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가곡

이성원이 들려주는 추억의 동요

산야초 2018. 7. 18. 23:21


     

 

 

      이성원이 들려주는 추억의 동요 


 

1. 반달

2. 클레멘타인

3. 고드름

4. 과꽃

5. 섬집아기

6. 파란마음, 하얀마음

7. 등대지기

 

8. 비

9. 꽃동네 새동네

10. 고향의 봄

11. 종소리

12. 겨울밤

13. 우리의 소원

14. 노을

 

  

   

 

 


 

 

이 사람이 사는 법 - 이성원



음악에의 첫사랑, 그리고 평생동지 기타와의 만남

이성원(李晟原·). 경남 진해 생.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어른들을 위한 동요를 부르는 가수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요는 어떤 의무감에서 부를 뿐 딱히 동요만 부를 이유는 없으며, 자신은 로커이고, 그것도 뭐하면 그냥 ‘노래 부르는 사람’ 정도로 불러 달라고 했다.

“언더 중의 언더, 언더라는 의식조차 없다”는 그는 1980년대 한국의 포크 음악이 탄생시킨 주목받는 싱어송라이터 중 한 사람으로, 서구의 대중음악 언어인 통기타 음악의 문법에 한국적 정체성이라는 통찰력의 깊이를 제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음악에서는 도시의 삶에서 초월적 이상의 전원을 꿈꾸는 진솔한 자기고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불행히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지 못해 그의 이런 음악세계를 깊이 있게 전달하지 못함이 안타깝지만,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고 일단 그의 삶으로 돌아가 보자.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지금의 그의 삶은 고단할 것이 뻔하지만 어린 시절 그는 누구보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신문기자를 거쳐 사업을 하시던 그의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주말마다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댄스파티를 열 정도로 멋을 아는 분이었다. 매주 열리던 댄스파티는 그 멋을 지탱할 만한 재력도 충분했음을 말해준다. 그때 음악은 CCR라고 불리는 전축에 루이 암스트롱 등의 소위 ‘양키판’을 틀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초등학교 시절 음악 시간에 풍금을 옮기는 일이라도 맡게 되면 풍금을 만지는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다 첫소리가 울려 퍼지면 그때부터는 다른 세상이었다.

그러나 유복한 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순간부터 그와 그의 가족의 삶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다. 안살림만 하시던 어머니는 남은 재산마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할 정도로 바깥살림에는 문외한이어서 당연히 모든 재산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날아가 버리고 남은 것은 맨몸뚱어리뿐이었다. 결국 중학교 때는 등록금을 내지 못해 수차례 정학까지 당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때 그를 지켜준 것이 또한 음악이었다. 그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면 혼자 들로 나가 초등학교 5학년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하모니카를 불었다. 그러면 어린 가슴에 시퍼렇게 들었던 멍도 어느덧 눈 녹듯 사그라지고, 혼자 흥에 겨워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그때부터 그는 무엇엔가 몰입하고 명상하는 버릇이 들었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의 어느날, 그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틀어쥘 평생동지를 만나게 된다. 그 동지를 만나는 과정은 조금 외설(?)스럽고 그래서 무엄하지만, ‘화장실 낙서’ 같은 풍경으로 펼쳐진다.

하루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대학에 다니던 친구의 누나가 띄엄띄엄 기타를 튕기며 ‘고향의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1970년대 한창 유행했던 포크와 통기타의 열풍이 채 사라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 누나의 기타 솜씨는 연주는커녕 겨우 음이나 맞추는 정도였지만 그의 눈에는 누나도 예쁘고, 기탓줄을 튕기는 누나의 하얀 손가락도 예쁘게 보이고, 무엇보다 기타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얽혀 그에게는 황홀한 천상의 멜로디로 다가왔다. 한눈에 확 불이 붙은 ‘음악(?)에 대한 첫사랑’이었다.

