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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남양만 격랑 위로 여전히 태양은 빛나고…

산야초 2020. 12. 30. 13:59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남양만 격랑 위로 여전히 태양은 빛나고…

[242] 2020년 세밑에 가본화성 남양만

남양만의 빛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12.30 03:00

 

경기도 화성 궁평리와 매향리 사이에 있는 바다를 남양만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굉장히 넓었는데 세월에 걸친 간척사업 끝에 상당 부분 땅으로 변했다. 그래서 남양만에 있던 가장 큰 포구 마산포는 뭍이 되었다. 마산포 앞 어섬[어도·魚島] 또한 언덕으로 변했고, 어도마을 앞에는 어도 버스 종점 이정표가 서 있다. 땅이 채 되지 못한 물은 화성호와 시화호라고 한다. 땅으로 변한 바다, 남양만 위로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이야기.

 

물 위에 떠 있는 버스 종점, 섬이었던 어도. /박종인

[242] 2020년 세밑에 가본 화성 남양만

흥선대원군 납치되던 날

임오군란 와중인 1882년 7월 고종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청군에 의해 끌려갔다. 그를 태운 청 북양함대 군함이 출발한 곳은 남양만 마산포였다. 혐의는 ‘난(亂)의 괴수’였다.(‘흥선대원군 사료휘편’ 4권 ‘대원군 체진 비망록’, 현암사, 2005) 마산포 주민 최만진(66)은 이렇게 추억한다. “대원군이 우리 할아버지 집에 하루를 묵고 갔다”고. 마산포에는 다 쓰러져가는 집이 한 채 있는데 경주최씨 종택이다. “진(陣)터에 어르신을 재울 수 없어서 우리 집에 모신 걸로 안다.” 청나라 참모 마건충이 기록한 ‘동행삼록’에는 마산포 숙박 여부가 기록돼 있지 않으니, 거인의 발자국은 옛 사람 기억 속에나 남았는지도 모른다.

 

대원군을 태운 배는 청나라 북양함대 소속 1258톤짜리 등영주(登瀛洲)호였다. 그 군함이 정박할 정도로 마산포는 큰 항구였다. 갓 개항한 제물포와 달리 삼국시대부터 대륙과 교역하던 무역항이었다. 그런데 지금 마산포는 작은 배 한 척 드나들지 못하는, 땅이다.

 

1882년 남양만 마산포를 통해 청나라로 끌려간 흥선대원군. 사진은 청나라 억류 당시 모습이다. /서울역사박물관

 

황금을 캐던 마산포 그리고 어섬

이종천(69)은 어섬 토박이다. 어섬은 말 그대로 물고기가 널린 섬이다. 마산포와 어섬 사이에 바다가 있었다. 물 빠진 갯벌에는 조개와 굴이, 물이 든 그 바다에는 물고기가 널린 바다였다. 파시(波市)가 열리면 남양만을 에워싼 온 바다 섬에서 배들이 몰려와 부두를 메웠다.

 

장관이었다, 라고 이종천이 말했다. “인근 사강에서 장이 열리면 우시장에 가는 소들이 선착장에 우글거렸고, 소몰이꾼들도 그만큼 많았다. 어섬은 정말 부자였는데….”

 

‘였는데’라는 말꼬리에 아쉬움이 진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파시가 문을 닫고 밤이 되면 부두에서는 화투판이 벌어졌다. 판돈을 잃은 사람은 담배 한 대 꼬나물고서 갯벌로 갔다. 그물을 거두면 물고기가, 갯벌에 호미를 집어넣으면 조개가 튀어나왔다. 아이들 교육비도 바다에서 나왔고, 그 아이들은 장성하여 모두가 잘살았다. 잃은 판돈까지 바다에서 회수하던, 그 시절에 대한 미련이 말꼬리에 묻어 있다.

 

그 바다가 지금 사라졌다. 남양반도 북쪽에는 시화방조제가, 남쪽 남양만에는 화옹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바다가 땅으로 변한 것이다. 부두를 채웠던 배들도 사라졌다. 배들이 떠나왔던 터미섬과 선감도와 불도와 탄도와 작은딱섬과 쌀섬과 외지섬과 쪽박섬과 할미섬과 형도와 우음도도 사라지고 산이라 부르기 민망한 언덕과 야산으로 변했다. 주민들이 애써 만들었던 어섬과 마산포 사이 세월교 개미다리는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뀌었고, 그 끝에 어섬 버스 종점 이정표가 서 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완전히 거꾸로 된 엄청난 일이 남양만에서 벌어졌다.

 

사라진 섬, 농섬

남양만 남쪽 매향리 앞바다에서 농섬이 사라진 이유는 많이 다르다. 매향리와 궁평항을 잇는 화옹방조제로 남양만은 화성호로 변했다. 숲이 우거졌다고 ‘짙을 농(濃)’ 자 농섬은, 방조제 바깥에 있었는데도 지금 없다. 정확하게는, 밑동만 남았다.

 

6·25전쟁이 한창인 1951년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미 공군은 이곳 매향리를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훈련장 이름은 쿠니 사격장(Kooni Range)이다. ‘쿠니’는 매향리 옛 이름 ‘고온리’에서 따왔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낯선 외국에서 온 전사들이 쿠니 레인지에서 폭격을 훈련했다. 토착 주민은 물론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까지, 조개와 굴을 주우며 살던 사람들에게는 희생이 강요됐다.

 

남양만 매향리에 있던 쿠니사격장의 흔적. 분단 현실 속에서 50년 동안 주민들 생존권을 위협했던 폭격 훈련은 종료됐다. /박종인

 

전투기들은 하루에 수백 번씩 마을 상공을 선회하며 대기하다가 순서에 맞춰 기총사격과 포탄 투하 훈련을 했다. 기총사격은 마을 앞 논과 밭, 폭격은 앞바다 농섬과 윗섬과 구비섬이 타깃이었다. 50년 세월 사이 구비섬은 완전히 사라졌고 윗섬과 농섬은 뼈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