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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버섯의 계절… 능이는 간데없고 ‘버섯되비지탕’에 홀리다

산야초 2018. 9. 2. 23:35

야생버섯의 계절… 능이는 간데없고 ‘버섯되비지탕’에 홀리다


 
 이택희의 맛따라기 - 충북 보은 영농법인 ‘고시랑장독대’

 
충북 보은의 영농법인 '고시랑장독대'의 지민정 대표가 끓인 버섯되비지탕. 첫술을 뜨니 버섯 향이 현기증처럼 진동했다. 신인섭 기자

충북 보은의 영농법인 '고시랑장독대'의 지민정 대표가 끓인 버섯되비지탕. 첫술을 뜨니 버섯 향이 현기증처럼 진동했다. 신인섭 기자

가을 야생버섯의 계절이 돌아왔다. 8월 하순 시작해 10월 초까지 이어진다. 이 계절에는 버섯이 많이 나오는 시장 나들이도 큰 즐거움이다. 서울 경동시장과 홍천∙영동∙옥천∙청천(괴산)∙무주∙봉화∙풍기 오일장을 자주 찾는다. 지난해 송이와 싸리버섯을 쫓아다닌 터라 올해는 능이를 찾아보기로 했다. ‘1 능이’라 하지 않던가(사실 이 말은 근거를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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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문해 찾아간 곳은 충북 보은군 회인면 피반령(547m) 너머 산골 마을 신문리였다. 능이 나는 곳을 잘 알고, 지난해 갈무리한 야생버섯 몇 가지를 가지고 있고, 전통음식을 연구하는 ‘고수’가 거기 있다. ‘고시랑장독대 영농조합법인’(043-543-6607)을 운영하는 고상흠·지민정 동갑 부부(53)다. 

가을 버섯 찾아 피반령 산판 뒤져
가뭄에 타는 산 … 나무도 시들어

지난해 갈무리한 5가지 버섯 넣고
5년 조선간장으로 맛낸 되비지탕
질박한 토속음식 깊은 맛에 감동

 
꽃봉오리에 들어앉은 듯 산줄기가 동그랗게 둘러싼 이 마을은 임진왜란 무렵부터 400년 넘게 제주 고씨가 세거(世居)한 유서 깊은 집성촌이다. 지난달 20~21일 그곳에서 산판을 헤매고, 버섯 음식을 해 먹으며 대하 드라마의 한 대목 같은 ‘장독대 사연’도 들어봤다. 
충북 보은 황계봉 자락을 2시간이나 뒤졌으나 버섯을 보기가 어려웠다. 올해는 고온에 비가 오지 않아 산속마저도 말랐다. 신인섭 기자

충북 보은 황계봉 자락을 2시간이나 뒤졌으나 버섯을 보기가 어려웠다. 올해는 고온에 비가 오지 않아 산속마저도 말랐다. 신인섭 기자

◇능이를 찾아=가을 버섯은 백로(9월 8일)에서 한로(10월 8일) 사이가 제철이다. 상강(10월 23일)까지 나기도 한다. 버섯 철만 기다리며 1년을 산다는 지역 주민은 “이곳은 버섯이 늦은 편이라 백로에 시작해 추석 직후에 많다”며 “능이∙송이∙싸리버섯∙밀버섯∙묵버섯∙갓버섯∙밤버섯∙우산버섯∙코버섯 같은 게 난다”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8월 말이면 빠른 능이가 나기는 하지만, 올해는 가물어서 산에 버섯이 없다. 독버섯도 구경할 수 없다”고 산행을 말렸다.
나무 밑동에 폭염과 가뭄으로 자라지 못한 운지버섯이 조그맣게 매달려 있다. 황계봉 자락을 2시간 뒤진 끝에 겨우 찾아낸 버섯이다. 신인섭 기자

나무 밑동에 폭염과 가뭄으로 자라지 못한 운지버섯이 조그맣게 매달려 있다. 황계봉 자락을 2시간 뒤진 끝에 겨우 찾아낸 버섯이다. 신인섭 기자

해는 중천인데 만류를 뿌리치고 올라갔다. 피반령 산줄기에선 아침 햇살이 잠시 드는 6~7부 능선 동향 갈참나무 숲에 능이가 많다고 한다. 고씨가 앞장서 마을 뒤 황계봉(472m) 자락을 2시간쯤 뒤졌다. 평소 물이 쫄쫄 흐르는 골짝에도 먼지가 풀풀 날렸다. 멧돼지가 땅을 헤집은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영역 표시로 몸을 비벼 반질반질 닳은 아름드리 잎갈나무 밑동에는 송진이 흘러내렸고, 누린내가 지열을 타고 훅 끼쳐 올라왔다. 온몸이 젖도록 산을 헤맸지만 버섯이라곤 말라 성장이 멈춘 손톱 크기 운지버섯을 2곳에서 봤을 뿐이다. 
 
