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재와 채소를 달인 국물에 생 닭, 큼직한 전복을 껍데기까지 넣고 끓인 ‘해천탕’. 1996년 전복 전문 음식점 ‘해천’에서 개발한 음식이다. 전통 보양식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올해 나이가 스물한 살밖에 안 된 젊은 음식이다. 사진은 2004년 이태원 '해천’에서 촬영한 해천탕이다. 지금도 달라지진 않았다.[중앙포토]](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7/07/1ad4cf0a-6848-4665-ad22-4f55fa146fae.jpg)
한약재와 채소를 달인 국물에 생 닭, 큼직한 전복을 껍데기까지 넣고 끓인 ‘해천탕’. 1996년 전복 전문 음식점 ‘해천’에서 개발한 음식이다. 전통 보양식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올해 나이가 스물한 살밖에 안 된 젊은 음식이다. 사진은 2004년 이태원 '해천’에서 촬영한 해천탕이다. 지금도 달라지진 않았다.[중앙포토]

지난달 23일 저녁에 모임이 있었다. 음식 평론가 강지영씨가 주선해 8명이 모였다. 미슐랭 1스타를 받은 중화요리 집 ‘진진’의 왕육성 오너셰프, 조희숙 한식 전문가, 최성순 와인21닷컴 대표, 남윤희 매거진 『AVENUEL』 편집장, 중앙SUNDAY에 ‘오늘 한 잔 어때?’를 연재하는 이지민 전통주 전문가, 심선애 샘표 홍보담당자와 나.
모임 1시간 10분 전 카톡방에 강씨의 염려 섞인 안내가 떴다. “강지영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으며 허름해서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삼각지 대구탕 골목이었다. 가끔 다니는 길이지만 이런 집이 있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요리가 있는 집(서울 용산구 한강대로62가길 14/전화 02-749-9797)’이다. 실내는 작았다. 영업신고증을 보니 면적이 21.25㎡(6.4평)라고 돼 있다. 4인 식탁 3개, 2인 식탁 2개, 모두 16석이 놓여 있다. 전면은 수족관과 출입문, 우측 벽 쪽은 주방과 화장실이고 나머지 벽은 붉은 벽돌로 채웠다. 벽돌에 많은 낙서가 적혀 있다. 하나는 이렇게 썼다. “역사를 믿어요! -역사 선생”. 이 집의 사연을 얘기하는 듯하다.
메뉴를 적은 흑판을 보니 “海川 Since 1997”라고 씌어있다. 단품 메뉴는 전복회·전복조림·전복소갈비찜·자연송이버터볶음·해천탕 각 12만원이라고 적혀 있다. 전복내장무침·해산물·회가 곁들여 나오는데 2~3인이 한잔 하면서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코스는 1인 5만, 7만, 9만원이다. 코스의 내용은 당일 시장에서 사온 물건에 따라 매일 달라지므로 따로 상의해야 한다고 적어 놨다. 최근 메뉴는 인터넷에 떠도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 내용이 이태원에 있던 ‘해천’과 거의 같다.

돌돔(왼쪽)과 붉바리 활어를 한 마리씩 수조에서 주방으로 옮기는 주인의 큰형은 25년간 제주도에 살면서 횟집을 운영했다.

붉바리 활어 3마리를 회로 준비하기 위해 수조에서 주방으로 옮기고 있다. 도다리보다 한길 위로 대접 받는 생선이다.

붉바리를 회로 뜨는 과정.

덩치가 무척 큰 돌돔 활어. 보통은 몸통에 7개의 검은색 띠가 있는데, 수컷은 자라면서 줄무늬가 사라져 주둥이 부분만 검은색이 남는다. 저 강한 이빨로 조개를 깨트려 살을 빼 먹는다.

‘요리가 있는 집’ 주인 채성태씨는 ‘전복의 달인’으로 불린다. 해천탕을 필두로 전복으로 할 수 있는 요리 수십 가지를 개발했다. 선수 출신으로 지도자 자격증을 소지한 유도인이기도 하다.

