을 부탁한다'며 담소를 나누다 숨이 끊겼다고 했다.
이건창은 그 피를 이어받고, 집안 대대로 공부한 양명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집권층인 노론이 성리학과 사대주의에 몰두해 있을 때 실용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던 학자였다. 벼슬아치 시절 이건창은 앞뒤 안 가리는 강퍅한 성질로 세도가들과 친하지 못했다.
대신 민심은 크게 샀다. 타협할 줄 모르는 그는 수시로 암행어사로 탐관오리들을 척결해 권력가들 불만을 샀다. 서울 송파와 강화도, 인천 모도에는 그의 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이건창이 사는 강화도에는 많은 후학이 와서 공부를 했다. 이들 양명학자를 강화학파라 부른다. 제도권에는 있되 권력과 거리가 있던 소론파, 현실 직시파들이었다.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과 건방, 동학 정원하, 홍승헌과 함께 황현은 선배 이건창에게 술잔을 올리고 낙향했다. 이듬해 9월 10일 황현은 자결했다. 유언은 이러했다. '식자(識者)로 살기가 쉽지가 않구나.'
황현이 죽고 2주가 지난 1910년 9월 24일 새벽 이건승은 만주로 떠났다. 이미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자살 미수에 그쳤던 그였다. 이건승에 이어 속속 만주에 합류한 이들은 홍승헌, 정원하 그리고 신채호와 박은식이다. 모두 양명학자다. 이건창의 막냇동생 이건방은 강화도에 남았다. 동행하겠다는 동생을 형인 이건승이 '양명학을 이으라'며 눌러 앉혔다. 그 이건방이 만든 계명의숙에서 사학자 정인보가 공부를 했다.
1910년 서울, 이회영 형제
이건승이 만주로 떠난 석 달 뒤 서울에 살던 이회영 집안이 만주로 갔다. 건영, 석영, 철영, 회영, 그리고 시영과 호영 6형제다. 망명은 넷째인 이회영이 주도했다. 서울 명동 상동교회에서 만든 민족단체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양기탁 같은 활동가와 독립운동을 기획해갔다. 1908년 만주로 답사를 떠난 이회영은 만주에 해외독립기지 설립을 결정했다. 뜻이 있었고, 돈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람이 있었다.
이회영 집안은 충북 진천에 사는 양명학자 홍승헌 집안과 친했다. 역시 집안 어른인 이상설 또한 홍승헌과 동향이었다. 강화학파가 차례차례 만주로 떠나고, 이회영 일가는 서울과 경기도에 있는 토지 수백만 평을 모두 팔았다. 이미 이상설은 용정을 거쳐 헤이그밀사로 갔다가 연해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11년 안동, 이상룡과 김동삼
1910년 서울, 이회영 형제
이건승이 만주로 떠난 석 달 뒤 서울에 살던 이회영 집안이 만주로 갔다. 건영, 석영, 철영, 회영, 그리고 시영과 호영 6형제다. 망명은 넷째인 이회영이 주도했다. 서울 명동 상동교회에서 만든 민족단체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양기탁 같은 활동가와 독립운동을 기획해갔다. 1908년 만주로 답사를 떠난 이회영은 만주에 해외독립기지 설립을 결정했다. 뜻이 있었고, 돈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람이 있었다.
이회영 집안은 충북 진천에 사는 양명학자 홍승헌 집안과 친했다. 역시 집안 어른인 이상설 또한 홍승헌과 동향이었다. 강화학파가 차례차례 만주로 떠나고, 이회영 일가는 서울과 경기도에 있는 토지 수백만 평을 모두 팔았다. 이미 이상설은 용정을 거쳐 헤이그밀사로 갔다가 연해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11년 안동, 이상룡과 김동삼
안동은 반골 도시였다. 임진왜란 이후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였다. 권력은 없었으나 고집과 기개는 강했다. 석주 이상룡도 그러했다. 의병활동을 하고 있던 이상룡은 신민회와 이회영의 계획에 동참했다. 혼맥으로 인연을 맺은 김동삼도 동참했다.
그리하여 1910년 12월 안동의 사대부 이상룡과 김동삼과 김대락 가족은 집과 논과 밭을 팔아 만주로 떠난 것이다. 김동삼의 의성 김씨 문중과 이상룡의 고성 이씨 문중이 각각 150명씩, 그리고 혼맥으로 이어진 영덕의 무안 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안동의 흥해 배씨,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 조씨 문중이 모두 동참해 미래의 독립운동기지를 향해 떠난 것이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상룡씨는 경상도 혁명 대표로 오신 분이라.'(이은숙, '서간도시종기')
1911년 1월 횡도촌
그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만난 곳이 만주 땅 유하현 횡도촌이었다. '응당 거기엔 억제됐던 감정의 폭발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승이 남긴 기록 어느 구석에도 그런 흔적을 찾지 못한다. 비정하리만큼 무장된 함구(緘口)가 있을 따름이었다.'(민경규, '강화학 최후의 광경' - 이덕일, '근대를 말하다' 재인용)
감정 폭발 대신 그들은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만들고 만주 독립운동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조선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을 길렀다. 자신들 또한 이념과 주장을 접고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해 요직을 지냈다.
