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 박인수(좌)와 듀엣으로 부른 '향수'의 앨범 재킷
정지용·김희갑의 '향수'…클래식과 팝의 더없는 앙상블
최근 한 남성합창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60여명에 달하는 남성들의 코러스는 중후하면서도 우렁차게, 때로는 감미롭게 연주회장을 가득 채웠다. 앙코르가 터져 나오자 ‘경복궁 타령’에 이어 ‘향수(鄕愁)’가 선사됐다. ‘경복궁 타령’의 흥과 열정으로 끓어올랐던 객석은 일순간 마치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가라앉았고 이내 저마다의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언어라는 게 이토록 아름다운 조합일 수 있구나’라고 감탄하게 되는 ‘향수’의 첫 대목. 차분하고 애잔한 이 노래는 납북 시인 정지용의 시에 작곡가 김희갑이 곡을 붙여 1989년 발표한 곡이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어를 구사했던 정지용은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역사의 비극 속에서 ‘납북 시인’으로 오랫동안 투명인간 대접을 받은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그의 시로 만든 노래는 다른 이의 시로 교체돼 불렸고 심지어 ‘정O용’이라 표기되기도 했다.
그의 시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본 건 1988년 금지곡이 풀리면서다. 이듬해 정지용 흉상 제막식이 열렸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부른 노래가 가수 이동원과 당시 서울대 음대 교수였던 성악가 박인수의 듀엣곡 ‘향수’였다. 시인과 대중음악 작곡가, 대중가수와 성악가의 색다른 조합으로 탄생한 ‘향수’는 발표되자마자 화제와 관심 속에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 후 이 곡은 큰 후폭풍에 휘말렸다. 음대 교수인 성악가가 대중음악을 부른 것에 대해 ‘클래식을 모독했다’며 성악계가 들고 일어난 것. 이른바 ‘박인수 향수 파문’이다. 차기 국립오페라단 단장으로 내정돼 있던 박인수는 이로 인해 국립오페라단을 떠나야 했다.
사실 당시 사건은 억지였다. 이동원과 박인수의 ‘향수’가 나올 즈음엔 이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컨트리 가수 존 덴버의 ‘퍼햅스 러브(Perhaps love)’가 새로운 시도의 크로스오버 곡으로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던 때였다. 게다가 도밍고와 박인수 모두 클래식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으니 ‘클래식을 모독했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도밍고는 되고 박인수는 안 되는 어이없는 논리를 들고나온 것이다.
박인수는 국립오페라단을 떠나며 “클래식을 모독하는 건 대중가수와 함께 노래하는 게 아니라 클래식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남겼다. 재미있는 건 그 파문 이후 성악가들의 크로스오버 무대가 오히려 불같이 일어났다는 것. 정통 발성을 버리고 대중음악 창법으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성악가도 속출했다. 도리어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던 박인수만 억울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았다. 박인수의 생각과 그의 음악관을. 또한 클래식은 어쭙잖게 군림하는 음악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숨 쉬는 음악이라는 것을. 해서 박인수는 더 큰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보수적이었던 클래식계의 벽을 깨트린 선구자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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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옥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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