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가 기다리는데…수만 병력 12km 앞 고개서 사라졌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1.01.30 00:26 수정 2021.01.30 10:57 | 722호 24면 지면보기
인조는 다시 혹독한 겨울을 보낸다. 또 한성을 비운다. 세 번째다. 1636년 12월(이하 음력), 병자호란이다.
1637년 1월 병자호란. 남한산성에서 웅거하고 있는 인조를 구하기 위한 수천, 수만의 병사가 경상도 등지에서 올라오다가 경기도 광주의 이 대쌍고개 근처에서 청나라 군대에 의해 궤멸된다. 김홍준 기자
시간을 돌려 1624년 1월, 부원수 이괄이 난을 일으켜 평안도에서부터 기동 기만술을 벌이며 한성으로 몰아쳤다. 이상훈 육사 군사사학과 교수는 "기동 기만술은 당시 획기적인 전술인데, 시간이 생명인 반군으로서는 굳이 관군과 교전하지 않고 한성으로 속도를 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4>- 경기도 광주 쌍령
병자호란 중 벌어진 조선 최악의 패전
1년 전 이괄의 도움으로 광해군을 몰아내 왕위에 오른 인조는 공주로 피신한다. 인조의 첫 번째 파천(播遷)이었다. 한성 무악재의 ‘안현전투’에서 이괄군은 관군에 궤멸한다. 이괄은 한명련 등과 함께 광희문-삼전도-광주로 빠져나갔지만 한성에서 영남을 잇는 경안역 근처에서 반군 수하인 이수백·기익헌 등에게 목이 베어 죽음을 맞는다. 2월 12일이었다. 인조는 공주 공산성에 도착하기 하루 전 그 소식을 듣는다. 이괄의 수급을 확인하고 22일 환궁한다. 이괄의 머리는 창끝에 꽂혔다.
인조는 1627년 1월 정묘호란 때 강화로 두 번째 파천을 한다. 그리고 병자호란. 청군은 공성전을 피하며 한성으로 들이닥친다. 이 교수는 "청군이 상인으로 위장하는 기만술로 압록강을 건너 길을 뚫은 뒤, 조선군이 지키는 성과 대치할 최소의 병력만 남기고 한성으로 속도를 냈다"고 설명했다. 13년 전 도주하던 이괄군 일부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에 들어가 조선의 국방 정보를 불었다는 건 이미 밝힌 바 있다.〈중앙SUNDAY 1월 2일 자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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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로 가는 길이 청군에 막히자, 인조는 이괄의 도주로와 같은 광희문을 통해 도성을 벗어난다. 광희문은 도성 내 시신을 내보낸 문이다. 시구문이라고도 한다. 광희문을 이용한 왕은 인조가 유일하다. 인조는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같은 길을 간 이괄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물들었을 경안역이 지척이다.
경기도 광주 대쌍령리에 있는 교통표지판은 남한산성이 21km 거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직선거리로는 12km다. 1637년 1월 남한산성의 인조를 구하기 위해 북상 중이던 수천, 수만의 조선군은 이 곳에서 청나라 군에 의해 와해된다. 김홍준 기자
#인조, 이괄과 같은 광희문 통해 탈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근왕(勤王)' 명령을 내린다. 근왕은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적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지 벌써 엿새…빨리 달려와 군부의 위급함을 구하게 하라(인조실록 1636년 12월 19일).’ 비변사를 통해 경상감사 심연이 납서(蠟書·밀로 봉한 비밀문서)를 받는다. ‘나는 지혜가 부족하고 어질지 못하여 너희 사민을 저버린 바가 많았도다. 너희는 각자의 지혜와 힘을 모아서…북으로 진군할지어다…이에 교시하노니 잘 생각하고 알아서 행하여 주기를 바라노라(인조실록, 병자호란사).’
상관의 ‘알아서 하라’는 말만큼 엄한 게 없다. 심연은 군사를 모은다. 그 수가 4만(연려실기술, 병자일기)이라고도 하고, 8000(조선왕조실록, 병자호란사)이라고도 한다. 3만설(심연 묘비문, 하담파적록)도 있다.
심연은 끌어모은 병력을 서둘러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보낸다. 허완(68·경상좌도 병마절도사)과 민영(54·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선세강(61·안동 영장) 등이 앞서 출발했다. 이의배(61·공청도 병마절도사) 등도 합류한다. 심연은 뒤따라가기로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당시 각지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한 근왕군은, 현역 정예병보다 의병과 속오군이 훨씬 많았다”며 “게다가 보급품이 모자라, 이미 추위와의 싸움에서부터 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 무관 지휘한 문관 도경유, 먼저 줄행랑
지난 18일, 경기도 광주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홍민자(69)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쌍령전투를 떠오를 수 있는 곳은 정충묘와 이후락이 세운 비석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국수봉 남쪽 곤지암천변에는 허완의 병력이, 대쌍리 쪽에는 민영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홍 해설사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귀화한 김충선의 150여 명 병력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이 경상과 충청의 근왕군은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청나라 군대와 전투를 치른다. 청군의 수가 300이라고 한다. 극적 전개를 위해 최대 편차인 ‘4만 vs 300’ 구도를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 숫자 또한 불확실하다. 광주문화원은 남한산성 동문의 청군 본진에서 3000여의 기병이 이때 경안천에 이르렀다고 제시한다.
