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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촌일기] “인자 때꺼리 걱정은 안 해도 되겄슈”

산야초 2020. 7. 9. 21:46

[화촌일기] “인자 때꺼리 걱정은 안 해도 되겄슈”

  • 글·사진 이남석 자전거 여행가

입력 2020.07.08 09:48

아버지의 방식대로 다랭이논 일궈 밭벼 수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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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까까머리처럼 단정하게 깎은 논두렁의 주인인 김 노인 내외. 그야말로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보여 주는 교과서였다.

 

여름으로 들어서면서 논두렁 밖으로 땅강아지들이 기어 올라오고, 청개구리가 울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산골에서 논을 만들고 벼농사를 짓는 얘기를 하려 한다.

 

월령으로 ‘맹하孟夏’라 하여 초여름이 되면 논에 물을 대고 두렁을 부치면, 쟁기로 갈아엎은 논을 써레질로 판판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모내기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밭에는 이미 파종한 감자며 옥수수 같은 밭곡식이나 채마가 몸살을 끝내고, 꼿꼿하게 일어서서 잎을 나풀댄다. 그러면 겨우내 쌓아 놨던 두엄창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거름을 퍼내어 웃거름을 준다. 이때야말로 농부들은 제일 바쁜 시기다.

 

숲의 초목은 잎이 만개하고 새 가지를 내기 시작하니, 어른들은 톱을 숨겨놓고 절대 큰 나무를 베지 말라고 했다. 숲과 경작지에 초목과 곡식의 생장이 얼마나 치열한지 제법 풍성하게 흐르던 도랑물조차 이 시기엔 줄어드는 걸 볼 수 있다. 옛날에도 이때만큼은 농사일로 바쁜 백성을 동원하는 토목공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산골은 어디를 가나 논이 드물다. 그래도 명절 차례 상에 쌀밥은 올려야 하니 어떻게든 벼농사는 지어야 했다. 계곡에 물을 댈 수 있는 도랑이 흐르면 다랭이논이라도 만들 수 있었지만, 그마저 없으면 밭에 밭벼를 심었다. 육도라고도 부르던 밭벼는 밥맛은 그만두고라도 명색이 벼이니 다랭이논조차 만들 수 없는 화전민들은 밭벼를 심었다. 워낙 소출이 작아 하루갈이 밭에서 두 섬을 탈곡하면 괜찮을 정도였다.

 

내가 정착한 홍천 도광터에 화전민들이 경작하던 다랭이논이 있는데 수십 년간 방치돼 묵정밭으로 변한 것을 올해 일궈 고추를 심었다.

 

이미지 크게보기작약(함박꽃)이 색색깔 꽃을 피웠다. 산촌에서는 간혹 한약재인 작약을 재배하기도 한다.

 

내 아버지는 화전민이었다. 화전을 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밭을 일궜고, 그 다음은 논을 치기 위해 조금이라도 물이 흐르는 곳을 찾았다. 개울물이 얼기 시작하고 잎을 떨군 뚝버들가지가 틀어지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지게에 곡괭이와 철장을 짊어지고 나를 데리고 근처 도랑으로 갔다.

 

물줄기가 조금 흐르더라도 사철 마르지 않는 곳을 택해 근처 나무를 베어냈다. 도랑을 중심으로 쐐기 모양, 또는 멍에처럼 생긴 계곡 밑바닥을 막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도랑이 좀 크면 경사를 따라 길게 석축을 쌓고 흙을 파 내리기 시작했다. 큰 돌은 철장으로 뽑고 작은 것은 곡괭이로 파내 도랑 아래부터 쌓았다. 개울을 터전 삼아서 살던 가재들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는데, 결국 이놈의 가재들이 나중에 논두렁에 구멍을 내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에에 이에, 양덕 맹산 흐르는 물은 감돌아든다고 부벽루하로다.”

 

철장으로 집채만 한 바위를 빼내려니 힘은 배로 들고 이마에서 물방울 같은 땀이 뚝뚝 떨어지면 아버지는 철장을 놓고 양산도(민요) 한가락을 뽑았다. 흙 묻은 손으로 땀을 훔치고 옥처럼 흰 차돌에 윗도리를 벗어 놓으면 겨울은 겨울이 아니었다. 너른 들판에서 두어 걸음만 걸으면 될 정도의 논을 만들기 위해 겨울 내내 산속 도랑에서 곡괭이질을 했다.

 

이미지 크게보기일주일 넘게 다랭이밭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하루 종일 씨름하여 캐낸 돌 앞에 선 필자.