1910년 10월 7일 조선 귀족
비장하고 스산했던 1909년과 1910년 그렇게 많은 이들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나라를 버렸다. 그런데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사라지고 두 달 뒤인 10월 8일, 조선 총독부 관보 38호 1면에 고시(告示)가 공포됐다. 제목은 '授爵, 敍任及辭令(수작, 서임 급 사령)'이다. 2면 한가득 명단이 게시돼 있는데, 모두 76명에게 '조선 귀족' 작위를 수여한다는 내용이다.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망명을 준비하는 사이, 고위직과 왕족으로 권세를 누리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이다. 거액의 은사금과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작호를 받은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후작: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윤택영, 박영효
백작: 이지용, 민영린, 이완용(李完用)
자작: 이완용(李完鎔), 이기용, 박제순, 고영희, 조중응, 민병석, 이용직(3·1운동 가담 박탈), 김윤식(3·1운동 가담 박탈), 권중현, 이하영, 이근택, 송병준, 임선준, 이재곤, 윤덕영, 조민희, 이병무, 이근명,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김성근
남작: 윤용구(거부), 홍순형(거부), 김석진(거부), 한창수, 이근상, 조희연(반납), 박제빈, 성기운, 김춘희, 조동희, 박기양, 김사준(독립운동, 작위 박탈), 장석주, 민상호, 조동윤, 최석민, 한규설(거부), 유길준(거부), 남정철, 이건하, 이용태, 민영달(거부), 민영기, 이종건, 이봉의, 윤웅렬(박탈), 이근호, 김가진(임시정부 망명), 정낙용, 민종묵, 이재극, 이윤용, 이정로, 김영철, 이용원, 김종한, 조정구(거부), 김학진, 박용대, 조경호(거부), 김사철, 김병익(박탈), 이주영, 정한조, 민형식
그리하여 1910년 12월 안동의 사대부 이상룡과 김동삼과 김대락 가족은 집과 논과 밭을 팔아 만주로 떠난 것이다. 김동삼의 의성 김씨 문중과 이상룡의 고성 이씨 문중이 각각 150명씩, 그리고 혼맥으로 이어진 영덕의 무안 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안동의 흥해 배씨,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 조씨 문중이 모두 동참해 미래의 독립운동기지를 향해 떠난 것이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상룡씨는 경상도 혁명 대표로 오신 분이라.'(이은숙, '서간도시종기')
1911년 1월 횡도촌
그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만난 곳이 만주 땅 유하현 횡도촌이었다. '응당 거기엔 억제됐던 감정의 폭발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승이 남긴 기록 어느 구석에도 그런 흔적을 찾지 못한다. 비정하리만큼 무장된 함구(緘口)가 있을 따름이었다.'(민경규, '강화학 최후의 광경' - 이덕일, '근대를 말하다' 재인용)
감정 폭발 대신 그들은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만들고 만주 독립운동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조선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을 길렀다. 자신들 또한 이념과 주장을 접고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해 요직을 지냈다.
1910년 10월 7일 조선 귀족
비장하고 스산했던 1909년과 1910년 그렇게 많은 이들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나라를 버렸다. 그런데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사라지고 두 달 뒤인 10월 8일, 조선 총독부 관보 38호 1면에 고시(告示)가 공포됐다. 제목은 '授爵, 敍任及辭令(수작, 서임 급 사령)'이다. 2면 한가득 명단이 게시돼 있는데, 모두 76명에게 '조선 귀족' 작위를 수여한다는 내용이다.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망명을 준비하는 사이, 고위직과 왕족으로 권세를 누리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이다. 거액의 은사금과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작호를 받은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후작: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윤택영, 박영효
백작: 이지용, 민영린, 이완용(李完用)
자작: 이완용(李完鎔), 이기용, 박제순, 고영희, 조중응, 민병석, 이용직(3·1운동 가담 박탈), 김윤식(3·1운동 가담 박탈), 권중현, 이하영, 이근택, 송병준, 임선준, 이재곤, 윤덕영, 조민희, 이병무, 이근명,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김성근
남작: 윤용구(거부), 홍순형(거부), 김석진(거부), 한창수, 이근상, 조희연(반납), 박제빈, 성기운, 김춘희, 조동희, 박기양, 김사준(독립운동, 작위 박탈), 장석주, 민상호, 조동윤, 최석민, 한규설(거부), 유길준(거부), 남정철, 이건하, 이용태, 민영달(거부), 민영기, 이종건, 이봉의, 윤웅렬(박탈), 이근호, 김가진(임시정부 망명), 정낙용, 민종묵, 이재극, 이윤용, 이정로, 김영철, 이용원, 김종한, 조정구(거부), 김학진, 박용대, 조경호(거부), 김사철, 김병익(박탈), 이주영, 정한조, 민형식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0/18/2017101800063.html
'◇.역사·고서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릉이 살아있다, 단풍철 문화나들이 7곳 (0) | 2017.10.24 |
---|---|
"박정희 시대, 삼위일체 국가주의로 경제·국방 건설" (0) | 2017.10.22 |
조선 의학사를 빛낸 名醫들 (0) | 2017.10.17 |
500년 내력의 명문 종가 (0) | 2017.10.17 |
"비록 세상을 다 보았으되, 나는 그저 여자였으니…" (0) | 2017.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