근왕군이 쌍령에 도착한 1636년 12월 30일에도 폭설이 내렸다. 대쌍고개만 넘으면 경안역이요, 남한산성까지는 30리(12㎞) 거리다. 하지만 근왕군을 지휘하는 종사관 도경유는 한시바삐 남한산성에 가야한다며 장수들을 채근했다. 도경유는 이미 ‘지옥의 행군’에 항의하는 민영의 부관 박충겸을 참수했다(연려실기술·인조실록). 전시 상황인데, 문관이 무관을 지휘했다.
경기도 광주 국수봉(오른쪽)을 끼고 흐르는 곤지암천. 홍민자 경기도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쌍령전투에서 청군에 궤멸한 조선군이 이 곤지암천 부근에 주둔했고 청군은 오른쪽의 국수봉을 통해 기습을 했다고 한다. 김홍준 기자
경기도 광주의 쌍령은 소쌍과 대쌍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다. 3번 국도 경충대로 상에 있는 대쌍령리 표지석 뒤로 멀리 보이는 산이 청군이 영남 근왕군을 기습하는 데 이용한 국수봉이다. 김홍준 기자
한 교수는 “당시 청군은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막고 있었다”며 “영남뿐만 아니라 각지의 근왕군이 남한산성에 발도 붙이지 못 하게 했다”고 했다. 청군은 이미 이 영남 근왕군을 포위하고 있었다(병자일기).
공조참의 나만갑은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을 기록한다. 그의 『병자록』에 따르면 허완은 정예 조총수를 진영 가운데에 집중 배치했다. 진영 바깥쪽이 약해지게 됐다. 화약을 2냥씩(조총 격발 분량에 대한 해석이 3발, 5발,10발 등으로 갈린다) 나눠줬다.
1월 3일 아침. 청군 33명이 국수봉 능선에서 벼락처럼 내려왔다. 선세강이 춥더라도 능선에 진영을 구축하자고 했으나 허완이 묵살하지 않았던가. 때늦은 후회다. 약한 고리인 허완의 최전방 포수들이 난사했다. 화약이 떨어졌다. 화약을 더 달라고 소리쳤다. 적이 이 말을 용케 알아듣고 돌진. 선세강이 홀로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청군의 목방패에 맞고 떨어졌다. 선세강은 적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적병이 목책 안으로 쇄도했다. 중상급 포수들은 총 한번 쏘지 못하고 무너졌다. 허완은 세 번이나 부축 받아 말에 오르려 했으나 번번이 떨어져 밟혀 죽었다. 다른 기록에는 자결했다고 한다. 남급의 『병자일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흩어진 병사들이 목책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면 그 뒤로 계속 시체가 쌓였고, 목책을 넘은 병사는 추락해서 죽었다.’
『병자록』은 다시 ‘민영 진영에서 화약이 폭발했다. 청군이 이틈에 돌격하니 전군이 전멸되고 민영도 사망했다. 적이 죽은 자 옷을 벗기고 불을 놓아 태우고 갔다. 마침내 적 300여 기병에게 좌우 양진이 격파되었다’고 적는다.
대통령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이 1637년 1월 병자호란 쌍령전투에서 전사한 선세강 장군을 추모하여 세운 비석. 비석을 세울 당시인 1979년 9월은 이후락이 국회의원(울산시·울주군)이었을 때다. 김홍준 기자
승정원일기에는 ’수습한 시신은 100분의 1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길에 버려져서 까마귀나 개가 제멋대로 뜯어 먹어 백골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1637년 4월 7일)‘고 나온다. 대쌍고개를 넘나들며 수많은 청군의 코를 자루에 담아 사기를 높이던 김충선도 결국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조선과 청의 화의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치르자, 김충선은 탄식하며 달성으로 돌아간다(모하당집).
#도중에 말 돌린 심연…정충묘 위패 철거
강행군을 강행한 도경유는 어떻게 됐을까. 인조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접전이 시작되자 도경유가 먼저 도주하여 전군이 놀라 무너졌으므로 온 도내의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먹고 싶어 합니다(1637년 5월 21일).’ 『병자일기』는 ‘도경유가 뒤에 귀양 가는 도중 총에 맞아 죽으니 사람들은 말하기를, 박충겸의 노복과 아들이 복수한 것이라고 하였다’고 남긴다. 뒤따라온다던 심연은 여주까지 왔다가 쌍령전투 소식을 듣고 조령으로 말을 돌린다. 그곳에서 숨어 지내다 적이 온다는 거짓 정보에 수하들과 말에 올라 달아나기도 했다. 결국 임파로 귀양 갔다(연려실기술·용주집).
경기도 광주 초월읍 대쌍리에는 1637년 1월 병자호란 쌍령전투 때 전사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 공청(충청) 병마절도사 이의배 장군과 안동영장 선세강의 위패를 봉안한 정충묘(精忠廟)라는 사당이 있다. 김홍준 기자
홍 해설사는 “당초 심연의 위패가 정충묘에 있었는데, 기록을 보니 사당에 모실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에 철거했다”고 말했다. 쌍령전투는 칠천량해전과 더불어 조선 최악의 패전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분분하다. 근왕군과 청군의 숫자부터 애매하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잊고 싶은 전투인 데다, 청나라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쌍령전투는 군사학 연구 대상이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쌍령에서 허무하게 졌고 수많은 이들이 죽었음은 확실하다.
대쌍고개 위로 거센 눈발이 날린다. 근왕군이 쌍령에 도착한 1636년 섣달그믐처럼.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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