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 피아노 협주곡 1번 B-flat단조 Piano Concerto No. 1 B flat minor op. 23 TCHAIKOVSKY Vladimir Horowitz (piano) Arturo Toscanini (conductor) NBC Symphony Orchestra 1941 Mono | Piano Concerto No. 1 B flat minor op. 23 TCHAIKOVSKY Vladimir Horowitz (piano) Arturo Toscanini (conductor) NBC Symphony Orchestra RCA reviewed: 199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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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B flat단조 op. 23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피아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지휘)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명연주 중의 명연주이다. 이 음반을 '후회없는 선택'으로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위험한 선택'으로 해야 할 것인지 무척 고민했던 것도 사실인데, 녹음 당시 아직 30대였던 호로비츠와 전설적인 지휘자이자 그의 장인이었던 토스카니니에 의한 연주, 일단 연주자들만 보아도 이미 이 연주의 성격은 결판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에 아쉬케나지는 자신이 피아노를 공부하던 시절의 호로비츠에 대해서 '지금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정도로 무시무시한 피아니스트였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 시기의 연주기록이 이 음반인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은 또한 호로비츠가 미국 데뷔의 초창기에 연주하여 미국의 음악계를 충격으로 몰아 넣은 곡이기도 하며, 토스카니니와의 인연을 맺어준 곡이기도 하다. 호로비츠와 토스카니니에 의한 이 곡의 녹음은 여기서 소개할 41년의 녹음과 43년의 라이브녹음 두 가지가 있으며, 어느 연주가 낫다고 단정해서 말 할 수는 없지만(결국은 비슷비슷한 연주이며, 음질이라는 면에서는 41년 녹음이 훨씬 좋고, 워낙에 라이브에 강한 호로비츠라는 것을 생각하면 43년의 녹음이 나을 것도 같지만 역시 리마스터링되어 발매된 41년의 녹음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감상하기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41년의 녹음만을 선정하였다. 이 피아노협주곡의 좋은 연주는 확실히 많지만, 디지털 시대로 접어든 이후 그다지 주목할 만한 연주가 없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곡에 대해 개성적인 접근을 한 연주자가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호로비츠와 토스카니니에 의한 이 녹음은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듣는데에 있어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연주이다. 독주자와 지휘자의 악마적인 상성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 순간의 느슨함도 보이지 않고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그 강인함은 다른 어떤 연주에서도 찾을 수 없는 충격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 정도로 '도에 넘치는'박력은 동시에 거부감을 느끼게도 하는데, 이것이 이 연주를 '위험한 선택'에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망설임을 일으킨 원인이다. 1악장을 거의 18분 대에 연주해 내는 그 속도도 대단하지만, 도입부에서 토스카니니의 용서없는 질주와,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듯 한 호로비츠의 폭발적이고 정확한 터치를 듣고 있으면 당당하고 웅장한 리히터의 연주는 물론, 자유분방하고 정열적인 기백에 넘치고 있는 아르헤리치의 연주에 익숙해진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넋을 잃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지만, 이토록 강인한 연주가 결코 낭만주의 시대의 '변덕'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토스카니니의 계획적인 의도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나면 그의 연주미학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호로비츠도 이러한 강인한 연주에 반대했었다고 하지만, 폭군 토스카니니의 강요에 '굴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발매되어 있는 모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녹음 중에 가장 개성적이며, 피아니스트의 기량, 오케스트라의 당당한 반주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녹음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녹음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하며, 차이코프스키의 원래 작곡 의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연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수 밖에 없는 음반이다. 1, 2, 3악장 전체를 통해서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있으며, 연주의 태도 또한 완전히 초지일관, 직선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2주제의 전개부 토카타에서 신들린 듯한 호로비츠의 터치는 젊은 시절 그의 초절기교를 극히 잘 드러내어 주고 있으며, 2악장에서의 영롱하고 맑은 터치는 40년대의 열악한 녹음을 완전히 잊게 해 줄 정도이다. 3악장의 거친 춤곡을 연주하는 토스카니니의 숨가쁜 기백은 90년대에 녹음된 니콜라예바-페도세에프의 연주 이전에는 비교할 만한 연주가 없었던 강렬함을 자랑하고 있다.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고 있지 않은 이 곡에 대해 가장 재미있는 연주라고 말 할 수 있으며, 20세기 전반을 지배하던 위대한 예술가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음반이다. 전곡 듣기