 

아이들은 꼴 베러 가는 게 큰 일

논은 골의 모양에 따라 두렁이 뱀처럼 구부러지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런 논을 충청도에서는 다랭이, 강원도에서는 ‘다랑구지’라 불렀다. 봄이 시작되면서 논이 완성되면 토질의 특성상 심토가 겉으로 올라와 거름기 없는 맨바닥이나 마찬가지였다. 초봄부터 부지런히 돌을 골라내고 거름을 내서 땅에 찰기를 높이고 나서 마지막으로 물을 댔다. 심심산골에서 벼를 수확할 수 있는 논을 만들었으니 가족들은 얼마나 기뻤겠는가. 갈개를 쳐서 찬물을 돌리고 두렁을 부쳐 모내기가 끝나면 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물꼬를 보러 다녔다.

 

이렇게 계곡 하나를 정해 한 배미 한 배미 논을 만들기 시작해 3년 정도 지나면 제법 많은 다랭이논이 완성됐다. 어느 해는 여름 폭우에 논둑이 무너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큰물에 휩쓸려 유실된 논둑을 다시 쌓았다.

 

논둑에 무성해진 풀을 깎는 것도 일이었다. 지금이야 소에 코뚜레를 꿰는 일도 없고 사료만으로 키우니 풀을 벨 이유가 없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꼴(소에게 먹이는 풀)을 베서 소를 키웠다. 그러니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 집어던지고 소를 몰고 꼴을 먹이러 나가거나 아니면 꼴을 베러 가는 게 일이었다.

 

봄에 꼴은 논둑에서 베고, 여름에 꼴은 숲에서 벤다고 했다. 숫돌에 잘 간 낫을 들고 논둑으로 가서 꼴을 베다 보면 낫에 걸리는 게 뱀이고 개구리였다. 더구나 논둑에 심은 두렁콩을 피해 낫질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터에서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신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오다가 다랭이논 옆을 걷다 보면 반딧불이는 꼬랑지에 불을 매단 채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낟알이 통통해지면서 몸뚱이가 무거워지고 억세진 벼 잎이 골바람에 제 몸을 부딪치면서 스삭댔다.

 

입추가 지나고 서리가 내린 뒤 벼 잎이 마르기 시작하면 마침내 벼를 벴다. 너른 들판의 물갈이논과 소출을 비교할 바 아니었지만, 산골짜기에서 논농사를 짓고 벼를 수확한다는 것만으로도 화전민은 부자나 마찬가지였다.

“인자 때꺼리(끼닛거리) 걱정은 안 해도 되겄슈(필자의 고향은 충남 청양 칠갑산 자락이다).”

“얼른 묶으라!”

 

“조상님 제상에 인자 우리 쌀루다가 밥 지어 올릴 수 있어유.”

바심(타작)하는 날 호정기에서 떨어지는 낟알을 보며 감격한 어머니는 아버지가 탈곡 후 던지는 볏짚을 묶으면서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무리 정성껏 벼를 떨어도 다랭이논 세 배미에서 나온 낟알이 얼마나 되겠는가. 감자와 옥수수마저 떨어진 보릿고개를 쌀로만 때울 수는 없겠지만 곳간에 들어갈 낟알에 어머니는 마음만은 평화로웠던 것이다.

 

지금이야 비료와 농약이 흔하고 소와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를 써서 하니 농사가 쉽다지만 그때는 기계도 없고 비료도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특히 논에 낼 거름을 만드는 것이 큰일이었다. 소가 없는 집은 돼지라도 키워 거름을 만들었다.

 

이미지 크게보기직접 땅을 파서 만든 연못. 밤에는 개구리 소리로 요란하다.

 

산에 가서 풀을 베다가 외양간에 넣어두면 자연적으로 쇠똥과 합쳐진 두엄이 만들어졌다. 이 두엄을 한 곳에 쌓아놓아 적당히 발효시킨 후 논에 뿌리고 쟁기로 갈아엎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것도 모자라면 써레질한 후 곤죽이 된 흙에 산에서 벤 생풀을 넣고 발로 밟았다. 그러면 생풀이 썩으면서 논바닥에서 메탄가스가 올라와 부글부글 끓어오르곤 했다. 그렇게 키우니 벼가 건강해져 어지간해서는 병해를 입는 일이 드물었다.

 

산두벼(밭벼)는 워낙 소출이 낮아 수확을 해도 명절이나 제사에 쓸 쌀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을이 되면 산두벼를 심은 밭에는 멧새나 들쥐가 들끓었는데 이런 들짐승들에게 보시를 한 후 벤 벼는 홀태라고 부르는 것으로 타작을 했다.

 

자전거로 홍천읍내를 출발해 도광터를 가다 보면 당무마을을 지나는데 오래된 농가를 볼 수 있다. 뒷간 옆에는 늙은 밤나무가 집을 굽어보고 옆으로 문전옥답이 있으며, 길 건너 산 밑으로 비탈밭이 있는 전형적인 강원도 농가다. 옥수수를 심은 밭고랑에는 풀 하나 없이 깨끗하고 가지런한 것이 마치 미술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비탈밭 한가운데나 가장자리에 똑같은 키로 자란 옥수수를 보면 거름을 골고루 뿌린 증거였다. 중학생 머리처럼 단정히 깎은 논두렁, 방동사니나 피 한 포기 없는 논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했다.

