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시간여행]'합격자 명단' 언론사 문의 하루 1만 건… 靑, "대통령 아드님 붙었나요?" 묻기도

산야초 2018. 1. 29. 22:47

[김명환의 시간여행] [105]

'합격자 명단' 언론사 문의 하루 1만 건… 靑, "대통령 아드님 붙었나요?" 묻기도

    입력 : 2018.01.24 03:12

    1967년 중학교 합격자 발표를 하루 앞둔 12월 4일 밤 명문 K중학교 교문 앞에 학부형 1000여명이 몰려들어 대소동이 벌어졌다. 이날 밤 합격자가 확정된다는 것을 알고 자녀의 합격 여부를 한시라도 빨리 알고 싶어 달려온 부모들이었다. 이 중 300여명은 "명단 좀 빨리 공개하라"며 담을 넘었다가 경비원들과 싸움까지 벌였다. 경비실 유리창이 박살나고 경찰이 출동했다. 밤 11시가 넘어 학교 측이 명단을 발표하자 학부형들의 "만세!"소리와 통곡 소리가 뒤섞여 차가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조선일보 1967년 12월 5일자). 각급 학교 합격자를 교내에 벽보로만 발표했던 시대엔 이런 식의 '발표 전야 소동'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1989년 서울대 합격자 발표장에 명단을 실은 트럭이 도착하자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왼쪽).
    1989년 서울대 합격자 발표장에 명단을 실은 트럭이 도착하자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전기 대학 합격자 명단을 수록한 조선일보 호외(1966년 2월 10일자).
    입시 합격자의 공식 발표 수단이 교내에 붙이는 벽보였던 시대에도, 언론사들은 발표 전날 밤부터 명단을 입수해 놓고 전화 문의에 답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주요 대학 합격자 전원의 명단을 신문에 실은 적도 있다. 기자들은 타사보다 1분이라도 먼저 합격자 명단을 손에 넣으려고 '전쟁'을 벌였다. 1967년 12월 5일 저녁 어느 중학교에 명단을 입수하러 갔던 신문 기자 4명은 교직원들과 승강이를 벌이다 팔이 꺾이고 덜미를 잡혔다. 며칠 뒤에는 명단을 받아들고 나오던 기자가 교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학부모 수백 명에게 명단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티다 팔을 비틀리고 발목을 삐는 부상을 입었다(동아일보 1967년 12월 9일자).

    합격자 명단을 전화로 안내하던 언론사도 한바탕 전쟁을 치르기는 마찬가지였다. 1961년 12월 중학교 합격 여부를 알려주던 한 신문사가 밤새 받은 전화는 1만 통이 넘었다. 야근 기자들은 대부분 목이 쉬었다. 통화가 잘 연결되지 않자, 성미 급한 사람들은 신문사로 쳐들어왔다. 사옥의 현관과 복도는 인파로 초만원이 됐다.

    1961년 신문사엔 "여기 청와대입니다. 경기중학 발표 어떻게 됐습니까?"라는 전화도 왔다. 윤보선 대통령 아들의 합격 여부를 묻는 비서실의 전화였다. "안타깝게도 떨어졌습니다"고 답하자 비서실 측은 수험번호를 여러 번 다시 일러주며 확인하려 했다.

    어떤 수험생들은 전화로 합격 여부를 확인하고도 학교로 직접 가서 벽보를 두 눈으로 다시 확인했다. 많은 불합격자는 벽보를 보고 돌아가다 말고 "혹시 잘못 봤나" 하며 재삼 재사 확인했다. 합격자가 벽보를 보고도 자기 명단을 놓쳐, 불합격인 줄 알고 낙향하는 바람에 대학 측이 긴급 연락을 취한 일들이 가끔 있었다. 이런 문제를 없애려고 했는지, 1961년 이화여대는 모든 수험생들에게 '합격' '불합격'을 알려주는 서류를 나눠주기도 했다 .

    각급 학교 합격자를 인터넷으로 발표하는 오늘날엔 발표일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최근 대학별로 정시 합격자 발표가 시작됐지만 그야말로 소리 소문 없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환호도 한숨도 운동장 벽보 앞이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터뜨린다. 편리해진 건 좋은데, 인생에서 잊지 못할 몇 안 되는 순간에 어울리는 세리머니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 약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