Vladimir Horowitz 글: 김태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 1904-1989)라는 피아니스트가 20세기의 수 많은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고 그 위치는 어느 정도일까? 굉장히 극단적이고 편협한 비교가 되겠지만 음악가, 연주자로서의 호로비츠는 결코 리히터나 제르킨에 견줄만한 인물은 못 된다. 연주자로서 성장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미국 청중들을 열광시켰던 호로비츠의 음악에는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게, 또 어느 정도는 고의적으로, 당시 만연하고 있었던 천박한 미국식 상업주의의 영향이 깃들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며 이후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입김까지 호로비츠의 음악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전쟁 중, 혼란스러웠던 유럽대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호로비츠의 행운이었다면, 평생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펼쳤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호로비츠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호로비츠에 대한 찬사의 이면에는 항상 개운치 않은 그림자가 따라 다녔고, 유명한 평론가인 마이클 션버그는 '악기에 대한 놀라운 재능이 음악적 이해와 항상 같이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혹은 전해듣고 있는 그에 관한 무수한 전설들은 얼마나 과대평가된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호로비츠는 상업주의로 포장된 허상일 수도 있다는 것일까? - 필자는 호로비츠가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 되었다는 의견에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모습이 왜곡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호로비츠는 그 자체로서 극히 카리스마적인 존재였고 청중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으므로, 음악을 통하여 자신이 가진 그대로를 고스란히 보여주었을 뿐, 자신의 음악이 상업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었다. 1930년대의 청중들에게는 거의 상상도 하기 힘든 정도임에 틀림없었던 놀라운 손가락 기교에 피아노 전체가 진동하는 듯 한 큰 음량, 여리고 서정적인 부분에서 흘러 나오는 티 없이 맑은 소리 등등 그에게는 청중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완전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당시 자본주의의 첨병이었던 미국사회에서 호로비츠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호로비츠는 1904년 10월 1일 이래저래 음악과는 관련이 깊은 우크라이나의 키에프에서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은 호로비츠가 아니라 고로비츠(Gorowitz)였으며 1925년 베를린 데뷔시에 이름을 바꾸게 된다. 집안은 안정되고 부유했으며 가족들은 매우 지적인 사람들이어서 집안에 매우 많은 고전서적들이 갖추어져있어 어린 시절 호로비츠는 이들 서적을 탐독했다고 한다. 호로비츠가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07년 어머니인 세르게이 타로노프스키로부터였다. 호로비츠의 삼촌 또한 당시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음악학자였는데, 스크리아빈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어린 호로비츠와 스크리아빈을 만나게 하였으며 이 때의 인연으로 호로비츠는 평생에 걸쳐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즐겨 연주하게 되었으며, 사실상의 사장위기에 있던 스크리아빈의 작품들을 발굴해 낸 것도 호로비츠의 업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은 6살 때, 안톤 루빈시타인과 차이코프스키에게 음악을 배웠던 대 교육자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 배우면서였으니, 가장 정통적인 러시아 음악의 흐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축복받은 조건이었다. 호로비츠는 블루멘펠트에게 음악을 배우면서 작곡에 큰 관심을 가져 장차 작곡가가 되려 했었다. 피아노에 관해, 특히 기술적인 면에 관해서는 블루멘펠트가 호로비츠에게 가르쳐 줄 것은 이미 없었다고 한다. 호로비츠의 음악가로서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이었다. 부유하고 문화적이었던 그의 집안은 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몰락하게 되고 호로비츠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급히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키에프를 중심으로 작은 리사이틀을 가지던 호로비츠는 1922년 카르코프에서 연주를 가졌으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어 계속해서 15번의 리사이틀을 열게 되었다. 