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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아우른 파스타 변주곡… 새로운 노래를 들었다

산야초 2018. 9. 4. 22:10

[friday] 동서양 아우른 파스타 변주곡… 새로운 노래를 들었다

조선일보
  •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     

    입력 2018.08.31 03:00

    [인생식탁]

    [정동현의 음식이 있는 풍경] 성수동 '팩피'

    [정동현의 음식이 있는 풍경] 성수동 '팩피'
    거칠고 강한 맛들이 한데 모여 한 접시만 해치워도 여러 음식을 먹은 것 같은 ‘오징어 리가토니’.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성수동에 새로 생긴 이탈리안 레스토랑 팩피(FAGP·Freaking Awesome Good Pasta)는 오래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봉골레, 카르보나라 혹은 미국식 크림 파스타, 이런 것을 볼 수가 없다. 그것들이 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사람치고 삼겹살 넣어 푹 끓인 김치찌개에 곁들인 쌀밥 싫어하는 사람이 드물듯 그런 메뉴도 유행을 타지 않는다. 마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처럼 끝없이 변주되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옛 히트곡 같다. 그래서 안전하고 그래서 쉽게 선택한다. 본래 이탈리아 요리가 보수적이라 그렇다는 것은 반만 맞는다.

    이탈리아 본토의 대중음식점에 가면 하나같이 비슷한 메뉴를 팔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프랑스를 가도, 영국을 가도 비슷하다. 대중음식점이란 어차피 너르고 느리게 흐르는 일반 저변의 입맛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야 하는 한국도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한국 이탈리아 음식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왔다. 전범 같은 본토 음식과 엇비슷한 맛과 모양을 내는 곳도 그만큼 많아졌다. 그렇다면 이제 자기 색깔과 주장을 낸 음식이 나와야 할 때다. '팩피'는 도전적이지만 탄탄하고 창의적이지만 완숙한, 새로운 노래를 불렀다.

    [정동현의 음식이 있는 풍경] 성수동 '팩피'
    향긋하고 미끈한 동남아 맛이 폭발적인 ‘고수 스파게티니’(위)와 정통에 가까운 담백하고 묵직한 맛을 내는 ‘라구 딸리아뗄레’. (작은 사진) 성수동 팩피의 외관.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뚝섬역과 한양대를 잇는 성동교 옆으로 난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곧 빨간 대문을 단 집을 만났다. 영어 대문자로 쓴 'FAGP'가 문에 달렸고 사람들은 길가에 난 큰 창가에 앉아 있었다. 팩피에는 일반적 테이블 좌석이 아예 없었다. 창가를 바라보고 앉든가 아니면 주방을 향해 앉든가 둘 중 하나, 바 좌석밖에 없었다. 여럿이 온다면 예약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니 테이블 폭이 넓고 여유로워 마음이 편해졌다.


    앞을 보니 야구 모자를 거꾸로 쓴 요리사가 신중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뒤로 무서울 정도로 번쩍이는 주방이 보였다. 장발장이 훔쳐 간 은식기가 저렇게 빛났을까? 사단장 방문 예정 연병장처럼 깨끗한 주방을 무대로 요리사는 리듬을 탄 춤꾼처럼 서두르지도 주저하지도 않으며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이 집 메뉴는 가게 이름대로 샐러드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파스타였다. 오직 하나뿐인 샐러드를 빼먹을 수는 없었다.


    팩피의 샐러드는 여느 식당에서처럼 성의 없이 봉지에서 꺼낸 새싹 잎에 영혼 없는 드레싱을 버무려 낸 종류가 아니었다. '아스파라거스 카펠리니 샐러드'라고 작명한 의도대로 (카펠리니는 '에인절 헤어'라고도 부르는 얇은 파스타 면이다) 푸릇한 아스파라거스를 얇고 가늘게 채를 쳐서 볏짚단 쌓듯 접시에 곱게 담아냈다. 그 위에는 소금에 절인 달걀노른자를 가루 내 뿌렸고 국화 꽃잎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 온 것처럼 종업원이 다가와서 아스파라거스 즙으로 맛을 낸 소스를 손수 뿌렸다. 열을 가하지 않은 채소의 푸릇하고 향긋한 맛이 새벽녘 풀밭 한가운데 선 것 같았다.

    샐러드를 거의 다 비워갈 때쯤 타이밍을 맞춰 가스불 위에서 팬을 돌렸다. 아롱사태를 쓴 '라구 딸리아뗄레'가 뿌연 수증기와 함께 테이블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내놓는 파스타 중에 가장 평범한 종류였다. 넓은 파스타 면에 소고기 살이 알알이 씹히는 라구 소스를 올려 훌훌 말아 입에 넣었다. 지방이 거의 없는 아롱사태를 써 맛이 담백하고 꾸밈없었다. 파스타 위에 뿌린 이탈리아산 파르미자노 치즈는 체온에 녹아 흩어지며 은은한 신맛과 뚜렷한 감칠맛을 냈다.

    시차를 두고 다음 접시 '고수 스파게티니'가 완성됐다. 팬에 코코넛밀크를 끓여 소스의 바탕을 잡고 닭가슴살과 가느다란 스파게티니를 넣고 끓인 뒤 위에 오이와 고수, 고수를 우려낸 기름에 버무렸고 고수 퓨레를 따로 담아냈다. 오이와 고수, 코코넛밀크는 마치 두운(頭韻)을 맞춘 시처럼 맛의 결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닭가슴살은 고소한 코코넛밀크에 녹아내려 맛에 무게감과 식감을 더했다. 훌륭한 동남아 음식을 먹은 것 같았지만 조리 방법과 맛의 구성은 이탈리아 음식이었다.

    마지막 접시 '오징어 리가토니'를 먹을 때쯤 돼서는 메뉴와 음식에 서린 기승전결을 눈치챌 수 있었다. 버터를 끓여 만든 브라운 버터 소스에 견과류와 로메인 상추, 오징어, 속이 빈 원통형 파스타 리가토니를 함께 살짝 볶은 다음 불을 내뿜는 토치로 겉을 그을린 이 요리는 집시의 무곡(舞曲)처럼 발랄하면서도 어느 순간 음울해지는 변주를 담았다. 버터와 견과류, 오징어와 로메인 상추는 고소하면서도 무거운 금속성 맛을 냈다. 하지만 그 위에 그을려 익힌 레몬즙을 뿌리자 관중의 환호성을 들은 밴드처럼 맛에 살이 붙고 피가 돌았다. 그 순 간 이 작은 식당이 무대로 변했다. 주방을 빛내고 손님을 반기는 요리사와 종업원들은 가스 불꽃에 리듬을 살리고 작은 접시에 화음을 담은 악단이었다. 늘 다른 노래를,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푸른 힘이었다.

    팩피: 아스파라거스 샐러드(1만원), 고수 스파게티니(1만9000원), 라구 딸리아뗄레(1만9000원), 오징어 리가토니(2만원). (02)6052-7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