◇대물림 음식 버섯되비지탕, 말린 청국장=낙담하며 산에서 내려오자 지씨가 음식 재료를 준비해놓고 기다렸다. 시어머니에게 배웠다는 버섯되비지탕이다. 이름도 처음인데 조리과정은 간단하고 쉬웠다. 가정에서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소개한다. 
버섯과 콩을 갈아 함께 끓이는 음식 재료들. 오른쪽 아래가 능이다. 신인섭 기자

버섯과 콩을 갈아 함께 끓이는 음식 재료들. 오른쪽 아래가 능이다. 신인섭 기자

 -준비물 : 야생버섯(이날은 능이∙싸리버섯∙밀버섯∙참나무버섯∙갓버섯), 콩을 불려 간 되비지, 다진 돼지고기, 씻어서 잘게 썬 묵은지, 봄에 캐 얼려 둔 달래, 매운 청∙홍 고추, 조선간장.
 
 ①조선간장으로 밑간한 돼지고기를 냄비에 볶다가 고기가 하얗게 되면 묵은지를 넣고 함께 볶는다. 버섯의 질감을 느끼려면 돼지고기를 갈아야 한다. 
 ②맹물에 다시마 넣고 3~4시간 우린 물을 넉넉히 붓는다. 
 ③끓으면 버섯을 넣고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김치에 간이 있으므로 조금만 한다. 
 ④되비지를 넣고 센 불로 한소끔 끓인 다음 불을 줄여 서서히 익힌다. 생콩 성분은 빨리 끓어야 맛이 고소하다. 약한 불에서 오래 끓이면 콩 비린내가 남는다. 
 ⑤다 끓으면 달래를 송송 썰어 넣는다. 없으면 안 넣어도 좋다. 마늘은 향이 너무 강해 넣지 않는다. 
 ⑥(기호에 따라)고추를 다져 넣는다.
 탕은 첫술에 버섯 향이 현기증처럼 진동했다. 특유의 능이 향과 싸한 싸리버섯 맛이 어우러져 야성미가 넘쳤다. 국물에서 재료 하나하나의 맛이 느껴지면서 개운했다. 오래 묵은 조선간장의 감칠맛이 뒷받침해 맛의 구조가 두터웠다.
 
처음 먹는 사람들은 공장 조미료(MSG) 넣었냐고 많이 묻는데 전혀 안 넣는다. 조선간장이 내는 맛이라고 했다. 함께 간 사진기자의 첫 반응도 “O원 맛이 나네”였다. 지씨가 자신이 만드는 간장을 맛보라며 종지에 따라줬다. 짜고 맛은 깊었다. 쩐 내는 거의 없고 뒷맛이 깔끔하면서 혀뿌리에 은은한 단맛이 올라왔다.
 
첫날 저녁에는 말린 청국장찌개를 맛봤다. 띄운 청국장을 말린 다음 볶아서 저장해뒀다가 일반 청국장처럼 끓였다. 맛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하나 살아있는 콩 알갱이를 씹는 질감이 새로웠다. 농사철에 일손을 많이 부리던 시어머니가 식사 준비를 수월하게 하려고 만들어 먹던 솜씨를 물려받았다. 산일이나 소 풀 뜯기러 갈 때 간식으로 챙겨가고, 스님들 만행 길 비상식량으로도 썼다고 한다. 볶은 걸 먹어보니 냄새는 별로 없고 볶은 콩처럼 고소했다. 볶으면 보관의 편리뿐 아니라 맛도 더해지는 듯하다.
 
친구의 아버지인 평안도 포수가 옛날 ‘한 보름 길도 없는 산, 눈발 헤치며/짐승 쫓아 헤맬 때 주머니에 싸고 다녔다는 음식./소금과 청국장 손바닥으로 다져/숯불에 구웠던…’(박기영 ‘청국장반대기’ 부분) 그 청국장이 생각났다.
 