그의 리사이틀은 모스크바와 키에프로 이어지면서 명성을 얻게 되고 1924년에서 25년에 걸쳐 11개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23번의 리사이틀을 여는 등 70여회의 콘서트를 가지면서 초인적인 기량을 과시한다. 서방세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혁명의 혼란이 한참이던 25년으로서 첫 번째 무대는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에서 3번의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마친 호로비츠는 다음 해 함부르크에서 후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곡이 되는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청중들을 경악하게 한다. 더구나 이 때의 협연은 연주에 차질이 생긴 여류피아니스트의 대타로서 갑작스럽게 무대에 서게 된 것이라고 하는데, 평소에 어느 정도의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차이코프스키의 1번 같은 난곡을 대타로 연주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천재성을 잘 드러내 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호로비츠는 1927년 당시 최고의 흥행사였던 아더 짓슨에게 발탁되어 미국에 데뷔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청중들에게 호로비츠라는 존재는 단순히 음악적인 차원을 떠나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존재일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라는 먼 땅에서 갑자기 나타난 핸섬한 청년 호로비츠, 압도적인 기교, 폭발하는 듯이 강렬한 터치, 애매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이 명쾌한 연주... 평론가와 청중들은 새롭게 등장한 호로비츠에게 완전히 매료되기 시작했으며 다음 해인 1928년 토머스 비첨과 함께 한 뉴욕 데뷔연주는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된다. 이 연주회는 동시에 비첨의 뉴욕 데뷔이기도 했으며 프로그램은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이었다. 후에 토스카니니와 협연하여 음반으로 남은 기록을 통해 생각하더라도 이날 뉴욕의 청중들이 받은 충격의 크기는 대강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 때를 기억하는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후에 '당시의 호로비츠는 폭풍이었다'라고 술회했듯이, 그의 연주는 얼마간 요란스러우면서도 당시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신선함과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호로비츠가 토스카니니와 만난 것은 1932년의 일이다. 흔히 토스카니니가 호로비츠의 음악적 성숙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두 사람의 음악적 스타일에 상당한 공통점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것이 두 거장의 만남이 있은 이후에 호로비츠에게 일어난 변화에 의한 것인지 어떤지는 의심스럽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토스카니니와의 만남과 호로비츠의 음악관이 변화한 것은 시기적인 일치 이외에는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는 듯 한데, 다만 두 사람이 협연할 때에 토스카니니의 음악적 고집을 호로비츠에게 강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호로비츠가 의외로 순순히 토스카니니와 타협을 보았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기는 하다. 이러한 만남을 계기로 호로비츠는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하게 된다. 이 무렵부터 호로비츠의 은퇴-복귀가 시작되게 된다. 1930년대, 호로비츠는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의 콘서트를 가졌으며 누적된 육체적, 정신적 피로로 인해 자신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에도 수술의 후유중, 피로, 신경쇠약 등의 이유로 평생동안 4번의 공백기간을 가지게 된다. 호로비츠의 음악적 기량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40년대에서 50년에 걸친 시간이었으며 그다지 녹음상태가 좋지는 못해도 이 시기의 음반들은 결코 내외적으로 훌륭한 균형을 이룬 그의 음악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40년대 초반에 녹음된 '전람회의 그림' (RCA)에서 - 음악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점수를 줄 수 있는 연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그는 독자적인 피아니즘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분방하게 종횡무진 건반을 누비는 10개의 손가락, 다이내믹하게 울려퍼지는 옥타브, 야만적인 액센트, 여린 선율에서 들릴 듯 말 듯 다가오지만 또렷하게 떠오르는 음악의 윤곽 등, 작곡자의 원래 의도는 온데간데 없이 호로비츠의 의도에 충실한 제 2의 전람회의 그림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은둔생활을 계속하던 중에 녹음된 슈만의 '어린이 정경' (CBS)에 이르면 여전히 주관적인 성격이 강한 연주라도, 4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이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녹음된 일련의 슈만 피아노곡들과 스카를랏티의 소나타들은 만년에 녹음한 모차르트의 음악과 더불어 호로비츠가 남긴 가장 값진 유산들이다. 