①전복내장 샐러드

②희귀생선 모둠회

③돌돔 특수부위 5종

④송이·돔·바지락 맑은탕

⑤딱돔구이

주방 그릴에서 딱돔 여러 마리가 구워지고 있다. 군평선이·금풍생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생선이다. 구이로 많이 먹으며 ‘샛서방고기’라는 별칭도 있다.
손바닥만한데 칼날이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비늘이 강하고, 뼈도 세고 굵어서 살은 많지 않지만 맛은 좋다. 구이·찜·조림 등으로 해 먹는다. 살이 야물어 횟감으로도 좋다. 이날 구이는 낮은 온도에서 오래 구웠는지 살이 메마르고 잘 뜯어지지 않았다.

⑥삶은 참소라

⑦자연산 광어 전

⑧병어 초된장무침

⑨한치 초고추장무침

⑩삭힌 홍어와 묵은지

⑪삶은 통 골뱅이

⑫전복조림

⑬와다(해삼내장)라면

와다라면을 끓이기 위해 해삼내장 얼린 덩어리를 자르고 있다.

해삼내장 얼린 덩어리와 라면 1개를 끓이는 데 넣기 위해 자른 조각.

얼린 해삼내장을 끓는 물에 넣자 녹으면서 가닥마다 오그라들고 있다.

해삼내장 가닥이 풀어지면 라면을 넣고 삶는다.

⑭돌돔 서덜 미역국
오후 7시 조금 넘어 시작한 자리가 이렇게 먹고 나니 12시가 다 됐다. 음식 값은 1인 10만원, 술은 각자 조금씩 가지고 모여 따로 돈을 내지는 않았다. 매일 이렇게 비싼 음식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 집에 더 싼 값에 먹을 수 있는 메뉴들도 여러 가지가 있다. 6일 뒤(지난달 29일) 점심시간에 찾아갔다. 주인은 집안에 우환이 있어 자리를 비웠다. 제주도에서 온 큰형이 지키고 있었다. 손님 7명이 있었다. 5명 테이블은 생물 대구탕(1인 8000원)을 먹고 있었다. 2인 테이블은 전복조림을 먹고 있었다. 나는 전복 된장찌개(1만5000원)를 주문했다. 이밖에 와다(해삼내장) 라면·전복삼계탕(각 1만5000원)·낙지볶음(1만2000원)도 있다. 지난 주 왔을 때 얼굴을 기억하는지 주문하지 않은 접시가 하나 나왔다.

①돌돔회무침

②전복된장찌개

②-1 전복된장찌개와 7찬 상차림

새벽 노량진수산시장에 가서 사놓은 활어를 오후 1시쯤 수조차가 배달해주고 있다.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골목이어서 물고기를 물통에 담아 손수레로 옮겨서 횟집 수조에 넣고 있다.

노량진수산시장에서 바로 횟집에 도착한 활어들. 점박이 강당돔(배달한 사람은 ‘범돔’이라 함) 3마리, 줄무늬 돌돔 1마리, 날렵한 유선형의 줄전갱이 3마리가 왔다.

