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자라기에는 인간들의 영욕과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용트림하듯 고뇌하며 400년 세월을 지켜온 자운서원(紫雲書院)의 느티나무가 있는가 하면, 그 영욕에도 불구하고 고고하게 저 높은 하늘만을 향해 뻗어 오른 오죽헌(烏竹軒)의 검고 가는 대나무도 있다. 인간의 것은 그 인간들과 함께 사라져도 그 부침의 세월을 지켜보아 온 이 나무들은 지금도 그 세월과 함께 살아간다.
조선시대에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기호학파를 일으킨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 그의 학덕을 기리며 위패를 모시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경기 파주의 자운서원은 바로 이 기호학파의 본산이었다. 1868년 대원군이 파벌주의의 온상을 근절하겠다며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 이 서원이 지목됐던 것도 그 당당했던 위세 때문이었다. 이 때 자운서원은 폐쇄됐고 1970년에야 ‘깔끔’하게 복원된 지금 그 영욕의 긴 역사를 전해주는 것은 신축된 서원 건물 아래쪽에 장대하게 서있는 두 그루 느티나무뿐이다.
강릉의 오죽헌은 이이가 태어나 어머니 신사임당의 훈육을 받으며 6살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의 외가다. 15세기 초에 세워졌다는 이 오죽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거 건축물의 하나로 평가될 만큼 대단히 유서 깊은 곳이다.
“아빠, 여기 보세요. 여기가 오천원짜리 돈에 실린 사진을 찍은 자리래요.”
유적 ‘보호’와 국민 ‘계몽’의 사명을 맡은 사람들은 ‘반듯반듯’하게 복원하고 현대적 기법으로 치장한 건물들과 함께 향토민속관, 강릉시민박물관, 선사시대 유적 등을 한 곳에 모아놓고 이곳을 ‘오천원권에 실린 사진을 찍은’ 국민관광지로 열심히 ‘가꿔’ 놓았다.
이곳이 경건하게 행동해야 할 소중한 유적지임을 확성기에서 쉴새없이 떠들어대는 오죽헌에서 정말로 찾기 어려운 것은 ‘소중한 유적지’의 가치를 드높인 조선선비 이이의 ‘품격’이다. 다만, 오죽헌의 귀퉁이마다 부드러운 듯 곧게 솟아오른 오죽의 성품만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듯하다.
그래도 이이의 영정을 모셔놓은 오죽헌 옆의 문성사(文成祠)에는 참배하러 온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선비잖아요.”
그의 영정 앞에서 손 모으고 고개 숙이는 이유는 매우 단순 명료하다. 그는 정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선비였다. 퇴계 이황이 관직에서 물러나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경북 안동에 독립적인 유교문화공동체를 만들었다면, 이이는 대사간, 이조 형조 병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하며 현실 정치 속에서 자신의 학문을 실천했다.
그는 조선이라는 유교이상국가를 이끌었던 ‘지식인 관료’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8살에 시를 짓고, 시험마다 장원급제를 할 만큼 소문난 천재였지만 또한 누구보다도 성실한 관료였다. 임금을 대리해서 백성들을 돌봐야 한다는 관료의 책임을 잘 알았던 그는, 시대에 맞지 않는 제도의 개혁을 위해 당시를 조선의 경장기(更張期)라 규정하며 ‘변화’를 주장했다.
국정을 걱정하며 숱한 밤을 지샜고 그야말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을 실천하며 관직에 임했던 그는 과로로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선조(宣祖)의 총애를 받으며 요직을 두루 거친 그가 48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그에게는 집 한 채 없었고 그의 지인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러 줘야 했다.
‘지나칠’ 정도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었던 그의 성품은 그의 문장과 철학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퇴계 이황이 인간의 도덕적 자발성을 강조하기 위해 논리적인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리(理·법칙 또는 원리)의 능동성을 주장했던 데 반해, 이이는 자연법칙과 인간윤리의 관계를 일관된 체계 속에서 논리정연한 문장으로 설명해 냈다. 리(理)와 기(氣)의 명쾌하게 체계화한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자연의 운용과 인간의 심리작용을 하나의 논리로 꿰뚫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은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쌍벽을 이루며 조선유학의 심성론(心性論)을 당대 최고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는 학문적으로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인간의 도리(道理)가 정감(情)과 예의(禮)의 긴장관계 속에서 실현되는 것임을 몸소 고뇌하고 실천하며 산 ‘참 선비’였다.