1965년 4월, 12년간의 공백 끝에 카네기홀에서 가진 복귀연주는 극히 '미국적인'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클라이번이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우승했을 때 보여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호로비츠에게 열광했으며 연주 당일 카네기홀은 호로비츠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유럽에서였다면 아마도 그 정도의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날의 실황은 레코드로 제작되어 ('The Historical come back' CBS)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고,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이 되었다. 이후 호로비츠는 두 번의 잠적을 더 가지게 되지만 그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으며 70년대에도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를 레퍼토리로 하여 경이적인 연주를 계속하여 들려주게 된다. 이 무렵의 기록인 '메피스토 왈츠' (RCA)라든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 (RCA, 유진 오먼디/뉴욕 필)을 통하여 들을 수 있는 호로비츠의 면모에서, 이미 그를 평생동안 따라다닌 상업성 등의 꺼림칙한 이미지는 완전히 초월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은 그러한 파퓰러성 마저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86년 이미 80을 훌쩍 넘긴 호로비츠는 갑작스럽게 DG와 전속계약을 맺는다. 일생에 걸쳐 RCA, CBS 두 레코드사와 함께 해 온 호로비츠가 만년에 이르러 갑작스레 DG와 계약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가 사망할 때까지 몇 년 간 DG에서 녹음한 음반에는 또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음악세계가 담겨 있다. 이전까지의 녹음에서 들려주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음악을 호로비츠는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녹음된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같은 곡은 과거의 녹음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기교의 쇠퇴와 체력의 노쇠를 느낄 수 있다. 스크리아빈의 연습곡에서도 터치의 명료함에 있어 60년대의 녹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쳐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DG에서 남긴 모차르트의 소나타와 몇 곡의 소품들에게서 호로비츠가 평생을 걸쳐 도달한 음악의 결론이 담겨 있다고 단언해도 좋을 만큼 빼어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단 한 소절만을 들어도 그 비범함은 쉽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리히터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86년 호로비츠는 꿈에도 그리던 모스크바 연주를 가지게 된다. 'Horowitz in Moscow'라는 제목으로 DG에서 음반과 영상물로 출판되어 있는데, 단순히 뛰어난 연주라는 것 이상의 감동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이 연주가 진행되는 도중에는 당시 세계를 양분했던 두 초강대국간의 갈등도, 대립되는 이념으로 서로를 왜곡하고 있던 시민들의 시각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감상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 영상물을 보고 있으면 - 물론 뛰어난 연출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 무의식중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호로비츠가 미국에서 가진 마지막 연주도 바로 이 해 가을에 링컨센터에서 이루어졌다. 다음 해에 호로비츠는 런던과 빈, 암스테르담, 함부르크를 순회하면서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순회연주회를 가졌다. 1989년 11월 5일 호로비츠는 병석에서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녹음을 편집하던 중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건강상태는 나이에 비해 극히 양호한 편이었다고 한다. 평소 부인인 완다에게 남긴 유언에 따라 호로비츠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가족묘에 묻히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 들려 주던 음악에서 호로비츠에게는 확실히 기교와 음악성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하는 점이 있었다.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 쇼팽의 발라드, 폴로네에즈 등에 대한 일반적인 높은 평가는 필요 이상으로 분명 과대평가된 것이며 거의 연주하지 않았던 베토벤에 대해서 그는 분명 부적격자였다. 피아니스트로서 베토벤을 잘 연주하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호로비츠가 코르토나 프랑스와처럼 프랑스 음악의 스페셜리스트도 아니었으며 어떤 작곡가의 음악을 끈기 있게 연주하여 전곡을 완성한 경우도 사실상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평가절하를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물며 연주회의 앙코르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피아노용으로 편곡하여 연주하면서 거의 광란에 가까운 환호성을 받았던 사실은 분명히 거부감을 줄 수 있는 점이다. 