활어와 함께 배달 온 아이스박스에는 회로 먹어도 될법한 참돔 10마리가 들어 있다. 회를 먹은 손님에게 맑은탕으로 끓여 낼 때 쓸 거라고 했다.
사흘 뒤(지난 25일) 부인 병구완 중인 채씨를 병원 커피숍에서 만나 살아온 이야기와 이태원에서 하던 옛 ‘해천’이야기를 들어봤다.
유도 명문 비봉고등학교 유도선수 출신인 그는 1991년 충남 태안군 안흥 앞바다에 있는 신진도의 부속 섬인 마도로 갔다. 바다를 좋아하는 그는 ‘하얀등대’라는 민박 겸 횟집을 차리고 눌러앉았다. 술 마시는 자리 옆이 바로 바다였다. 술 마시다가 걸어 들어가 소라나 낙지를 잡아 안주로 먹기도 했다. 그때 어선보다 빠른 레저용 보트를 가지고 있었다. 해녀들이 급하게 움직일 때 실어다 주곤 하다 친해졌다. 해녀들은 잡아온 전복 중 자잘해서 값이 안 나가는 ‘께끼’를 먹어보라면 자주 줬다. 그걸 안주로 먹으면 술이 잘 취하지도 않고 깰 때도 편했다.
고향(경기도 안성) 선배에게 전복을 갖다 드렸더니 닭과 전복을 고아서 함께 먹자고 권했다. 선배의 고향인 화성시 서신·사강 지역에서 그렇게 해 먹는 걸 봤다고 했다. 시화방조제가 막히기 전까지는 바다가 가까웠던 동네다. 송산면 사강리에는 지금도 제법 큰 수산시장이 있다. 전복과 닭의 조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전복 음식을 먹고 나면 피로도 잘 풀리고, 무엇보다 아침에 힘이 느껴졌다. 전복의 효과를 믿고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했다. 전복이 어디서 뭘 먹고 자라는지 궁금했다. 해초가 많은 어두운 곳에 많았다. 보름달이 뜨면 안 나오고 그믐이나 초승달 뜰 때, 비 올 때 많이 나오고 활동도 많았다. 수줍음 많은 여자를 연상시겼다. 전복 잡는 귀신이 됐다.
어느 날 아는 형님 부부가 놀러 왔다. 전복과 닭을 고아서 대접했다. 며칠 놀다간 그 분이 달라졌다. 부인이 알아챘다. 서울에 전복 전문점을 내자고 했다. 1996년 경리단길(회나무로) 꼭대기에 동업으로 제법 큰 음식점을 냈다. 상호를 바다(전복)와 하늘(닭)을 합쳐 ‘해천’이라고 정했다. 한자로 써보니 '海天'은 별로 맵시가 안 났다. 뜻보다 모양으로 가자고 ‘해천(海川)’으로 바꿨다.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에 은어·연어·풍천장어·참게·황복 같은 좋은 물고기가 많다는 점도 참작했다. 상호에 따라 주력 음식 이름을 ‘해천탕’으로 정했다. 자연산 전복에 닭을 넣고 푹 곤 음식이라니 돈 있는 손님들이 많이 왔다. 그러나 다시 찾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1년쯤 하다가 접었다. 주방장 의욕이 넘쳐 국물에 한약재를 너무 많이 넣었다. 음식이 아니라 한약 가까운 맛이 났던 것이다.
다시 제주도로 내려갔다. 큰형이 서귀포에서 ‘안성수산’이라는 예약제 횟집을 하고 있었다. 저녁 손님만 받았는데 자연산 참돔을 100kg씩 준비해도 모두 팔리는 유명한 음식점이었다. 1년쯤 있으면서 실패한 이유를 따져보고 해천탕의 레시피를 완성해 서울로 돌아왔다. 1997년 이태원에 ‘해천’을 다시 열었다.
많은 음식을 개발했다. 전복 음식이 20여 가지, 해초죽도 반응이 좋았다. 김·미역·파래·다시마·매생이 넣고 볶아서 죽을 쑤는데 개발할 때 아무리 해도 비린내가 없어지지 않았다. 예전 어머니가 하던 걸 돌이켜보니 답이 있었다. 참기름 둘러 해초를 볶으니까 해결됐다. 이태원 해천 외에도 압구정 현대백화점과 순천향병원에 죽 집을 내고, 신세계백화점에 반찬코너 ‘해천’을 열기도 했다.
가게는 몇 달 만에 일어섰다. 2001년 ‘사랑의 밥차’를 시작했다. 주문 받은 죽을 배달하다가 돈이 없거나 몸이 불편해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음식을 해주는 봉사활동에 나섰다. 처음엔 승용차로 하다가 후배가 트럭을 기증해서 이동식 주방을 꾸려 매주 봉사를 나갔다.

