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논설위원이 본 태극기 집회, 2년 6개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열기가 비등점으로 치솟던 2016년 11월 19일. 서울역 앞에 일군의 우파 인사들이 태극기 들고 모였다. "대통령 하야·탄핵에 반대한다." 그들의 외침은 당시의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진 돌출이었다. 촛불에 내몰린 정권을 지키려는 외로운 비명이었다. 대통령 지지율은 5%였고 그를 겨누는 언론 보도는 홍수를 이뤘다. 그날 시위를 주도한 한 연사가 이렇게 외쳤다. "박 대통령이 하야하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될 것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추진해 북한 김정은이 대통령이 될 것이다." 선지적 예언 같기도 한 그 외침 이후 2년 6개월이 흘렀고, 그날을 시원으로 하는 태극기 집회는 한 주를 거르지 않아 어느덧 120주를 넘겨 이어지고 있다. 좋든 싫든 태극기 집회는 토요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상징이 됐다.
◇태극기 집회의 분화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1000명 이상 참여하는 집회가 3년 가까이 매주 쉬지 않고 열리는 경우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고 했다. 그사이 태극기 집회는 분화하고 진화했다. 요즘 태극기 집회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네 곳에서 열린다. 우리공화당과 '박 대통령 1000만 석방운동본부'가 주도하는 서울역 집회, 태극기시민혁명 국민운동본부(국본)가 주도하는 대한문 집회, 일파만파애국자연합(일파만파)의 동화면세점 집회, 자유민주국민연합(자유연합)의 교보빌딩 앞 집회 등이다.
이들은 2017년 초까지 한몸이었다. 박 전 대통령 팬 클럽인 '박사모'를 주축으로 여러 우파 단체들이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라는 이름으로 뭉쳐 있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 이후 '탄핵 무효 국민 저항 총궐기 운동본부(국민저항본부)'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다 그해 5월 대선을 어떻게 치를지를 두고 생각이 갈리면서 분화했다. 정당을 만들어 대선에 참여하자는 쪽과 시민단체로 남아 저항하자는 세력으로 나뉜 것이다. 대선 참여파는 두 번째 '새누리당'을 창당하고 조원진 의원을 대선 후보로 내세웠다. 이들은 이후 대한애국당을 거쳐 현재의 우리공화당에 이르렀다. 우리공화당 서울역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평균 1만명 이상 참석하는 등 규모가 가장 크다. 참석자 수만 보면 태극기 집회 주류다. 한 관계자는 "정당 조직이다 보니 인원 동원에 유리하고 탄핵 무효·박근혜 석방 등 선명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 참석자가 많다"고 분석했다.
대선 참여 반대 세력은 "대선에 정당으로 참여하면 탄핵을 인정하게 된다"며 우리공화당 측과 다른 길을 걸었다. 이들은 다시 국본, 일파만파, 자유연합 등으로 분화됐는데 조금씩 다른 컬러와 강조점을 갖는다. 세 곳 집회 참가자는 각각 1000명 안팎이다. 국본은 탄핵 문제에선 '태블릿PC 조작 가능성'을 강조하고, 한·미 동맹 강화나 북한 김정은 반대 등 우파 진영 이슈를 집회 테마로 내건다. 이들은 "태극기 족보가 탄기국→국민저항본부→국본으로 이어진다"며 자신들이 적장자라고 주장한다.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이었던 도태우 변호사가 대표다.
일파만파는 육군사관학교·3사관학교 등 군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대한민국이 사실상 공산화되고 있다"며 '공산화 저지'를 모토로 내세운다. 국민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시키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일파만파(一波萬波)'로 지었다고 한다.
기독교·군 관련 우파 단체가 뭉쳐진 자유연합은 "탄핵은 잘못된 일"이라면서도 보수가 이 문제에만 매몰되면 안 된다고 한다. '정권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네 개 단체 중 친박 색깔이 가장 옅다. 노재봉 전 총리, 서경석 목사 등이 원로 위원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토요일 오후 광화문에선 격앙된 목소리에 담긴 다양한 우파 담론이 펼쳐진다. 한쪽에선 한국당 성토가 나오고, 다른 쪽에선 보수 통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또 다른 쪽에선 '6·25전쟁 사진전'이 열리고,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는 요구도 나온다. 지난달 29일 열린 광화문 집회에서 공통으로 내걸린 주제는 '트럼프 미 대통령 환영'이었다.