하지만 만년에 이르러 열린 일련의 연주여행에서 이미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한 몸으로 제대로 깎지 않아 시커멓게 때가 낀 손톱을 하고서도 건반 앞에만 앉으면 천상의 소리처럼 맑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 주며 어린이처럼 기뻐하던 그의 모습에서 더 이상 누가 '상업주의에 물든 장사꾼'이라고 비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호로비츠가 베토벤의 음악을 잘 연주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호로비츠의 생애는 베토벤의 음악을 닮았다. 젊은 시절의 패기에 넘치고 스피디한 연주스타일에서, 폭발적인 힘과 당당함을 함께 갖추었던 장년기, 슈만과 스카를랏티를 중심으로 점차 세련된 모습을 갖추어가던 60년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차르트의 티없이 맑은 세계에 도달하여 사심 없이 흥겨워하는 모습은 꼭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1867 - 1957) Arturo Toscanini 토스카니니의 생애 토스카니니는 1867년에 이탈리아의 파르마에서 출생하여 1957년에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20세기 지휘사에 거대한 양대 산맥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며 그에 관한 무수한 일화들은 이제는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토스카니니는 푸르트벵글러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치 동년배처럼 느껴지기 쉬우나 사실 그는 푸르트벵글러보다 19세나 연상이며 푸치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토스카니니의 아버지는 가난한 양복공이었다고 하며, 사립학교에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해 공교육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가정교사를 두고 유럽각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음악적 소양을 익힌 푸르트벵글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부분이다. 게다가 그가 다녔던 보이트 음악원과 밀라노 음악원에서는 지휘가 아닌 첼로를 전공하였으므로 그는 지휘를 거의 독학으로 익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지휘자로서 데뷔할 때의 사건은 거의 소설같은 이야기로 전해진다. 19세(1886년)에 오페라단에 첼리스트 겸 합창부지휘자로 입단한 토스카니니는 브라질에서의 '아이다' 공연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때 연습 도중 지휘자와 악단간의 불화로 공연 직전 지휘자가 갑작스럽게 사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급해진 오페라단에서는 그를 대신하여 부지휘자가 지휘를 하였으나 청중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았고 이어서 지휘봉을 잡은 합창 지휘자도 역시 쫓겨나 버렸다. 이렇게 되자 평소 지휘에 대해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소문이 나 있던 토스카니니에게 기회가 돌아왔고 다급해진 극장측에서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휘를 맡겼었는데, 토스카니니는 지휘대에 올라가서 악보를 덮어버리고는 암보로 리허설 한번 없이 이 대곡을 성공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일순간에 유명해졌다. 이 사건 이후부터 토스카니니는 본격적인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1892년에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탈리아 초연을 담당하였고 같은해에 레온카발로의 '팔리앗치'를, 1896년에 푸치니의 '라보엠'을 세계 초연하는 등 오페라 지휘자로서 확고부동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1898년에 메트로폴리탄에서 '아이다'를 지휘하고 1차대전이 끝난 후 1920년에 라 스칼라 가극장 관현악단을 이끌고 뉴욕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1926년에 뉴욕 필하모니의 제1회 정기연주회를 지휘하고 1928년에 상임지휘자가 되어 1936년까지 재임하는 등 미국에서도 화려한 연주경력을 쌓아나갔다. 1930년에는 바이로이트 공연에 초청받아 바그너의 악극을 지휘하기도 하여 이탈리아 지휘자들이 경원시하였던 바그너의 음악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피해 미국에 정착한 토스카니니는 이후 여생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수많은 레코딩을 남겼다. 1936년에 70세로 뉴욕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를 그만둘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그는 은퇴하였으며 그의 시대도 끝났다고 생각하였으나 바로 그해 성탄절에 그를 위해 창립된 NBC 교향악단의 제 1회 정기연주회를 지휘하면서 무려 17년의 세월을 더 활약하였으니 그의 늙을줄 모르는 정열에는 그 누구라도 경외감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토스카니니에 대한 일화 토스카니니는 수많은 일화들을 남겼으며 그 대부분이 이제는 전설화 되어가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그의 초인적인 암기력을 들 수 있겠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가 심한 근시안이라서 연주회에서 악보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스코어를 암기하였다고도 하지만 이는 그다지 근거있는 이야기는 아니라 한다. 