그날부터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기타에 빠져들었다. 남들은 모두 대학 진학 준비에 몰입해 있을 때 그는 매일같이 그 친구네 집에 들락거리며 기타에 매달렸다. 여동생이 “우리 오빠는 눈을 뜨자마자 기타를 잡아 잠들 때까지 놓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말 반한 것이 기타였는지 아니면 친구의 누나였는지 묻자 그는 피식, 웃음으로 답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나니 졸업이었다. 대학은 생각지도 못할 처지였으니, 그렇다면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서 돈을 벌어 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부양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는 음악을 한답시고 기타 하나 달랑 메고 온종일 다운타운가를 휩쓸고 다녔다. 그러다 문득 “아하! 내가 가장이었지” 하는 생각에서 가구점 점원부터 시작해 신문배달이니 볼링장 핀보이니 음악다방 디스크 자키(DJ)까지 안 해 본 것 없이 다 거치며 돈벌이도 해 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일들이야 그저 아르바이트거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실은 돈이 안 된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었고 그 스스로 음악이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약과 같은” 음의 세계가 주는 강렬한 느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천박하지 않고 인생의 깊이를 담은 좋은 노래들이 많이 있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말 끝에 그는 노랫말이 가슴에 닿아 특히 좋아했다는 노래 하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유석이 부른 ‘친구야’라는 노래라고 했다.
‘작게 생긴 이내 한 몸 설움도 많고
떠가려도 발목까지 사슬에 묶여
헤는 마음 하나도 없이 홀로 서러워
오, 친구야 어디로 갈까.‘
7절까지 있는 이 노래를 그는 아직도 단 한 구절도 잊지 않고 그대로 외우고 있다고 했다.

결국 그는 진심으로 행복하려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다시 기타를 들었다. 이런 그를 주위에서는 당연히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망나니였다. 그래도 그는 기타만 있으면 행복했다.

“한번은 기타를 치다 12시가 넘었는데 음 하나가 아쉬운 거예요. 그 음을 찾기 위해 신발 신는 것조차 잊고 맨발로 집을 나섰지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어요. 맨발로 노래를 부르며 파출소 앞을 지나자 경찰이 따라붙었나 봐요. 그것도 모르고 나무 아래 앉아 끝까지 노래를 불렀지요. 경찰은 플래시를 비춰 주며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순순히 보내주더군요. 무엇엔가 몰입한 것을 인정해준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으로 치부한 것인지는 모르죠.”

“음악은 사람들 마음 속에 촛불 하나씩 켜는 것”

그러기를 5년여, 웬만큼 음악에 느낌이 닿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 전에도 간간이 서울로 올라와 일종의 가수 등용문으로 여겨지던 명동 ‘쉘부르’의 경연에 참가한 적이 있었지만 매번 실패를 거듭하던 끝이었다. 1984년의 일이었다.

물론 그의 주머니에는 돈 대신 음악을 하겠다는 열정만 가득한 신세였다. 신촌 봉원사 뒤에 마련한 자취방은 겨울이면 머리맡에 둔 물조차 얼어붙을 정도였고, 단무지 쪽을 일일이 세어가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식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때까지 신촌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하덕규·시인과촌장· 임지훈·해바라기 등 한다 하는 포크 연주자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추위와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

1987년, 그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판을 내게 된다. 그 무렵 그는 먹고살 방편으로 주위의 추렴을 받아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 ‘쉼표’라는 카페를 열었는데, 온통 가난한 문화판 인사들이 모여들자 돈벌이는 고사하고 아예 이들의 사랑방으로 내주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맺은 한 인연의 끝이 모 레코드사와 닿았던 것이었다.
오디션을 통과하고 ‘거기 왜 있나’ ‘선인장을 보라’ 등의 자작곡을 담은 판이 나오던 날의 흥분을 그는 지금도 가끔 꿈에서 만난다.

그러나 ‘거기 왜 있나’가 제법 방송을 타고 막 뜨려는 순간 한영애의 ‘거기 누구 없소’라는 비슷한 제목의 노래가 뜨면서 그의 노래는 졸지에 ‘아류’로 여겨져 무대 뒤로 사라지는 처지가 됐다.

이 무렵 그의 음악에는 커다란 전기가 왔다. 어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국악방송을 듣게 됐는데, 악기 가운데 으뜸이어서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불리는 거문고의 음을 “연잎에 비 듣는 소리”라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속에는 왠지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대신 소리 없이 내리는 보슬비가 떠오르면서 한 깨달음이 왔다. ‘음악이란 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빈 소리를 듣는 것’이라는….

