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서는 것보다 살아 있다는 게 중요… 에베레스트의 사고 딛고 K2에선 죽음의 하산까지
2007년 봄, 한국도로공사 산악팀(2001년 창단)은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를 꾸렸다. 이 팀은 창단 직후인 2002년 시샤팡마(8,012m) 남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는 등 박상수 대장을 필두로 활발한 등반 활동을 전개했다. 김창호 대장은 2005년에 원정대 참여를 타진했었다. 원정대를 통해 정상 등정보다는 2000년부터 이어 온 파키스탄 카라코룸산군 연구를 계속할 목적이었다.
박 대장은 2년 전의 연락을 기억해 김 대장에게 에베레스트 원정대 참여를 권했다. 장애 산악인으로 감동을 주고 있는 김홍빈 대원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돕기 위해 행정처리와 촬영을 담당해 줄 것을 부탁했다. 김 대장은 흔쾌히 응했다.
순조롭게 원정이 진행돼 김홍빈 대원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이를 촬영한 김 대장은 사우스콜(8,000m)에서 하산하는 김 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텐트에는 박영석 대장이 이끄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 김주형 등반대장도 같이 있었다. 김 대장 팀의 무전기는 고요했다. 그러나 남서벽팀의 무전기에서 심각한 교신이 오고간다.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캠프2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찾아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박영석 대장의 잔뜩 쉰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흘러나온다. 무전기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기다린다. 시간이 멎어버린 듯 흐르지 않는다. 두 볼 위로 눈물이 흐른다.
“희준이하고 현조가 못 내려온 것 같습니다.”
오희준, 이현조 대원은 김 대장과도 각별한 사이였다. 특히, 이 대원은 2005년 루팔벽 변형 신 루트 개척을 함께한 바 있다. 구하러 가야 한다. 정상이 코앞이지만 발길을 돌려야 한다. 박상수 대장도 같은 뜻이다.

“기회는 다시 온다. 우리는 같은 산악인이다. 수색 및 구조 활동에 참여하는 게 산악인의 의리이자 도리다.”
구조에 나서기로 판단했지만, 김 대장은 고상하게 포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정상에 서고 싶어 한다. 본능적 욕구가 꿈틀거리며 판단에 몽니를 놓는다. 우리 원정대의 사고도 아닌데 모든 걸 내던지고 도우러 가는 결정을 내린다는 건 힘든 일이다. 산은 항상 있고 또 기회는 분명 올 것이다. 하지만 그 기회가 언제 올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게다가 예산 문제도 있다. 당시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해 소비되는 돈이 5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5,000만 원이다. 산악인의 윤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고민한다. 덩달아 산악구조는 사고가 발생한 지점을 다시 가야 한다는 의미기에 위험한 작업이다.
하지만 김 대장은 정상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김홍빈 대원이 정상에 올랐기에 ‘팀’은 이미 등정한 상황이었다. 하산한다. 동료를 잃은 슬픔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쳐 정상 등정 실패의 아쉬움은 뒷전으로 미뤄진다. 다행스럽게도 시신이 발견돼 캠프1 밑에서 시신을 운구하는 작업을 함께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오 대원과 이 대원을 기리며 세 가지를 결심한다. 첫 번째, 다음에 에베레스트 올 때는 평범하게 오지 않겠다. 2013년 ‘0 to 8848’ 프로젝트의 첫 씨앗이 됐다. 두 번째, 무산소로 오겠다. 당시 원정대는 산소를 쓰면서 가는 게 원칙이었다. 세 번째, 두 사람과 그 주변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 김 대장은 이 다짐들을 되새기며 잔인한 봄을 견디고 여름을 맞았다.


2007년 여름, K2-브로드피크 연속 등정
2006년 초겨울, 김 대장은 같은 해 봄에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부산 산악연맹으로부터 2007년 K2(8,611m) 등정에 동참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원정대는 파키스탄이 초행길이라 행정 처리와 가이드를 담당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선배 산악인 카일라스여행사 김수현 대표가 김 대장과 원정대를 연결해 줬다. 김 대장은 베이스캠프까지만 가이드해 주고 인근 산군을 탐사할 요량으로 부산에서 홍보성 원정 대장을 만난다. 홍 대장은 봄에 오른 에베레스트 보고서를 보여 준다.
