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 사(史). 철(哲)을 겸비한 근원 김용준(金瑢俊.1904∼1967)의 그림
수화소노인가부좌상 1947
선부고독
冬日에 題하여
김용준의 10폭 병풍 그림(전체)
소나무
홍명희 선생과 제자 김용준
1942년 작 ‘화훼’
자화상
태호의 물
김봉순
추강
매화도
춤
지용시선 표지
김용준. 화가ㆍ미술평론가ㆍ한국미술사학자. 호는 근원(近園). 대구 출생. 서울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인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 <동십자각>으로 입선하는 등 재능을 나타내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하여 1931년에 오지호(吳之湖)와 동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그 무렵 우리나라 서양화 제1세대로 파리에서 공부한 이종우가 연 도화교실에서 김주경ㆍ길진섭ㆍ이마동ㆍ구본웅 등과 함께 서양화를 배웠다. 1926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들어가 길진섭·오지호와 사귀었다. 그의 사사나 교류는 당시 일본에서 일어난 반(反) 아카데미즘과 함께 그의 화풍을 인상주의 경향으로 몰고 갔다.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그는 선전에는 출품하지 않고 서화협회전에만 출품하여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1930년 4월 도쿄 미술학교 출신들의 신미술운동단체전인 동미전, 같은 해 12월 도쿄에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한 백만양화회, 1934년에는 뒤에 반일단체로 지목받은 목일회 같은 미술단체를 만들어 1930년대의 화단을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그 뒤에는 민족사회의 서화협회전람회에만 몇 번 참가했을 뿐 양화가로서의 작품활동을 지속하지 않았고, 1938년 무렵부터는 전통적인 수묵화에 손대기 시작하였으나 뚜렷한 면모는 아니었다. 반면, 신문ㆍ잡지에 미술평과 미술관계 시론(時論) 등을 기고하면서 평론가로서 활약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유화를 그렸으나 뒤에 수묵화로 바꿨으며 [문장] 등의 잡지 표지화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동아일보]에 <동미전을 개최하면서> <백만양화회를 만들고> 등을 발표했고, <동미전과 녹향전평>, <회화에 나타난 향토색의 음미> 등의 글로 평론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는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면서 프로 예술운동에는 반대하는 예술지상주의 경향을 보였다. 1930년대 후반에는 한국미술사 연구에 힘써 1948년 그 성과로 <조선미술대요>를 출간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범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서울대학교 미술학과 교수가 되었다. 국립대학교설치안 반대운동으로 수감되었다가 6ㆍ25전쟁 때 풀려나 좌익 미술단체인 조선미술동맹의 일원으로 일했다.
9ㆍ28 서울 수복 당시 월북하여 평양미술대학 교수가 된 이후,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활동하다 1967년 사망하였다. 문ㆍ사ㆍ철(文史哲)을 겸비한 화가ㆍ미술평론가ㆍ미술사학자ㆍ수필가로서 광복 전후 한국의 신세대 화단을 주도하면서 날카로운 비평으로 한국 미술사에 크게 이바지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 수필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02년에는 열화당에서 <새 근원수필> <조선미술대요>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민족미술론> 등 5권으로 나누어 근원 김용준 전집이 출간되었다.
【저서】<근원수필(近園隨筆)>(1948)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1949)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1958)
【미술작품】<춤>(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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