국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그에게 또 한번의 결정적 계기가 왔다. 당시 하치라는 일본인 로커가 한국음악을 공부하러 왔는데 그와 어울리면서 ‘사물’을 접하게 됐고 나아가 록과 한국음악이 통한다는 것을 느끼게 됐던 것. 하치와의 작업의 결과는 1988년 울림터 극장에서 발표됐다. 일련의 작업을 거치면서 그는 자신이 평생 가야 할 길을 찾았다고 했다. 기타를 통해 한국적 가락을 새롭게 발현시키겠다는 것. 이후 그는 통기타와 전자기타로 한국음악을 표현하는 데 몰입해 1992년과 2002년에 다시 발표회를 갖는다.

그 얼마후 그는 갑작스럽게 낙향한다. 1993년. 10년 만의 낙향이었다. 빌딩이 정체를 묻기 시작하더라는 것, 산이 사라지고 빌딩만 가슴을 압박하더라는 것이었다. 자연에 대한 관심의 출발이었다. 얄팍하고 진정한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회의도 들었다.
“지금도 저는 밤무대는 안 뜁니다. 가수가 밤무대를 외면하면 먹고살 길이 막막하지만 화려한 무대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진지하지 않고 가볍다고 할까. 그렇다고 여느 가수들처럼 자기 열정에만 빠져 부르고 싶지는 않아요.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촛불 하나씩을 켜는 것이어야 하고, 나는 그들 눈 속에 별을 하나씩 심고 싶은 마음에서 최선을 다하는데 그들은 자기들끼리 얘기나 하고 반응이 없어요. 마치 약장수가 약을 파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구경거리에 불과하지요.”
그렇게 내려간 고향이지만 진해에는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약간의 유명세가 생겨 서울에서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고향 역시 변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심성도 변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변해가는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하릴없이 지방 문화활동에도 참여하면서 그 무언가 근원적인 것을 찾기 위해 헤매는 세월이었다. 이 무렵 친구의 소개로 그는 뒤늦은 결혼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음악이나 환경 문제 등에 대해서는 소리 높여 말하면서도 가족에 대해 캐물을 때면 교묘하게 말머리를 돌리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동안 가족 고생을 많이 시켰지요.”
대답 대신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조금의 번잡스러움도 피해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딴은, 가장인데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그것으로 족할 뿐, 돈을 벌려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다는 그였다.

가장이면서도 숫자에 어둡고 돈이 뭔지 모르고 살아왔다는 그였다. 그로서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살려고 했다지만 그로 인한 주위 사람들의 마음고생까지 잊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가족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안타까움, 자신의 꿈과 자꾸 부닥쳐 오는 모진 현실, 그 세월들을 그는 어떻게 참아낼 수 있었을까.

“태평이지요.”
“….”
“나에게 고민을 주는 원인도 내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막히면 다른 물골로 돌아가면 되지요.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가지면 됩니다. 축지법을 못 하니 기차 타고 타니면 되고, 꼭 농사를 안 지어도 먹고살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이 많이 벌리면 좋겠지만 그것을 위해 내 가치를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솔직하게’ 돈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주어야 할 것은 있다고 했다. 어디에 초대받아 가면 자신의 가치만큼 인정해 주면 좋고, 그러면 그만큼의 가치를 주고 와야 편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돈으로 계산할 뿐이란다. 그래서 미리 얼마 하고 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못나지는 않은 것 같으니 부림당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지요. 내 음악에 향기가 있다면 그것은 내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전달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의 이런 태평스러움은 가수라는 직함으로 40평생을 살면서도 아직 악보조차 볼 줄 모른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음이 들릴 뿐 악보로 그 음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만 보는 악보를 만들어 사용하고, 음반 작업을 할 때도 테이프에 담아 주거나 직접 노래를 불러 음을 전달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미처 기록하지 못한 즉흥곡이 수천 곡쯤은 될 것이라고 한다.

그가 악보 보는 법을 익히고자 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배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경기도 남양주군 수동면, 속칭 물골이다. 천마산이 지척에 있고 동네 앞으로는 이름처럼 깨끗한 내가 흐른다. 그 골짜기 안쪽으로 아름다운 전원주택단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그가 사는 집이다.

