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진 월드뮤직 최고의 전문가 서남준 선생의 글을 서문으로 러시아 음악 전문가들이 극찬한 안나 게르만의<스텐카 라진>, 러시아 국민 성악가 이반 뻬트로프가 부르는 타이틀 곡 <트로이카>,쟌나 비쳅스카야의 <속요>, 안나 리트비넨코가 부르는 <짙은 자주빛 숄>등 이 겨울에 어울리는 주옥같은 러시아 레퍼토리들로 가득하다.
노래하는 대지 러시아, 그 영혼의 시와 노래
지난 1993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러시아 사회를 취재한 서방 언론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바 있다.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어를 숭배하고 장려하며, 모국어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어는 그 음률이 매혹적이고, 문법은 복잡하며, 어휘가 풍부하기 때문에 얼렁뚱땅 배우기엔 큰 고역이지만 착실히 배워두면 큰 자산이 된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초등학교 때 배운 시를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암송할 수 있다. 전통 문학 작품들은 신성화되다시피 한다. 심지어 가장 아둔한 정치인들도 놀랄 만치 우아한 언어로 자기 의견을 표현한다. 또 신문들은 섬세한 산문체 문장들로 가득 차 있다. 음악회는 음악을 이해하고 철저히 향유할 줄 아는 청중들로 메워진다. 훌륭한 복장의 청중들은 음악회에 참석함으로써, 사회주의에 빼앗겼던 기품을 어느 정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이때만큼은 그들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음껏 웃는데, 러시아에선 보기 드문 광경이다. 좋아하는 음악가가 등장하면 갈채를 아끼지 않고 장미나 카네이션 꽃다발을 무대에 던지기도 한다. 사실 러시아인들은 ‘브라보!’ 소리를 천박하지 않게 외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민들 중 하나다.”
막심 고리키는 “러시아人은 워낙 비참하게 살아 슬픔 정도는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러시아의 전 역사는 엄청난 시련으로 점철되어 왔고 경제 성장 속도에서 중국을 앞서는 호황을 맞고 있다는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신흥 경제 붐은 대체로 모스크바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모스크바에서조차 그 혜택은 잘 사는 일부 소수만이 누린다. 대다수 국민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극빈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며 ‘언젠가는 생활이 나아질 날이 오겠지’하는 헛된 기대를 걸며 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러시아인들은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이후 경제가 피폐하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꺾였을지는 몰라도 러시아의 ‘영혼’은 건재하다고 주장한다. 그 ‘영혼’을 가장 잘 대변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푸슈킨, 레르몬토프, 제르좌빈, 블록, 예세닌, 파스테르나크와 같은 시인들과 그 시를 노래하는 민속악기 발랄라이카, 그리고 민요가 아닐까.
영혼이 기쁘면 기쁜대로, 영혼이 쓸쓸하면 쓸쓸한대로 인간들은 노래를 불러왔다. 가진 자는 축복을 위해, 가난한 자는 슬픔을 덜기 위해, 힘든 자는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 그렇게 민중의 삶과 함께 해온 것이 민요이다. 그래서 러시아 민요의 소재는 진정 다양하다. 피곤한 일상의 노동에 지친 심신에 힘을 주기 위한 노래(Dubinushka)가 있고, 젊은 연인들의 애틋한 연가(Katiucha)가 있다. 역사상 찬연한 빛을 발하는 대사건을 서사풍으로 읊기도 하고(Styen`ka Razin, Utyos) 장려한 대자연의 장관을 노래하기도 하며(A Birch Tree in the Field), 시집가기 전의 처녀와 노모가 나누는 다감한 대화가 그대로 노래가 되기도 한다.(Red Sarafan) 그런가 하면 시의 아름다움을 맛 볼 수 있는 가사와 음악의 선율이 그 위에 덧붙여 지고 또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영혼이 함께 어우러진 러시아 로망스가 주는 매혹은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을 활짝 피어나게 만든다. 민속악기 발랄라이카의 반주에 실린 러시아 민중들의 노랫가락은 어떤 의미에선 ‘듣는 역사’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발랄라이카(Balalaika)만큼 러시아를 느끼게 하는 악기가 또 있을까? 3각형의 울림통에 3개의 현을 가진 이 소박한 류트 기타계의 탄주악기는 예부터 러시아 농민들에게 사랑을 받아, 들이나 숲 속에서 노래와 함께 연주되어 왔다. 울림통의 크기(음역)에 따라 제일 작은 프리마(주로 독주에 쓰이고 조현은 E-E-A )에서 세쿤다, 알토, 바스, 콘트라바스의 5종으로 이루어지며, 그 소리는 마치 인간의 수다를 닮은 듯 밝고 투명해서 골짜기를 사이에 둔 건너 편 산에서도 잘 들릴 정도다. 구슬프게 멜로디를 노래하는가하면 복잡하고 활발한 리듬까지 놀라울 정도로 또렷하게 표현해 낸다. 보기에는 단순한 악기 같지만 애수와 격정에서 슬픔과 기쁨을 그 음색의 다양함으로 노래하는, 너무나 풍부하고 독특한 표현력은 러시아인들의 일상 언어의 일부분이 되어 러시안 로망스와 함께 그들의 정신사에 엄청난 풍요로움을 더하고 있다. 러시아의 시인 네크라소프가 “풍요한 러시아여, 그리고 가난한 러시아여”하며 노래했듯이 러시아 민중의 삶은 언제나 가난의 역사였으나 시와 음악은 실로 풍요로웠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렇듯 흔들림 없는 러시아인의 정신구조를 러시아의 사상가인 니꼴라이 베르쟈예프는 “러시아의 혼에는 러시아의 국토가 광대하고 망망하고 무한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러시아인의 정신지리는 자연지리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끝없이 막막한 대평원으로 이어지는 대지. 그 표면에는 뚜렷한 윤곽도, 한계도 없다. 산이나 계곡의 복잡함도 없고 각 지역의 특수한 형태를 규정할 만한 것이 없이 오로지 무한으로 흘러 이어지고 러시아의 강도 언제나 평원을 따라 무한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자연지리와 소용돌이 쳐온 역사가 러시아 정신의 평탄함과 애수를 낳은 것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음악속에 깃들어 있는 독특한 애수감에서 결코 절망감은 느낄 수 없다. 마치 발바닥으로 얼어붙은 땅을 굳건히 딛고 서 있는 힘 같은 것이 있다. 역사에 대한 종국적인 승리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그 힘은 어쩌면 하나님의 참된 목소리가 아닐까. 러시아의 속담에 ‘민중의 목소리는 곧 신의 소리’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