“문을 닫는 건 인정 없는 일
같이 눕는 건 옳지 않은 일
가로막힌 병풍이사 걷어치워도
자리도 달리 이불도 달리…
마음을 거두어 근원을 맑게 하고
밝은 근본으로 돌아갈지라
다음 생(生)이 있단 말 빈말이 아니라면
가서 저 연꽃 피는 나라에서 너를 만나리 ……”
그가 세상을 등지기 약 3개월 전, 밤늦게 문득 자신을 찾아온 기생 유지(柳枝)를 주저주저하며 방에 들여놓고는 긴 밤을 함께 지새우며 그는 이 장문의 시를 지었다. 약 10년 전 황해도 감사로 갔을 때부터 아꼈던 유지가 찾아온 것이었지만 병약해진 말년의 이이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끝내 예를 갖췄다. 그 뒤 이이의 별세 소식을 들은 그녀는 곧장 달려와 3년상을 치뤘다.
모범적인 지식인 관료이자 성리학 이론가이기도 했던 그의 문하에서는 그와 함께 문묘에 배향된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대거 배출됐다. 사단칠정논쟁과 함께 조선 최대의 성리학 이론 논쟁인 인성물성(人性物性)논쟁을 일으킨 권상하, 이간, 한원진 등도 그의 문하였다. 시대에 걸맞는 개혁을 주장하고 불교와 노장사상도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그의 개방성은 홍대용 박지원 등의 조선후기 북학파, 양명학을 수용한 장유 최명길 등에게로 계승됐다.
그가 말년에 한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제자들과 함께 했던 곳은 자운서원 인근의 ‘화석정(花石亭)’이었다. 닦은 학문을 가지고 사회 현실에 깊게 개입했던 이들을 길러낸 이곳은 임진왜란과 6·25 때 두 번이나 불타며 우리의 민족사와 시련을 같이 해 왔다. 1966년에야 파주지역 유림들의 모금으로 복원된 이 화석정은 이제 멀리 휴전선을 바라보고 서 있다, 변함 없이 흐르고 있는 임진강가에서.
▼율곡의 氣發理乘一途說
리(理·법칙 또는 원리)와 기(氣·질료 또는 에너지)가 인간의 정신 심리작용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는 문제는 이황에서 이이를 거치며 조선 성리학의 핵심 논제가 됐다. 이는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의 이념적 근간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2세 때(1557)년 처음 이황을 만났을 때부터 이황의 이론에 의문을 가지고 있던 이이는 그 후 학문적 동지였던 우계 성혼(牛溪 成渾)과 논쟁을 펼치며 자신의 견해를 완성해 갔다.
이이는 선한 감성이든 그렇지 않은 감성이든 인간의 모든 정신 심리작용은 모두 ‘기’가 발현되고 ‘리’가 그 위에서 주도한다는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이것은 인간의 선한 감성은 ‘리’가 발현된 것이고 선하지 않은 감성은 ‘기’가 발현된 것이라는 이황의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황처럼 이야기할 경우 선한 감정은 ‘리’가 주도한다는 것을 강조할 수는 있지만 선하지 않은 감성은 ‘리’가 아닌 ‘기’가 주도한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이황은 성리학적 이상의 결집체라 할 수 있는 ‘리’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인간 본성에서 능동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누구나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한 것이었으나, 이이는 그렇게 자만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혼란을 염려한 것이었다.
이이의 설은 또 한편으로 ‘리’는 형체도 작용도 없고 ‘기’는 형체와 작용이 있다는 성리학의 기본적 원칙을 고수하며, 자연의 생성 변화 운동(자연관)과 인간사회의 도덕적 이상 실현(사회관)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해명하려 했던 성리학적 ‘리기론’에서 대단히 높은 수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황처럼 인간의 정신 심리작용에서 ‘리’의 특별한 자발성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형체도 작용도 없는 ‘리’가 현실에서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리’의 본연성을 회복하려는 ‘인간의 수양 의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해진다. 자연의 경우 그대로 자연의 필연성에 맡겨둬도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루며 순환되지만, 인간사회의 경우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 없이 선(善)이 저절로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이는 탁한 ‘기’가 강하게 작용하는 현실에서 순수한 ‘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경계하는 노력을 강조하며 모범적인 지식인 관료이자 성실한 선비의 자세를 몸소 실천해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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