“이 보고서 얼마예요?”
김 대장이 묻자 홍 대장이 흠칫 놀란다. 지금껏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하면 무료로 줄 수 있는지 묻는 사람밖에 없었다. 사겠다고 한 사람은 김 대장이 처음이었다. 홍 대장은 “너도 산악인이고 등반가인데 베이스캠프만 가지 말고 등반을 하라”며 김 대장을 등반대원으로 승격시켰다. 김 대장은 기억에 없는 일로, 홍 대장이 나중에 알려준 사실이다.
김 대장은 2000년에 영호남 K2 원정대와 같이 출국한 바 있지만 K2 원정대에 포함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시 김 대장은 파키스탄 카라코룸 일원 탐사를 위해 떠나는 길이었다. 영호남 K2 원정대와 가는 길이 비슷했기 때문에 잠시 동행한 것이다. 이때의 인연으로 당시 원정대장인 이성원 대장과 함께 5년 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변형 신 루트 개척을 하게 된다. 작은 인연이 맺은 결실들이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다시 파키스탄으로 향한 김 대장은 스카르두에서 부산 팀과 합류해 발토로빙하를 거쳐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는 수많은 해외 원정대들로 북적였다. 1957년 헤르만 불이 있던 오스트리아 원정대의 브로드피크 초등 50주년을 기념해 수십여 팀이 모인 것이다.
여러 팀이 모이자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내심 서로 다른 원정대가 눈밭을 뚫고 로프도 깔아서 루트를 개설해 주길 원하는 듯했다. 이런 일은 현재도 히말라야 같은 고산 등반에서 여러 팀이 모이면 왕왕 일어난다. 심지어 눈치 싸움이 실제 싸움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김 대장은 인터뷰 전날(6월 18일)도 모 베이스캠프에서 사건이 일어나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 원정대가 개척해 놓은 루트를 스위스-유럽 원정대가 이용하지만 이용료는 지불하지 않겠다고 버텨 갈등이 생겼다. 히말라야에서는 한 원정대가 먼저 나서 루트 작업을 하면 뒤따르는 원정대는 소정의 이용료를 지불하는 것이 관례이자 에티켓이다. 단순히 사례 차원이 아니라 루트를 개척하면서 발생하는 장비와 인력 소모에 따른 비용을 보상해 준다는 개념이다. 더불어 루트를 이용하면서 악천후에 훼손된 루트가 있으면 같이 보수해 주고, 베이스캠프에서 사전에 구간을 나눠 개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번 스위스-유럽 원정대는 이용료도 내지 않고, 이로 인해 생긴 갈등 끝에 심지어 로프를 잘라 버리겠다고까지 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한국원정대는 해당 발언을 녹음해 둔 상태다.
김 대장은 “에티켓을 갖추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그냥 받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상당수 외국 원정대들은 “우리는 경량·속공으로 대표되는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하기 때문에 고정로프와 피켈을 설치하지 않는다”며 “루트는 비슷하게 가도 로프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규모 장비를 써서 등반하는 것이 보편적인 한국이나 일본 원정대를 약간 깔보는 경향이기도 하고 이용료를 지불하지 않기 위해 하는 말이다.