그는 3-4회 정도의 연습 이후에는 거의 모든 파트의 악보를 다 외웠다고 전해지며, 그가 암보하여 지휘할 수 있었던 곡은 대략 200여곡의 교향곡과 100여곡의 오페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는 대단한 정열의 소유자였는데, 남들은 은퇴할 나이인 70세에 NBC 교향악단을 새로 맡은 것과 그 이후 엄청난 양의 레코딩을 남겼던 것으로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 바이다. 심지어 그는 90세부터 시작하여 10년동안 진행되는 새로운 레코딩 스케쥴을 계획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리허설때는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화내기 일쑤이고 레코딩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번이고 반복할 정도로 정열적인 노인이었다. 한번은 파티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60대 후반의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저 늙은이들이 다 가고 나면 우리끼리 신나게 놀아보자" 라고 했다는데 이때 토스카니니의 나이가 80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열의 화신인 토스카니니도 나이는 이길 수 없었는지 초인적 기억력을 자랑하던 그가 1954년 4월 4일 연주 도중 갑자기 지휘를 멈추고 30초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사태가 일어났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토스카니니는 나머지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친후 우뢰처럼 쏟아지는 박수를 뒤로 하고 비틀거리며 사라졌고 그 이후 다시는 지휘봉을 잡지 않았으며 만년을 뉴욕과 밀라노를 왕래하면서 자신의 연주 기록들을 레코드로 만드는 일에 깊이 관여하다 1957년 1월 16일에 89세로 운명하였다.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혁신성 토스카니니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이 중 대표적인 것들을 언급하자면 첫 번째로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혁신성을 들 수 있겠다. 그가 처음 오페라 극장에 진출할때만 해도 오페라는 가수 중심의 무대로서 지휘자는 단지 보조적인 기능만 수행할 뿐이었으나 토스카니니는 이러한 관습에 과감히 도전하였다. 오페라 공연도중 멋진 아리아가 나오면 객석에서 앙코르를 요청하는 박수와 환호성이 터지고 가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번 더 멋지게 부르고는 하는게 당시의 일반적인 공연 분위기였으나 토스카니니는 곡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일관성 있게 지휘하기 위하여 이러한 상연도중의 앙코르를 일절 금지시켰다. 또한 청중들에게도 엄격한 기준을 내세웠는데, 예를 들면 당시의 귀부인들이 멋을 부리기 위해 모자를 쓴 채로 관람한다든지 공연도중에 관객석에 들어온다든지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일단의 조치들은 가수와 청중들 모두에게 대단한 저항을 받았으나 토스카니니는 전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1903년에는 재임 1년만에 라 스칼라 극장의 예술감독 자리를 사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외적 조치뿐 아니라 오페라의 내용에 있어서도 베리스모 오페라나 바그너의 악극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탈리아 오페라의 현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상징주의적 연출과 반리얼리즘 연극의 선구자이며 현대 무대 미술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아피아를 적극 유치하는 등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인습에 찌든 사교장에 불과했던 오페라 하우스를 현대적인 예술공연의 무대로 전환시키는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지휘는 단원들로 하여금 세부적인 데까지 공부하도록 만들고 섬세하면서도 엄격한 리허설을 반복한 덕분에 오케스트라와 성악진의 음악적 기량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불같은 성미 때문에 많은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당시 인기절정의 가수였던 제랄딘 팔라가 토스카니니와 말싸움이 붙었을 때 "나는 스타란 말이에요, 이따위 멍청한 지시는 하지 마세요"라고 하자 토스카니니는 "스타 좋아하시네, 별빛이 달빛 이기는 거 본적 있어?" 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할때도 자기가 뜻한대로 연주가 되지 않으면 얼굴이 불같이 시뻘개지면서 격렬하게 고함을 지르면서 화를 내곤 하였다. [신 그로브 음악/음악가 사전]의 토스카니니 항목에는 그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정력, 우직할 정도의 성실성, 임전무퇴의 의지와 억센 성격, 광적일 정도의 완벽주의, 병적수준의 자기 비판 등이 특히 눈에 띄는 성격이었다." 콘서트 지휘자로서의 업적 토스카니니의 뛰어난 재능중 하나는 오페라 못지 않게 교향곡 지휘에도 정열을 쏟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동세대의 이탈리아 지휘자에서는 그 예를 발견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토스카니니의 이러한 열정은 후세에 지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바도나 무티 등이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도 오페라와 콘서트의 지휘 양쪽을 훌륭히 양립시키면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최초로 콘서트 지휘를 한 것은 1896년의 스칼라 가극장 오케스트라 연주회였으며 이때 참석했던 생상스가 그의 지휘에 대해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 들을 수 있는 연주는 주로 노년에 활약했던 뉴욕에서의 녹음 이후가 대부분이다. 