 

집주인 김 노인의 논밭은 그야말로 농부가 어떻게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보여 주는 교과서였다. 안주인은 질박하고 후덕하며 근검해 여간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도광터에서 메주를 쑤고 장을 담그던 초보자 시절, 콩물을 조절하는 방법부터 불을 때는 방법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메주를 띄우고 막장을 담는 방법을 자세하게 배웠다. 김 노인은 어려서 일제 강점기를 지낸 얘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게 된 사연을 펼쳐놓았다.

 

“쌀농사를 지어도 일본 놈들한테 열에 넷은 공출해야 하니 어디 그걸 가지고 먹고 살 수 있나? 그러니 모두 산골짜기로 기어들어갔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두 눈은 총명하고 어깨와 다리에 근력이 완강했는데 13년이 지난 근자에 다시 찾아뵈니 오래 묵어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귀틀집처럼 시간을 이기지 못한 서운함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내외가 건강한 모습으로 옥수수밭에 나가 호미질 하는 것을 보니 공작산 밑으로 흘러내린 능선을 넘어 지게 지고 나무 베러 가던 완강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는 쌀이 귀했지. 한 말 지고 장에 나가 팔면 제수를 다 사고도 남았어.”

당시에 쌀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설명하던 김 노인 말대로 쌀은 모든 물가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니 논 한 마지기에 쌀 몇 가마니, 머슴 1년을 살면 새경으로 쌀 몇 가마니, 이런 식으로 화폐 대신 쌀이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쌀이 귀했으며 벼농사 자체가 손품이 많이 가는 일이라 힘들던 시절이었다. 6·25가 끝난 후 산아제한이 없었고, 집집마다 봉양해야 할 부모는 물론이고 애들이 넘쳐나니 먹고 남는 양식이라는 말은 사치였다. 그래도 먹을 걸 아껴가며 남겨둔 곡식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장에 내다 팔아 돈을 마련했다.

 

이미지 크게보기김 노인의 논과 뒷간(화장실). 재래식 화장실로 여전히 똥지게로 거름을 주고 있다.

 

죽을 힘 다해 걸어 장에 나가 팥 팔아

“팥 느말(4말=72리터)을 지고 50리(20㎞)가 넘는 홍천장을 가는데, 봇두랑길을 지나 탄마리골을 가면 거기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 장사꾼이지. 그 장사꾼한테 팔면 3,800원이야. 거기서 좀 더 가서 말고개 너매(넘어) 군업리까지 가면 거기서 또 장사꾼이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서 팔면 4,000원이야. 죽을 힘을 다해 성산강까지 가면 배로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 있었어. 뱃삯을 주고 강 건너 장에 가서 상회에 팔면 4,500원이었지.”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팥을 지고 장으로 가던 얘기를 하던 김 노인은 그 시절을 얘기하면서 파안대소했다. 어디 이런 일이 김 노인뿐이었겠는가. 어머니들도 곡식이 든 자루를 머리에 이고 장마당까지 그 먼 길을 걸어가야 했다.

 

김 노인과 헤어져 다음날 옛 다랭이논이 있던 자리로 가서 일주일 전에 시작한 밭 일구는 작업을 계속했다. 곡괭이로 돌을 캐내고 나무뿌리를 끊어내 묵정밭을 일구는 작업이다.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막상 해보면 고되다는 걸 깨닫는다. 아마 혹자는 굴착기를 불러다가 한나절만 하면 될 텐데 뭘 힘을 빼느냐고 충고할지도 모른다. 몸 쓰는 일이 결과가 반드시 빠르게 나타나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길 수는 없다.

 

곡괭이를 내려놓고 잠시 밑으로 내려와 땀을 식히는데 컨테이너 기둥 틈바구니에 새끼를 친 딱새가 먹이를 문 채 나뭇가지에 앉아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마루에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딱새는 불안한 듯 새끼들한테 가지 않고 계속 딴 짓만 한다. 짐짓 모르는 척하며 먼 산을 바라보니 그제야 제집으로 들어간다.

 

비가 부족해 밭곡식은 자세를 꼿꼿하게 가누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반면 숲의 초목들은 바람에 잎을 흔들면서 건강함을 뽐내고 있다. 어려서부터 변화하는 자연에 부단히 부대끼고 적응한 결과다. 돌에 뿌리를 걸친 산뽕나무는 올해 큰 가지 하나를 스스로 고사시키더니 유독 오디가 많이 열렸다.

 

일주일 걸려 새로 만든 연못에 무당개구리들이 모여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았다. 며칠 뒤 살펴보니 고물고물 올챙이들이 헤엄치기 시작했다. 밤에는 청개구리들까지 연못가에 모여 합창을 해댔다. 연못이니 물고기가 사는 것도 개구리에게 친구가 될 것 같아 미꾸라지를 방생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많던 올챙이들이 모두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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