 

 


“음악이란 새로운 數의 강물”

“그동안 돈을 많이 벌었나 보죠?”
“1999년 다시 상경해 하남에서 살다가 좀더 싼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의정부쪽으로 가는데 남양주라는 표지판이 보이더군요. 뭔가 끌리는 것이 있어요. 무조건 차를 돌려 농막이라도 하나 구해 보려고 했지요. 아침 일찍 출발해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석양 무렵 한 부동산에 들렀는데 ‘좋은 집이 있기는 한데 한번 가 볼까요’ 하고 심드렁하게 말해요. 동네로 들어서자 큰 내가 나오고, 그 냇가에 석양빛이 반사되는데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냇가에는 큰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도착해 보니 이건 너무 좋은 집이었다. 뛸 듯이 기뻐하다 그는 흠칫 놀라 주위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자기 처지에서는 쳐다보지도 못할 좋은 집이었다. 낙담하고 돌아서려는데 복덕방 아저씨가 어깨를 잡아 세웠다.

“전세로 나온 집이라고 하더군요. 마을 위치가 너무 외져 공사를 끝냈는데도 분양이 안돼 건설업자가 알거지가 될 판이라고 해요. 그래서 전세로라도 내놓아 빚을 갚으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쁘다는 조건들이 제게는 오히려 좋은 조건들인 셈이었죠. 지금도 현관문을 들어설 때마다 집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살기에는 너무 근사한 집이죠.”

사진을 찍자, 하고 그 집 근처 축령산이 멀리 마주 바라보이는 언덕배기로 올라갔다. 그가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맞은편 산 능선을 가리키며 “자연스럽게 오르내리는 저 산 능선은 그대로 음악이고 선율입니다” 하고 툭 던지더니 다시 능선을 잘라내고 허리를 마구 파헤치는 개발의 폐해에 대해 열을 올릴 태세다. 말머리를 돌리기 위해 시비조의 질문을 하나 던졌다.

“민요 음반을 구상중이라고 했죠? 그것도 기타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아들었다는 듯 그가 대답한다.
“악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죠. 어떤 악기로 연주해도 굿거리 장단이 나온다면 한국음악이겠죠? 문제는 얼이 들어 있느냐가 중요해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얼’을 주제로 열을 올린다. 어린이라는 말은 그냥 붙여 읽지 말고 ‘어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지식은 없지만 모든 생명체의 유전인자는 다 가지고 있고 또 생생한 얼을 가지고 무엇엔가 어려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여기에 외부에서 못된 것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얼간이, 어리석다는 말은 곧 이렇게 해서 얼이 간 사람, 얼이 썩은 사람을 말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환경파괴도 바로 이런 얼간이들이 자연이나 후손들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밖에 모르고 저지르는 행위라는 데까지 나간다.

“저는 얼든돌이 얼든순이를 만들고 싶어요. 얼찬이를…. 그래서 여건만 된다면 전국의 학교를 돌며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동요를 불러주었으면 해요. 동요를 부르는 것은 잃어버린 옛것을 찾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거든요. 문화 고양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닌가요? 이창동 장관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꼭 이 말을 물어 보고 싶어요. 그리고 저를 많이 썼으면 좋겠다고요.”

그의 말은 동요 속에는 환경운동까지 내재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만큼 그는 자신의 이 말을 이미 얼마간 실천에 옮기고 있다.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여서 전적으로 나서지는 못하지만 방학때거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원도 등 시골 초등학교를 돌며 어린이는 물론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동요를 함께 부른다.

“동요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따라 불러요. 그런 면에서 동요는 일종의 타임머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세대가 나뉘어 자기 세대 노래만 알지요. 모든 세대가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어요. 그런데 동요를 부르다 보면 세대를 초월해 한마음이 되죠.”

한 마디로 동요가 가지고 있는 무게가 지금 우리 사회에 많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이 같은 생각에서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동요를 불렀고, 이것이 그를 동요가수로 알려지게 했다. 그러다 그의 동요를 들은 어느 음반사의 제안으로 1999년 ‘이성원이 부른 어른들을 위한 옛 동요’ 1집에 이어 지난해 2집까지 냈다.

그는 어렸을 때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꿈은 과학자. 사물을 보면 생각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음악은 계산되지 않은 또 다른 수학이며 곧 과학”이라는 생각이다. 음악이란 새로운 수(數)의 강물이라는 것이다. 그 강물을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자신, 즉 이성원이라는 가수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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