그는 낭만주의적인 전통에 젖어있던 동시대의 지휘자들이 자신의 개성을 지나치게 발휘하여 주관적 해석으로 가득 찬 연주를 남발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였으며, 지휘자는 작품을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자신의 생각보다는 작곡자가 표현하고자 의도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살리는 데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신즉물주의' 라는 용어로 표현되며 이는 토스카니니의 다음 세대 지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작곡가인 아론 코플란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토스카니니에게 강조되는 것은 언제나 멜로디 선(line)과 전체의 구성이며 결코 세부나 특정 소절을 분리하여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연주를 통해 음악은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가게 되며 그러한 살아있는 음악을 듣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행운이다." 그렇다고 해서 토스카니니가 작품의 세부를 무시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엄격하고 철저하며 지나칠 정도로 세부적인 데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를 음악의 전체적인 흐름과 결합시켜 항상 유기적인 통일된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연주의 특징이다. 토스카니니는 스코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으며 작품의 스타일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개개의 작품이 지니는 개성을 최대한 살리는 연주를 하였는데, 이탈리아 작품에서는 그 선율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듯이 최대한 살리면서 깔끔하고 정돈된 연주를 하고 독일 작품에서는 선율과 함께 리듬과 형식미를 조화시킨 웅대한 음의 건축물을 구축하였다. 그는 항상 멜로디를 강조하여 '노래 부르듯이' 연주할 것을 자주 악단원들에게 요구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이것은 성악적이라기 보다는 기악적인 선율미를 강조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자면, 감미롭고 편안한 느낌의 여유로운 멜로디보다는 루바토(연주자가 곡의 리듬을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것)를 최대한 억제하고 명확한 프레이징과 강한 악센트를 첨가하여 멜로디 라인이 선명하게 강조되는 효과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주가 자유로운 선율에 중점을 둔 푸치니의 오페라에서는 때때로 융통성 없이 경직된 듯한 느낌을 주는 역효과를 가져올 때도 있으나 상대적으로 음악의 형식과 구조에 중점이 가해지는 교향곡이나 베르디의 오페라에 있어서는 오히려 큰 장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토스카니니의 연주는 강인한 리듬과 굵은 골격을 바탕으로 장대한 스케일의 음악이 당당히 울려펴지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실로 그는 동시대의 지휘자들 중에서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마술사와 같은 존재였으며 그와 함께 연주하였던 단원들은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들어 도취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였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지노 프란체스카티도 한때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일한 적이 있었으나 얼마 뒤 사임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토스카니니의 음악에 대한 확고한 주관과 열정이 마력처럼 자신을 사로잡아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토스카니니의 후배 지휘자들 중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는데, 젊은 시절의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받았던 인물 중 한사람으로서 토스카니니의 스타일이 너무 많이 가미된 해석을 보여 '토스카라얀' 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일류급 오케스트라는 과거에 토스카니니와 NBC 교향악단이 도달했던 수준의 기량을 이미 섭렵하였으며 토스카니니 식의 연주가 이제는 보편화된 경향이 많아 그의 연주를 지금 들어보면 신비감이나 신선미가 떨어지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것은 토스카니니의 연주가 낡은 스타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토스카니니 스타일의 연주를 우리가 알게 모르게 너무 많이 접해왔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토스카니니가 20세기 지휘사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위대한 인물이라 평가하는 여러 가지 근거중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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