‘요리가 있는 집’의 주인 채성태씨는 현재 사단법인 ‘사랑의 밥차’ 이사장이다. 2001년 시작해 주방시설을 한 차를 끌고 가서 한 달에 4회 음식 나눔 봉사를 한다.
‘사랑의 밥차’가 인연이 돼 장애인들과 히말라야도 가고 캄보디아로 해외봉사도 갔다. 캄보디아는 우리나라와 함께 세계에서 지뢰가 가장 많은 나라다. 채씨의 아버지는 6·25 때 안남미 얻어 먹은 얘기를 종종 했다. 그 쌀이 온 곳이 동남아이니, 내가 갚아주자는 생각으로 갔다. 의족·의수·쌀 지원, 집·화장실 지어주기, 우물 파주기 같은 일을 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태원 ‘해천’에서 번 돈도 거기에 다 썼다. 캄보디아 지원 사업을 더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정착을 생각했다. 2011년 20만평 땅을 마련해(현재는 7만 평) 농장을 만들었다. 현지 관리인을 두고 건강식품으로 활용되는 모링가·그라비올라와 커피·바나나·망고·파파야 나무 등을 재배한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직원들 월급 주러 다녀온다.
캄보디아에 몰두하느라 이태원 해천을 1년간 완전히 비웠다. 후배에게 맡겼더니 잠깐 사이에 잘못돼 2014년 완전히 손을 뗐다. 단골이던 음식 전문가, 미디어 종사자, 방송·연예인, 식품업계 친구들이 “당신이 하던 해천이 없으니 갈 데가 없다. 믿고 먹을 데가 없다. 십시일반으로 돈 모아 회원제 식당 만들어 먹고 놀자”고 졸랐다. 지난해 9월 놀이터 삼아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탤런트 공효진의 어머니가 1번 회원으로 500만원을 쾌척했다. 배우 전무송·이창훈씨도 단골이다. 몇 달을 단골들 하고 잘 먹고 잘 놀았다. 막상 손을 다시 대니 ‘할 거면 제대로 하자. 나도 먹어야 하니까. 좋은 물건 들여놓고 잘하자’ 하는 생각이 들어 ‘요리가 있는 집’ 간판을 걸었다. 용산세무서 사업자등록증에 적힌 개업일은 2017년 5월 1일이고, 용산구청 영업신고증을 받은 날은 5월 15일이다.
식재료는 대부분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사온다. 일요일을 빼고 매일 나간다. 살 게 없어도 2시간씩은 돌아다닌다. 돌아다니다 ‘째려보는’ 물고기가 있으면 산다. 눈빛이 그 정도면 그만큼 싱싱하다는 표시다. 음식 값은 그날 구입한 물건에 따라 다르다. 1㎏에 1만4000원짜리 생선을 사면 1인 3만원 받고 곁들이 음식과 함께 차려준다. 제주 다금바리가 1㎏ 15만원에 올라오면 1인 9만원은 받아야 한다. 좋은 재료를 구하면 사발통문을 돌린다. 사람들이 번개모임을 엮어서 회신이 온다. 술은 마시고 싶은 것으로 가져와도 좋고 가게에서 파는 술을 마셔도 된다. 채씨는 “그런 날은 나도 엔도르핀 만드는 날”이라고 했다.
100% 예약제로 운영한다. 에약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지나가다 들르는 손님은 자리가 비어있어도, 물건이 남아도 받지 않는다. 준비 제대로 안 하고 음식을 내면 어설퍼질까 봐서 그런다고 했다. 손님을 받았으면 맛있게 먹도록 준비하고 함께 즐기고 놀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분 내키면 골목에 숯불 피우고 수조에서 돌돔 잡아 비늘도 안 벗긴 채 구워서 나눠 먹기도 한다.

삼각지 대구탕 골목 안에 둥지를 튼 ‘요리가 있는 집’. 해천탕을 개발한 이태원 ‘해천’의 옛 주인 채성태씨가 지난 해 지인들과 놀이터 삼아 열었다.
문 여는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10시. 일요일은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