◇전통음식의 모색 ‘조선간장 삼겹살’=부부가 전통 장을 활용해 개발한 음식도 맛봤다. 고시랑장독대의 조선간장을 바탕으로 한 특제소스에 재워 숙성한 삼겹살(‘고겹살’)이다. 직접 만드는 간장에 꿀 발효액을 섞은 소스를 고기에 바르고 매운 풋고추를 갈아 넉넉히 뿌려 재운다. 최소 48시간 숙성하는데, 3~4일째에 먹으면 가장 맛있다고 한다. 
고시랑장독대가 새로 출시한 양념 숙성 삼겹살 '고겹살'. 발효액을 첨가해 구워서 시간이 지나도 기름이 굳지 않는다. 신인섭 기자

고시랑장독대가 새로 출시한 양념 숙성 삼겹살 '고겹살'. 발효액을 첨가해 구워서 시간이 지나도 기름이 굳지 않는다. 신인섭 기자

구운 고기는 부드럽고, 요즘 세대가 열광하는 육즙이 촉촉했다. 식어도 부드러웠다. 기름기가 굳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고기를 구울 때 불판에서 흘러내린 기름은 다음날까지 굳지 않고 물처럼 있었다. 소스와 고추의 작용으로 짐작한다. 육식을 즐기지 않는데 많이 먹혔다. 속이 거북하지도 않았다. 곧 시장에 낼 예정이다.
 
 어머니마저 잊은 기억상실 딛고 가꾼 ‘명품 장독대’  
영농조합법인 고시랑장독대 고상흠 대표와 부인 지민정 씨가 충북 보은군 자택 앞에 마련된 장독대를 살펴보고 있다. 능이와 5년 익어야 먹는 된장, 고추장 등을 판매한다. 신인섭 기자

영농조합법인 고시랑장독대 고상흠 대표와 부인 지민정 씨가 충북 보은군 자택 앞에 마련된 장독대를 살펴보고 있다. 능이와 5년 익어야 먹는 된장, 고추장 등을 판매한다. 신인섭 기자

‘고시랑장독대’에 들어서면 100ℓ들이 항아리 약 300개가 구석구석 빼곡하다. 된장 100개, 고추장∙간장이 각 30개, 나머지는 꿀 발효액이 들어있다. 고상흠·지민정 부부의 보물단지다.
 
직접 재배한 콩으로 메주를 띄우고, 꿀 발효액을 넣어 3~5년 숙성하는 이 집의 된장∙간장∙고추장은 청국장과 함께 고급 장류 시장에서 이미 자리를 잡았다. 롯데∙신세계백화점에 제품이 들어가고, 몸에 좋은 음식 찾는 사람들에게는 알려질 만큼 알려졌다. 부부가 장에 매달린 지 20여 년 만에 일군 성과다.
 
1996년부터 장에 관심을 가진 부부는 2000년 어머니의 장 항아리와 가문의 씨간장을 물려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연구에 뛰어들었다. 냄새와 짠맛을 줄이는 데 주력해 꿀 발효액을 넣어 3년 숙성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도 받았다. 핵심기술은 8가지 민간 약재를 활용한 꿀 발효액이다. 집안에서 양봉을 하는 덕분에 터득한 기술이다. 2010년에는 법인을 설립해 사업으로 전환했다.
 
지씨는 2012년 7월 4중 추돌사고의 충격으로 심각한 기억상실에 빠졌다. 어머니와 가족도 모르고, 결혼 전 공무원이던 그가 한글을 제대로 못 읽을 정도였다. 2년 가까이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기억 회복은 못 했다. 지금의 기억은 사고 이후 생산한 것이다. 그때 일을 남편 고씨는 “하루에도 12번을 소리도 못 내고 울었다. 제발, 나를 기억 못 해도 괜찮으니 조금만 진정되어 살아준다면 더 바랄 것도 없겠다”고 적었다.
 
입원 중 주말에 외출해 집에 오면 지씨는 장독대 앞에 앉아있기를 좋아했다. 항아리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 장 담그는 비법은 기록을 해둬 다행히 상실을 면했다. 기록을 토대로 다시 일을 시작하자 몸에 뱄던 동작이 본능처럼 살아나 장 담그는 쪽으론 회복이 빨랐다. 그러나 아직 가족관계 파악이나 응급상황 대처는 능숙하지 않다.
 
수익을 물어보니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겨우 먹고 사는 수준”이라 했다.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말이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lee.tackhee@joins.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