문제는, 말은 그렇게 해놓고 사용을 한다는 것이다. 아래 캠프에서 등반하는 과정이 뻔히 보이는데, 로프를 사용하고서는 ‘단독등반’, ‘알파인등반’이라고 떠벌리는 꼴불견을 보인다. 김 대장은 “산은 공정하다”며 “거짓은 밝혀지기 마련이고, 로프를 사용 안 하려고 능력 밖의 일을 하면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와 사고가 발생한다”고 일갈했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K2 루트 개척 이뤄
베이스캠프에서 김 대장은 홍 대장에게 자신의 등반 계획을 제시한다. 10일 안에 마지막 제4캠프(8,000m)까지 로프를 깔고 캠프를 설치하겠다는 내용이다. 봄에 에베레스트에서 고소 적응을 마쳤고, 같은 원정대의 김지우 대원도 티베트 쪽 고산에서 고소적응을 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홍 대장은 “국가대표급 클라이머로 구성된 1986년 K2 원정대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김 대장은 펨바 카일라, 파상 세링, 니마 노르부 3명의 셰르파만 데리고 캠프 개척에 나섰다. 루트 개척 방식은 이렇다. 김 대장이 앞서 후등확보 없이 자기확보만 한 채 셰르파 1명을 데리고 앞서 나가며 배낭에서 로프를 풀면서 작업을 한다. 배낭에 로프가 다하면 뒤에 붙은 셰르파들에게서 로프를 조달 받는다. 단순하고 명쾌한 방식이지만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그렇게 캠프1, 2를 이틀에 하나씩 설치한 후 하루를 쉬었다. 김 대장이 앞에서 루트작업을 하는 사이 김지우, 김진태, 하영호, 박주원 대원은 아래에서 물자를 조달했다. 그리고 캠프3, 캠프4를 또 다시 이틀에 하나씩 설치했다. 9일 만에 캠프4까지 설치를 끝냈다. 한 팀이 전체 루트작업을 9일 만에 마친 것은 K2 등반사에 유례가 없는 최단시간의 작업이었다.
이 등반은 K2와 브로드피크에 머물던 45개 원정대에게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이자 사건이었다. 같이 루트 작업을 한 셰르파들은 김 대장을 ‘정열적인 클라이머Hot Climber’라 부르며 “김창호는 세다”는 말만 반복했다. 셰르파를 한 번도 선등에 세우지 않고 평지를 걷듯 러셀Russel(눈을 헤치고 나가며 길을 만드는 것)하는 모습이 경이롭기 때문이다. 단순히 육체적인 힘이 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랫동안 히말라야산군을 탐사하며 축적한 지식과 등반 능력까지 전부 ‘세다’는 말이다.
심지어 한 미국 원정대원은 베이스캠프에서 김 대장에게 이상한 요구를 한다.
“Show me your leg. (다리를 보여 줘.)”
“What? Why?(뭐? 왜?)”
느닷없이 다리를 보여 달라는 요청에 김 대장은 당황했다. 이유인즉, 서있기도 힘들고 10분도 채 하기 어려운 러셀을 혼자서 계속 해내는 파괴력이 놀라워 대체 어떤 다리를 가졌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악천후·셰르파 추락사, 악재 딛고 등정해
캠프4까지 구축하고 정상 등정을 노리는 원정대에게 악재가 찾아왔다. 등정을 시도하려는 첫날 새벽에 기온이 영하 30℃로 떨어지고 초속 30m가 넘는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등 악천후가 계속된 것이다. 결국 정상 등정을 포기하고 베이스캠프로 철수해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10일 남짓 기다린 끝에 기상이 좋아지자 단숨에 캠프4로 올랐다.
새옹지마다. 캠프4 자리에 캠프4가 없었다. 강풍에 텐트와 텐트 안의 산소통 9개, 산소마스크 6조, 식량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원정대는 다시 베이스캠프로 철수해야 했다. 9일 만에 캠프4 설치라는 과업의 의미가 퇴색된 데다 소실된 물자로 인해 산소도 부족했다. 이번 원정은 통상루트로 고정로프를 이용하고 산소를 사용해 오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1통의 예비는 있어야 하는데…”
홍 대장이 말끝을 흐렸다.
“제가 안 쓰겠습니다.”
결국 김 대장이 무산소를 자원했다. 그러나 김 대장 개인의 기록에 대한 욕심이 빚어낸 상황이 아니었다. 산소는 쓰던 사람이 안 쓰는 것이 계속 안 쓰는 것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 대장은 앞선 봄 에베레스트에서 8,500m까지 무산소로 진출해 적응한 경험이 있는 상태였다. 팀으로서 최선의 판단이다.