4개 단체는 집회는 제각각 하지만 행진은 함께 할 때가 많다. 각자의 집회가 끝나는 오후 3~4시경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 쪽으로 행진하는데 자연스럽게 시위대가 꼬리를 문다. 누가 하자고 해서 한 건 아니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다. 이들은 공히 "분화가 곧 분열은 아니다. 목표가 같기 때문에 언제든 다시 뭉칠 수 있다"고 한다.
◇총선 두고 생각 다른 태극기
태극기 집회는 내년 4월 총선을 전후해 합종연횡하는 등 다시 요동칠 가능성이 있다. 총선에서 보수 진영이 어떻게 싸워야 하느냐를 두고 4개 단체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공화당은 총선 독자 출마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조원진 대표는 "이번 총선은 문재인 대 황교안의 싸움이 아니라 박근혜 대 문재인의 싸움"이라고 했다. 한국당을 향해 "우리와 손잡고 싶으면 '사기 탄핵'이었음을 인정하고 탄핵에 찬성했던 의원들을 내보내라"고 하고 있다. 내심 선거제 개편을 중요한 변수로 보고 있다. 실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선거에 도입되면 우리공화당이 적지 않은 의석 수를 가져갈 수 있다는 분석이 정치권에서 나온다.
우리공화당과 달리 세 개 태극기 집회 단체는 "어쨌든 다음 총선은 보수가 하나가 돼 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당 중심으로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국본 관계자는 "한국당이 제대로 변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국당을 중심으로 보수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한다"고 했다. 비판적 지지 입장이다. 일파만파 관계자는 "보수는 근본적으로 같이 가야 한다. 결국 한국당으로 총선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자유연합 관계자는 "한국당이 정신 차리고 악착같이 싸워주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당 지지세가 비교적 뚜렷하다. 지난 4월 한국당의 광화문 장외 투쟁 때도 우리공화당을 제외한 세 단체가 주최한 집회 참가자들은 한국당과 함께했었다. 우리공화당이 총선에 독자적으로 나서려는 것에 대해 다른 단체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한 관계자는 "친박계 정치인들이 박 대통령과 집회 참석자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만성화된 주말 도심 집회, 시민들 불편 느껴도 민원은 줄어]
지난달 29일 서울 광화문에서 어김없이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모자와 자외선 차단용 마스크 등으로 무장한 참가자들 모습에서 집회 경력 30개월의 내공이 느껴졌다. 가끔 젊은 얼굴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50~70대. 집회의 하이라이트는 풍물대를 앞세운 행진이다. 스피커가 '문재인 퇴진' '박근혜 석방'을 토해낸다. 제복 차림으로 대형 태극기를 각 잡아 들고,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을 앞세운 행렬은 흡사 1970년대 도심 퍼레이드 같다.
태극기 집회는 초창기 '틀딱들의 민폐'로 그려지고, '시대착오적 극우들이 자기들끼리 울분을 토하는 장(場)'으로 묘사됐다. "태극기집회 때문에 주말 시내 교통이 엉망이다." "집회 뒤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고 태극기까지 버려졌다" "공무원과 기자들에게 욕설하고 몸싸움을 벌였다" 등의 기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집회가 계속되면서 시민들의 불만 토로와 집회를 겨냥한 민원이 최근 많이 줄었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현재 경찰에 접수된 집회 관련 민원이 '0건'이라고 했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시민들이 불편을 느끼더라도 도심 주말 시위가 너무 오래 진행돼 만성화된 데다 주거지가 아니다 보니 신고를 잘 안 하는 것 같다"고 했다.
태극기 집회 주최 측도 시민들과의 마찰은 신경 쓰는 눈치였다. 집회 도중 '시민들이 갈 길을 막지 말라'는 안내를 거듭해서 내보냈다. 완장을 차고 질서 유지를 맡은 인사들도 따로 있었다. 국본 관계자는 "초기엔 기자나 시민들과 많이 싸웠지만 지금은 참여자들이 국민 공감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했다.
다만 최근 우리공화당의 광화문 광장 천막 설치에 대해선
서울시에 민원이 쇄도했다. 우리공화당 천막이 설치된 5월 10일부터 6월 19일까지 시에 접수된 시민 민원은 205건에 달했다. 통행 방해가 140건으로 가장 많았고, 폭행(20건)과 욕설(14건)이 뒤를 이었다. 이에 우리공화당 측은 "민원 사실 여부에 대한 검증이 없었다"며 "대부분 좌파들이 한 민원으로 추정되고 서울시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