다시 날을 잡아 정상 등정에 도전한다. 오은선 대장이 있는 한국여성대도 같이 움직였다. 악천후로 훼손된 루트를 다시 김 대장이 러셀하고 개척하며 나아간다. 보틀넥 구간(8,400m)까지 순조롭게 도달했다.
“낙석!”
김 대장이 일성을 내뱉았다. 주먹만 한 낙석이다. 뒤따르던 니마 노르부 셰르파가 낙석을 보고 체중을 옮기는 순간, 균형을 잃고 미끄러졌다. 단단한 설사면에 피켈 샤프트를 깊게 박지 않았다. 니마가 피켈로 첫 번째 제동을 시도하고, 사면이 평평해지는 부분에서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보였다. 마음속으로 ‘멈출 수 있다’고 되뇌었다. 그러나 니마의 몸은 남쪽 수천m 아래 빙하로 사라진다. 니마와 같은 마을에서 함께 태어나고 자란 파상, 펨바는 울음을 멈추지 못한다.
“니마가 떨어졌습니다.”
베이스캠프에 있는 홍 대장에게 상황 보고를 한다. 북받치는 울음을 참느라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원들의 의견을 물어 결정해라. 니마를 생각해서라도 등정하는 게 좋다.”
김 대장과 김진태 대원이 등정을 계속하고, 김지우 대원과 파상, 펨바는 캠프4로 사고 후처리를 위해 내려가기로 결정됐다. 봄의 사고와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에는 김 대장 팀의 목적이 달성된 상황이었다. 또한, 지금 일어난 사고는 팀 차원의 실수가 아니었다. 히말라야 등반대는 사고의 원인에 따라 다르지만 대원이 사망해도 후속조치 후 등반을 계속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모두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오르고자 모였기 때문이다.
눈물을 머금고 등정을 강행, 마침내 정상에 섰다. 등정 후 캠프4로 내려섰는데 기상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화이트아웃(강설과 산안개로 시계가 하얗게 보이는 현상)으로 자기 손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표식기도 보이지 않고 캠프4에 식량도 한정된 상황.
결국 다시 김 대장이 나섰다. 엎드려서 손으로 길 주변을 더듬으며 대소변을 찾았다. 홀로 히말라야를 탐사하면서 생존본능으로 터득한 방법이다. 여러 원정대들이 길을 오가며 남긴 인분이 길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순간, 구름 사이로 텐트가 보였다. 캠프3다. 살았다. 죽음의 산 K2에서는 정상에 올랐다는 것보다 살았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브로드피크는 속공으로 올라
K2를 등정한 후 브로드피크(8,047m)를 오를 준비를 했다. 일기예보가 계속 좋지 않아 빠른 속공 등반을 노렸다. 시속 70~80km의 강풍이 계속 불었다. 캠프3에서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8시간 정도 날씨가 좋아진다는 예보를 받고 정상 공격을 결행했 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앞서 정상 등정에 성공한 팀을 마주쳤다. 22시간 동안 추위에 떨고 탈진한 상태로 정상까지 러셀하고 루트를 만든 팀이다.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빠른 속도로 전위봉으로 오른 뒤 주봉까지는 뛰었다. 마침내 정상에 섰지만 8시간 중 50분이 남았다. 또 다시 도망치듯 하산한다. 휘몰아치는 악천후를 뒤로한 채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잔인했던 2007년의 끝이다.
김 대장은 이 등정으로 한국산악회가 주최한 제3회 황금피켈상을 수상했으며, 부산산악연맹에 눈도장을 받아 이듬해 히말라야 부산 원정대의 핵심 멤버로 발탁된다. 그만큼 등정에서 보여 준 파괴력이 놀라웠다.
김 대장은 “산이 간절하기 때문에 빠르게 오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산의 앞모습뿐만 아니라 뒷모습, 산에서의 경험과 우정 등 김 대장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소중하다 못해 애절하다. 그렇기에 산의 역사까지 조사하고 공부한다.
2005년 낭가파르바트에서 한 대원이 김 대장의 어마어마한 연구량을 보며 묻는다.
“형은 왜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해?”
“산에서는 알아야 살 수 있으니깐. 나는 산에서 죽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